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기11] 빛의 계절인 것처럼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시인이기]의 연정모입니다.

이번에도 지난 호와 마찬가지로 '빛'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봤어요. 멤버십 구독자 분들은 12호에서 빛을 소재로 한 시도 읽어보실 수 있을 텐데요. 한 달 동안 빛에 대한 글과 시를 쓰려니, 계속계속 그 단어를 품고 있을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시월을 빛의 계절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비 오거나 흐린 날이 유독 많았는데도요.

쓰기 전 의논한 것도 아닌데, 재신과 저의 글에 공통적으로 '의미'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꽤나 큰 비중으로, 그러나 전혀 다른 태도로요. 각자 세상을 인지하는 방식이 다르단 걸 느낄 때마다 놀랍고 재미있고 동시에 조금 두렵기도 해요. 서로 이해했다고 믿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 오해로 오염되어 있을까, 생각하면요.

그래서 대화 자체를 꺼리게 될 때도 있는데요. 무슨 말을 해도 온전히 전달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은 거겠죠. 말을 잘 하는 편이 아니라 더더욱 그럴 거고요. 그런데 최근 며칠 동안에는 사람들과 이야기할 일이 많았습니다. 실은 요즘 이곳저곳 피로가 쌓인 탓에 정말 가기 싫었어요. (…😇) 그러나 대화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후회나 찝찝함 없이 편안한 기분이었습니다. 이렇게 긴장 없는 상태는 오랜만이었고, 대화도 즐거울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저희가 구독자님에게 보내는 이 메일도 일종의 대화가 될 수 있을까요? 대화의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 놓고, 너무 큰 욕심을 내는 것 같기도 하네요. 다만 이 편편의 글들이 구독자님에게 잠깐의 편안함을 가져다 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정말루요!

차재신

내가 시를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책임질 수 있는 문장을 쓰는 것’이다. ‘책임질 수 있는 문장’이란, 내가 쓴 문장이 어디로 향하는지 아는 것이다. 우리는 문장에 담긴 의미를 전부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짐작할 뿐이다. 단어 하나에도 다양한 뜻이 있고, 순서와 구성과 맥락에 따라 의미가 매번 바뀌기 때문이다.

‘여기에 없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언어다. 언어의 목적이 그렇다. (눈앞에 사과 놓고 "저거 사과인데요?" 하는 거 말고). 종이에 쓰인 '사과'라는 글씨를 보면 머릿속에 이미지가 구성된다. 대체로 빨갛고, 씹으면 아삭아삭 소리가 나는 과일이다. 사과의 원형이나 개별성 따위는 집어치우더라도, '사과'를 보면 어떤 형상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하나든, 여러 개든 간에.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사과'라는 단어만 봐도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이 떠올리는 사과가 다르다. 그렇기에 문장을 쓴 사람조차 의미(가 전달되는 과정)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내가 건넨 사과와 네가 받은 사과는 다른 사과다. 특히 시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시는 정보 전달의 의도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모든 것을 동원해 정보를 흐린다.

"시는 가뜩이나 알아먹기도 힘든데 왜 정보까지 흐리나요?" 정말 죄송하다. 정보를 밝힐수록 정보에 가려진 의미들이 많아져서 그런 것 같다. (다른 의미로) 나는 시를 정확히 쓰려고 노력한다. 의미를 알 수 없지만, 의미가 '있을 것 같은 곳'이라도 정확히 가리키려고. 늘 실패하긴 하지만.

7년 전쯤 '노숙의 시'라는 연극을 봤다. 오래전에 봐서 내용은 잊었는데, 기억나는 대사가 있다. "인간은 서로 오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신이 사랑을 발명한 게 아닐까?" 우리는 언어의 한계로 서로 오인할 수밖에 없지만, 사랑은 그것을 뛰어넘게 한다.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지만 이 대사는 멋있어서 기억한다.

저번 호에서 말했듯 빛은 감당하기 어려운 소재다. 그래서 쓰는 데 애먹었다. 다만 시에서는, 최대한 빛(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가리키려고 했다. 의미를 비껴가는 언어들 사이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골 싸매고 글을 쓰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연정모

강릉 교동에는 아뜰리에 릴리라는 향초 가게가 있다. 

그곳에는 아직 타지 않은 초들이 있다. 긴 것도 짧은 것도, 단순한 원통형인 것도 자갈이나 소라 모양인 것도 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푸르고 흰 물결을 닮은 바다초. 그 자체로 매끈하고 고요하며 아름다우나, 본격적인 아름다움은 심지에 불을 붙이면서부터 드러난다. 

초가 탄다. 왁스가 녹는다. 심지에서 가까운 부분부터 투명해지며 이내 흐르는 상태가 된다. 그 과정은 모두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는데, 심지어 어느 쪽이 먼저 녹을지 전혀 예측할 수도 없어 무척 흥미진진한 관람거리가 된다. 

말 그대로 뚝뚝 흘러내린다. 

뚝뚝 

초 속에 콕콕 박혀 있던 작은 반짝이들이 촛농을 따라 이동한다. 

초를 이루는 색의 순서: 위에서부터 포말의 하늘색, 먼 바다의 푸른색, 흰 거품의 색. 서로 다른 색들이 투명하게 흘러내려 차츰 쌓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품처럼 굳는다. 조금도 둔탁하지 않은 모양새다.

뚝뚝뚝 하는 율동성 그리고

안정적인 원기둥이었다가 투명한 액체였다가 다시 뽀얀 거품의 이미지로 재구성되는 자유로움.

아름답다.

조용하나 단정치 않다. 언제든 사방으로 흐르며 반짝일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을 내 방에 둘 수 있다는 기쁨.

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초는 그저 조용하다.

초는 아름답게 굳어 있다. 

초의 아름다움엔 아무 의미가 없다.

초는 아름답게 타거나 흐르기도 한다.

가을의 어느 때를 잠시 쉬어가며 느낀 건, 나에겐 전하고 싶은 의미가 없단 사실이다. 나는 그저 가만히 존재하고 싶다. 먼 미래에 뜻하는 바는 전혀 없다. 지금 이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지금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도록 선택한다.

생각과 의견을 차곡차곡 정리해 말할 줄 아는 사람을 늘 부러워해왔다. 동경이라고 할 것도 못 되는 것이, 사실 그냥 신기하기만 하다. 어떻게 저렇게 제대로 말하지?

느낌과 기분에 근거하여 살고 있다. 느낌과 기분에 근거하여 읽는다, 쓴다. 그것이 너를 부끄럽게 하느냐고 묻는다면, 부끄럽다고 대답하겠다. 정확히 존재하는 언어로 발화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종종 슬프고 괴롭다. 언어는 나에게 도구가 아니고 목적이며 그것은 진짜로 오래된 수치다. 

지난 주말엔 희곡 낭독회에 다녀왔다. 모인 사람들이 앉은 순서에 따라 대사를 읽는 행사였다. 그곳의 공기가 좋았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쌓이는 것이, 말미로 갈수록 거기 참여한 사람 모두가 진심으로 대사를 소화하는 것이 멋졌다. 고양감 속에 있었다. 그런 순간이 왜 나를 기쁘게 하는지는 가늠하지 못하고, 가늠할 생각도 없이 살고 있다.

초를 켜고 초를 구경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움을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바람으로,

헛소리를 아름답게 적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헛것들이 녹아 흐르고 

시간과 우연에 의해 

전혀 다른 모양으로 자리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마지막으로 강우근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정말 깨끗한 시집 ⟪너와 바꿔 부를 수 있는 것⟫의 첫 시다. ‘초’가 등장한다는 것 외에 위 글과 연결성은 없으나, 다들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좋으니까. 아름다우니까. 두리번대고 여기저기 들춰보고 그러다 보면 문득 이런 아름다움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오늘의 희망이다.

🚶생활기

차재신: 술 먹고 구직하고 농구하며 삽니다. 대회가 얼마 안 남아서 그런지 꿈에서도 농구를 해요.

연정모: 의도한 것은 아닌데, 요 몇 주간 주말마다 새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지지난 주엔 뮤직 페스티벌에 다녀왔고요(슬램도 강강술래도 드디어 해 봤습니다) 지난 주엔 농구 경기를 직관했습니다(경기가 끝나자마자 다음 일정을 바로 찾아볼 정도로 신났습니다). 토요일인 어제는 친구들과 캠핑을 다녀왔어요(이건 쓰고 보니 처음 해 본 일은 아니네요.. 그치만 그만큼 재밌었단 거). 몇 년 전 일기에 이런 말을 썼던 기억이 있어요. '세상에 신나고 재밌는 게 이렇게나 많다니 역시 오래 살아야겠다.' 방콕으로 회사 워크숍을 갔던 때, 마사지를 받고 나서 쓴 글이었어요.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본 마사지가 충격적으로 좋았거덩여… (모두에게 그렇듯) 사는 거 넘 하드 난이도지만, 내가 아직 모르는 재미가 많다는 걸 생각하면 조금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어요…😊 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