[🌤️시인이기10] 빛이 남기고 간 자국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시월에 쓰는 열 번째 편지입니다.

저는 매년 시월 초입에 비슷한 일기를 씁니다. 시월에는 전부 괜찮아진다는 내용입니다. 모든 것이 자리를 찾고 편안해진다고. 매년 느끼는 이 기분을 잊지 않기 위해 또 쓴다고요.

이맘때면 삶이 매끄럽게 정돈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에요(실제론 아닐지도요). 아마도 빛과 바람이 적정한 기운으로 흐르기 때문일 거예요. 빛과 바람. 둘 다 과하면 아프고 적으면 괴로워집니다. 흥분과 울적 사이에서 잠시 평온해지는 순간이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시월이 있습니다. (고마워!)

구석구석 환해지는 시월 한 달 동안, 저희는 빛에 대해서 써 보기로 했습니다. 이번엔 빛이 등장하는 시를 읽고, 주절주절 말들을 덧붙여 보았어요. 이 주 뒤에 보내드릴 11호와 12호에서는 또 다른 빛들을 담아 보겠습니다. 메일을 확인하는 구독자님의 마음도 덩달아 환해질 수 있기를 바라며…👼

잠깐 빛나다 사라질 이 계절을 부지런히 걷고 있어요. 오늘 산책길에는 마침 아름다운 것을 보았습니다. 가게 유리창 안쪽에 그림들이 주욱 걸려 있기에 다가가 봤습니다. 풍경과 동물들, 사람들을 색색으로 담은 그림이었어요.

종이의 왼쪽 아래에는 그림을 그린 날짜가, 그 오른쪽에는 그림에 대한 간단한 메모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메모는 전부 '내 나이 **세 우상희'로 시작합니다. 날짜와 나이, 이름과 메모. 그 한 줄이 어떤 진술처럼 느껴져서 꽤 오래 바라보았어요.

그중 기억에 남은 그림 몇 개를 소개하며, 메모를 옮겨 봅니다.

2017.4.16. 내 나이 85세 우상희 닭은 21일이면 병아리를 깐다

2017. 6. 1. 내 나이 85세 우상희 이 그림은 테레븨에서 23초 동안 보여주는 그림(바다 위에 삼봉바위)을 그린 것이다

2023. 1. 31. 내 나이 91세 오늘은 1월달 마지막 날일세 우리 집에서 해 뜨는 시간 7시 50분이다

그림을 오래 구경하며,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년 시월에도 똑같은 일기를 쓰고 똑같이 산책길에 예상치 못한 빛들을 마주하길 바라면서

오늘의 메일을 보내 보아요. 구독자님, 매끄러운 날들 되시기요.

차재신

    드디어 꿈이 사라지려는 순간, 너는 창밖에서 잠든 나를 보고 있지

    암초 위에서 심해를 굽어살피는 너의 낯빛에 놀라자 꿈은 다시 선명해진다

    들로 강으로 흩어지던 내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내가 이곳을 설계했다 믿었는데 아니었던 거지

    블라인드 틈으로 드는 빛이 어둠을 망친다 생각했는데 눈은 여전히 감겨 있고, 몸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너의 노래에 묶여 있었다

    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

    눈 속으로 하해와 같은 빛이 밀려들었다

- 송승언, 「녹음된 천사」 전문

빛과 관련된 작품을 생각했을 때 이 시가 떠올랐다. 간혹 어떤 시들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도 기억에 남곤 하는데, 「녹음된 천사」가 그중 하나다. 어쩌면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잔상이 남는 것일 수도. 뭐 어쨌든, 나온 지 1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여전히 간지 나는 시다.

‘왜 하필 이 시가 떠올랐는가?’ 하면 마지막 문장 때문이다. ‘빛’이라는 단어가 직접 나오기도 하지만, (읽었던 시들 중) 빛의 이미지가 가장 거대했다. 처음 시를 읽었을 때 ‘하해’가 뭔지 몰라 사전에 검색했더니 ‘큰 강과 바다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하해와 같은 빛’이라니. 뭔진 몰라도 엄청나게 큰 빛인 건 확실하다.

장난처럼 얘기했지만 위 시에서 빛을 다루는 방식이 나에게 무척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녹음된 천사」에서의 빛은 따뜻하거나 온화하지 않다. 오히려 무참하게 밝다. 빛은 겨우 ‘흩어지’려던 세계를 강제로 초기화하는 시스템처럼, 눈을 감아도 거부할 수 없는 존재처럼 폭력적으로 ‘밀려’든다.

화자의 의지는 자신이 ‘설계했다’고 믿은 세계에서조차 거부당한다. ‘꿈’ 속에서나 겨우 ‘흩어지’려나 싶었던 나의 존재는, ‘너’와 ‘빛’으로 인해 강제로 ‘되살아’난다. 마치 가위눌린 사람처럼, 꿈속과 꿈 밖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의식만 깨어 있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영화 ‘매트릭스’가 연상되기도 한다. 빛으로 밝혀지는 세계가 아닌, 빛으로 지워지는 세계.

나에게 빛은 거대하고 추상적이다. 다르게 말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소재다. 빛을 소재로 시를 쓰려고 하니 막막했다. 어쨌든, 청탁받은 원고도 있으니 기똥차게 써야 한다.

연정모

쉽게 흔들리는 무궁화호 안이고, 방금 핸드폰이 고장났다. 조금의 전조 증상도 없이 갑자기 화면이 멈췄다.

그 말은 곧 내가 오늘 퇴근하며 본 빛나는 도로 사진을 복구할 수 없게 됐단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 실어보내려 했던 그림책 사진도. 그래서 빈 마음으로 새 글을 써 본다.

창 밖으로 해가 진다. 최근의 여행에서 알게 된 사실. 탈것에 앉아 바깥을 구경하는 일이야말로 최상의 아름다움 관람법이다. 바깥의 예쁜 것들을 대단한 밀도로, 심지어 앉은 채 포획할 수 있다. 그 편리함을 깨우친 나는 지나치는 풍경들을 유심히 보려 노력해 본다. (비록 핸드폰이 망가졌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도시의 가교가 있고, 여름 내 무성히 번졌다가 이제는 색을 잃어가는 덩굴 식물들이 있다. 전부 주황으로 반들거린다. 하루의 끝 빛이 사선으로 진득하게 내려앉을 때, 사물들 제 힘으로 빛나는 양 의기양양할 때. 사방의 먼지가 전부 읽힐 정도로 세상이 분명해지는 때. 순간은 순간에만 존재하고,

그런 것들이 지나간다. 

지나가면 밤이 온다.

실은 나 밤을 아주 싫어한다. 이렇게 말하면 왜? 물어오는 경우도 있는데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다. 그야 깜깜하니깐… 

밤에는 잘못 재봉된 옷을 입은 것처럼 미묘히 불편하고, 눈꺼풀을 열었다 닫는 사소한 행위마저 경쾌하지 못하다. 어두운 데선 사물의 모서리와 이음새가 분명히 분간되지 않잖아? 그런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이 깨끗하게 작동하려면 다만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빛」

에 대해 무엇을 썼더라. 내 더미 속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 것 같은데. 궁금해져서 내 블로그 검색창에 입력해 봤다. 

「빛」

검색 결과가 무려 여섯 페이지에 달한다. 일기가 대부분이지만 좋아하는 시를 옮겨 적은 것도 있다. 하나 가져온다. 

이 시집을 오래오래 조금씩 아껴 읽던 시기가 떠오른다. 빛이 영글영글 어리는 이미지 속에 있는 기분이 좋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 시의 효능이라 하면 안전감이라 할 수 있겠는데… 장면들이 내 위로 쏟아지는 기분 들 때면 그제야 편안했다. /나는 지금 있을 곳에 있다.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방식의 안도. 빛의 실제에 닿지 않아도 충분한 것.

지상의 빛은:

반사되기, 산란되기, 경계 만들기와 같이 간접적인 방식으로 증명된다. 

우리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멀리서 온 빛이 어딘가에 부딪히고 투과되고 흩뿌려진 자국을. 빛의 본체를 보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느낀다. 이미지와 장면 외에 내가 감지할 수 있는 건 없고

그것을 단어와 문장으로 꾸리는 일 그런 것이

이제는 나를 안전하게 한다.

글을 쓰다가 창 밖을 본다. 해질녘의 찢어질 듯한 빛들은 금세 넘어가고 바깥에 보이는 건 둔탁하게 흘러가는 형체뿐이다. 도로와 나무와 지붕이 지나가는 속도를 가늠한다. 밤에서 아침으로 건너가기까지, 영글영글 빛이 남기고 간 어떤 자국을 글로 써 보기도 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번뜩 지나가지만 괜찮기도 한 것이다.

미지근하게 유영하는 말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먹통이던 핸드폰이 켜졌다. 목적지에 내릴 때쯤 켜진 것 정말 연출 같다. 아주 뜨거운 상태로 내 손 안에 있다. 뿌옇게 빛나는 도로 사진도, 소개하려던 그림책 사진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도로 사진과 그림책 사진이 잠시간 존재하지 못했던 덕분에 이 글을 썼다. 정말 해질녘의 농간 같은 일이다)

🚶생활기

차재신: 부지런히 책 읽고 술 마시며 삽니다.

연정모: 부드럽게 결단하기, 가을에는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