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에테르를 찾아서
*본 기획의 제목은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의 토속 민요들을 소개 해 온 MBC 라디오의 프로그램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와 웹진 [weiv]에서 연재 되었던 포스트록 칼럼 <우리의 포스트록을 찾아서>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습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는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내가 말했잖아 너를 데려간다고
너의 아픔들은 이제 없을거라고
서태지의 <Take One>은 이런 가사로 시작한다. 이 가사의 초월성을 좋아한다. 앨범 전체의 입을 떼는 이 최초의 메시지는 가장 탁월한 첫 마디일 것이고 그것이 내게는 단순한 구원처럼 보이진 않는다. 구원자가 외부 세계에 존재할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간도, 신도 아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외계인에 가까운 그런 존재. 그런 존재만을 믿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미지의 것에 의해 구해지기를 기도한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에 등장하는 ‘릴리슈슈’의 존재와 음악이 그렇다. 3부작 특집 [우리의 에테르를 찾아서] 첫 번째 대담에서는 BOKEH의 시선에서 '에테르'를 정의하고, 각자의 '에테르'가 담긴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았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에서 발췌
서문: 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어떻게 봤어?
상욱: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하 <릴리 슈슈>에 대한 감상부터 이야기 해 보자.
윤: 나는 10대 후반에 이 영화를 봤는데, 그때는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들에게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당연히 똑같은 경험은 아니겠지만 학창시절을 힘들게 보냈던 사람들이 열광할만한 요소들이 있는 영화다. 그 시절의 ‘끔찍한’ 디테일들.
지금 봤으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 시절에 봐서 기억에 남고 좋아하는 영화가 되지 않았나 싶다. 지금 보면 너무 우울하고(웃음), 영화적으로는 그렇게 특별하진 않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 힘들었던 내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릴리 슈슈의 노래를 들으며 등장인물들이 위로를 받는 것처럼, 나도 영화를 보고 릴리 슈슈의 음악을 찾아 들으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상욱: 나는 <릴리 슈슈>를 20대 중반 즈음에 처음 봤는데, 그래서 그런지 (10대 때 영화를 본) 윤과는 다르게 큰 감흥을 받진 못했다. 그러나 이와이 슌지 감독이 어떤 불안정한 관계와 시기를 그려내는 데 아주 탁월한 감독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감독의 모든 필모그래피를 섭렵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의 대표작인 <러브 레터>를 볼 때도 관계의 변화 속의 불안정한 개인의 심리와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모호한 불안감들을 스크린에 잘 담아내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불안정한 성장 과정 속 극단적인 감정이 쌓이고 쌓이다 인물 간의 갈등들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터져버리는 순간들이 인상 깊었다. 아무도 서로의 말을 안 듣고 아무도 서로를 안 믿어주고…
윤: 영화 자체는 2020년대 들어서 인기가 더 많아진 것 같다. 이전에는 매니아 층이 확실한, 좀 컬트적인 인기가 있는 영화였는데 요새는 흔히 말하는 ‘힙스터’ 문화 전반의 향유물이 되었다. 5-6년 전 ‘힙스터’ 문화에서 검정치마가 가지고 있던 아이코닉한 이미지가 이제는 <릴리 슈슈>로 넘어오지 않았나(웃음).
상욱: 그런 유행의 변화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배경 중 하나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라는 점에서 한국의 인디 음악 팬들이 디테일하게 공감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은 것도 한 몫 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사회/문화적인 분위기가 어느정도 비슷해서 그런 요소들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도 쉬웠고.
윤: 파란노을의 정규 2집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이 좋은 평을 받은 것도 <릴리 슈슈>가 다시 많은 관심을 받게 된 큰 이유 하나였다. 당장 앨범의 첫 트랙 <아름다운 세상>의 시작부터 <릴리 슈슈>의 대사(“뭐 듣고 있어?” “릴리 슈슈”)를 삽입했고, 앨범 소개에서도 <신세기 에반게리온>, <잘 자, 푼푼>, <NHK에 어서오세요>와 함께 <릴리 슈슈>를 언급하며 자신이 2000년대 초반의 서브컬쳐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고. 물론 파란노을의 음악적 성과가 명확하게 드러났기에 의미가 있었다.
상욱: 앞서 말한 2000년대의 서브컬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잘 자, 푼푼>이나 <릴리 슈슈>같은 작품들이 ‘힙스터’들에게 언급되는 빈도를 파란노을의 2집 발매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이 말이 기존 작품의 코어 팬들에게는 어쩌면 좀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웃음),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의 발매가 ‘힙스터’ 문화 전반에 이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심상인 ‘소외되고 변화 속에서 갈등을 겪는 개인’을 퍼트리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에테르’라는 게 뭔데?
상욱: 작중 ‘에테르’라는 요소가 릴리 슈슈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릴리 슈슈의 음악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다뤄진다. 영화 속 커뮤니티에서 팬들도 릴리 슈슈의 디스코그래피를 이야기 하면서 “이런 음악은 에테르가 없다”, “이런 음악은 에테르가 있다” 이런 식으로 토론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한국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파란노을의 2집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의 흥행 이후 인터넷 커뮤니티, 특히 SNS 등지에서 어떤 음악을 소개하거나 설명할 때 ‘에테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주로 좋은 평가를 할 때 “에테르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에테르’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 한번 말해보자.
윤: 먼저 ‘에테르’는 어떤 장르나 음악에 사용된 테크닉이나 장르를 떠나 곡 전반에 깔린 특정한 심상을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코어’라고 말하는 창작물의 기반이 되는 정서나 문화 중 하나가 ‘에테르’다.
상욱: 카리스마의 대용어로 흔히들 쓰는 은어인 ‘야마’랑 비슷한 느낌도 있고(웃음). 재미있는 점은 굉장히 다양한 창작물에 ‘에테르’가 있다는 평가를 하는데 어떤 기준점이라고 할 만한 공통적인 요소들이 있을지 정리해보고 싶다.
윤: (심상은)아무래도 주관적이고 개인의 감상과 기억에 긴밀하게 결부 되어 있는 것이지 않나. 객관적인 수치나 명확한 요소를 뚜렷하게 말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런 만큼 ‘에테르’라는 용어가 장르와는 별개로 공통의 심상이 느껴진다면 다양한 곳에 사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상욱: 동의한다. ‘에테르’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을 보면 어떠한 기준이 있는 요소가 아닌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기세’같은 것에 가까운 것 같다. 창작자의 뿌리에서 오는 힘이라고 해야 하나. 이건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가(웃음).
윤: 어떤 공통적인 점이 있다면, 주로 특정한 시기의 노스텔지어가 느껴지는 음악에서 ‘에테르’를 느낀다고 많이 말하는 것 같다. 에테르는 개인의 노스텔지어를 기반으로 한 심상이라고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상욱: 그럴 수도 있겠다. 한국과 일본의 사회문화적 환경이 비슷하니 ‘에테르’의 개념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특히나 학창시절의 기억, 혹은 트라우마가 비슷하지 않나.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의 청소년들이 스트레스를 연속적으로 크게 받는 상황에 다년간 놓여있는 환경이 양국 모두에게 있으니까. 그리고 고통스러운 시기가 지나간 이후에는 그것이 미화되어 어떤 추억처럼 기억되는 일도 잦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윤: 보통 안정적이고 일상적인 편안함을 주는 창작물을 ‘에테르’가 있다고 느끼지는 않지.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세수를 하는, 이런 일상적인 행동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안정적인 것들은 그것이 사라졌을 때 안정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그런 면이 일상적인 안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 어렵게 한다.
상욱: 일상이 무너질 때 생기는 혼란스러운 시기, 혹은 일상이 비일상이 되거나 비일상의 일상이 되어 버리는 격동의 시기에서 느끼는 정신적, 환경적 ‘위태로움’에서 ‘에테르’를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윤: 작중 ‘릴리 슈슈’의 팬덤이 종교 같은 성격을 띄는 것도 그런 면에서 이해가 된다. 위태로운 상황에서 종교에 기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상욱: 그런 면에서, <릴리 슈슈>에 노스텔지어를 느끼고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진 사회가 정말 큰일 났다고 생각한다(웃음). 청소년들이 그런 환경에 계속 놓여 있으면 안 돼!
윤: 진짜 건강하지 못한 사회다(웃음).
미완의 노스텔지어
상욱: 조금은 다른 이야기인데, ‘에테르’를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소가 노스텔지어라는 점에서 영국의 음악인들은 왜 이렇게 우울한 음악을 많이 만드냐는 질문을 받은 기억이 난다(웃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때마다 이미 식민 지배로 얻어낸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시대가 한참 지나가 그 이후에는 아무리 행복해도 그때 같을 수 없을 거라는 무력감이 사회 전반에 자리 잡은 게 아니겠냐고 답한다. 이 말대로 라면 그건 착취의 업보겠지만(웃음).
최근 한국의 음악인들에게서 영국의 80-90년대 음악인들의 작품에 묻어 있는 세대 전반의 무력감과 우울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한국도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했던 국가고, 그 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하면 된다’ 라는 오래된 캐치프레이즈 아래 갈려 나가지 않았나. 이제는 그 반동이 찾아온 게 아닌가 싶다.
밝은 시대를 그리워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그 시대의 아름다운 요소들을 압축한 시티팝 같은 음악이 유행하고, 결국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허무해진다. 필연적으로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흐름이다. 그 과정에서 ‘에테르’적인 작품이 생기는 건 보다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기억들이 함께 해야 하는, 약간은 다른 이야기지만 이러한 흐름 자체는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오래도록 반복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윤: 노스텔지어는 기본적으로 불안정한 감정이다. 결국 돌아갈 수도 없고 다시 재현되지도 못할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안정하다. 음악과 패션의 유행은 비슷한 궤적으로 돌고 돌지 않나. 지금은 조금 열기가 식었지만 Y2K가 작년 한 해 엄청나게 뜨거운 유행이었다. 나는 이것이 사람들의 거대한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내가 중학교 때 한참 이제 불행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때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간절했다. 그때가 2014년이었는데 딱 1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엄청 많이 했다. 그 생각과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우울했다. 그래서 그 시절에 일부러 옛날 영화나 옛날 음악들을 많이 들으며 내가 10년 전으로 돌아갔다는 상상을 엄청 했는데, ‘에테르’의 유행이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고 느낀다.
상욱: Y2K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유행이 이해는 된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처럼 낭만적인 일이 범국가적으로 있었던 시기니까. 그리고 여러모로 다양한 문화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기도 했다. 일본 80년대 버블 경제 시기의 풍요로운 시대상이 담긴 시티팝처럼, 한국인들에게는 Y2K가 풍요롭고 낭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유행은 나의 기분과 상관 없이 오고 가고, 이 말도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서 꾹 참고 있었지만(웃음), Y2K는 요즘 유행에서 그려지는 것만큼 낭만적인 시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늘 한다.
나는 Y2K라 불리는 시기에 초등학교-중학교 초반을 다녔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때까지는 서울에 학생인권조례가 도입되지 않았다. 내 고향인 강북 노원구에서는 매년도 아니라 한 분기에 한 번씩 학교에서 애가 선생한테 맞아 실려갔다, 지각해서 오리걸음 걷다가 근육이 녹았다, 고막이 터졌다, 이런 얘기들이 들려왔다. 학생들도 다른 애들 때려서 병원 보내고 자전거 훔치고, 이런 게 그리 특이하지 않은 일상이었다. 피시방이나 식당에서 다들 담배도 거리낌없이 피우던 시기였다.
앞서 말했듯이 노스텔지어는 굉장히 많은 것을 미화한다. 낭만이 없던 시기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보다 특별히 좋은 시기도 아니었다. 좋은 마케팅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그리워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갖고 싶어서 파는 것이 아니라, 팔고 있어서 갖고 싶어진 대표적인 상품이 아닌가…
윤: 집착이 집착을 부른다(웃음).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집착하다가 이제는 과거의 물건들에 집착을 한다. 어떤 시기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사실 그 시기가 실제로 어떠하였는지, 사실과 큰 관련이 없는 기분이다. 나아질 곳이 없으니까 자꾸 옛날의 괜찮았던 순간들을 환기 시키고 곱씹는 거지.
상욱: 세상이 거대한 동창회 같다(웃음).
우리의 에테르를 찾아서
상욱: 이번에는 우리가 ‘에테르’를 느끼는 한국의 작품들을 한번 말해보자. 윤 먼저?
윤: 내가 정말 에테르의 결집이라고 느끼는 영화는 <고양이를 부탁해>. 2001년에 개봉한 영화인데, 딱 아날로그랑 디지털의 사이의 시대를 그린, 세기말에서 밀레니엄으로 넘어가는 시대의 혼란스러움이 느껴진다.
상욱: 뭐야, 영화를 가져왔어? 나는 영화에 대한 지식이 정말 없는데(웃음). 그래도 ‘에테르’를 느낀 영화를 하나 꼽아 보라면 왕가위 감독의 <타락천사>가 ‘에테르’적 요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론적인 이야기로 이를 설명 하긴 어렵겠지만 이야기가 불안하게 이어지는 와중에 한 컷 한 컷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아름답게 찍혔다.
앞서 말한 <잘 자, 푼푼>에서 동화적인 분위기와 나레이션으로 세상에서 끊임없이 겉도는 개인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려내지 않았나. 그와 비슷한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다.
윤: 역시 불안정한 상황에서 ‘에테르’를 느끼게 된다(웃음). ‘에테르’가 담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지나치다 느껴질 만큼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상욱: 사실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할 줄 알고 준비 해 왔는데(웃음), 나는 모임 별의 음악에서 ‘에테르’를 느낀다. 윤이 말한 <고양이를 부탁해>에 모임 별이 음악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니 둘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면이 있네. 나도 모임 별이 방금 말한 지나칠 만큼 환상적인 이미지를 준다는 점에서 ‘에테르’를 느꼈던 것 같다.
윤: 노스텔지어는 아무래도 좀 과장되어 아름답게 느껴지는 면이 있지 않나. 최근에 닌텐도 DS를 다시 켜서 <놀러오세요 동물의 숲>을 실행했을 때 메인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나를 순식간에 어린 시절로 데려가는 경험을 했다.
아무래도 추억은 개개인의 편차가 클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는 ‘에테르’가 있다” 고 말하는 것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동시대를 살아가며 보편적으로 하게 되는 경험들이 만든 현상 아닐까.
상욱: 그렇지. 나도 닌텐도 DS를 통해 비슷한 경험을 종종 한다.
윤: 나는…음악에서는 관악청년포크협의회에서 ‘에테르’를 느낀다.
상욱: 브로콜리너마저는? 비슷한 감각의 밴드 아닌가.
윤: 아니. 브로콜리너마저는 노스텔지어가 있지만 ‘에테르’는 아니다. 너무 단호했나? (웃음) 하지만 노스텔지어가 ‘에테르’가 되려면 돌아갈 수 없는 시기에 대한 슬픔이나 더 나아질 것이 없다는 허무함이 함께해야 한다.
상욱: 이해했다. 관악청년포크협의회의 그린티 바나나와 브로콜리너마저의 윤덕원은 같은 사람이지만 <밤새> 같은 곡의 슬픔은 분명히 브로콜리너마저가 노래하는 슬픔과 다른 종류의 감정이다.
비슷한 예시로, 나는 Achime의 음악에서 노스텔지어를 느끼지만 ‘에테르’를 느끼진 않는다. Achime의 음악들은 지나간 젊음을 노래하기도 하고(<Pathetic Sight>), 종종 자기파괴적이기도 하고 허무한 순간을 노래하기도 하지만(<불꽃놀이>) 그 와중에 늘 ‘내일’이 있다는 게 느껴진다.
윤: 정리하자면, ‘에테르’는 노스텔지어를 바탕으로 한 심상이고, 바탕이 되는 노스텔지어는 단순히 추억 뿐만 아니라 그 시간으로 돌아 갈 수 없다는 현실에서 오는 고통과 허무함이 함께해야 한다. 우리는 ‘에테르’를 늘 느끼며 사는 셈이지(웃음).
상욱: 아니, 그렇게 마무리 지어버리면 너무 불행한 것 같으니까…(웃음). 다음 순서에서는 좀 더 ‘에테르 전문가’들을 모시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자. 스스로에게 덜 울적한 결론이 날 수 있으면 좋겠다(웃음).
《 작성자 : BOKE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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