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KEH PLAYLIST #숙취
윤
봄에 걸린 감기가 고약하다. 약을 먹고 있고 술은 마시지 않는데 감기약에 취하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취하면 별 것이 다 모호해지니까. 그러다 선명해지고 어느새 그게 다 별 것이 된다. 그래서 술을 좋아한다.
’술 취한 밤 사는 게 무거워 마신 술이 더 무거워‘*
만취의 날이면 꼭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노래를 크게 부르고 싶은 이유는 뭘까?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음악에서는 알코올 향이 나고 비슷하게도 유라유라제국의 음악은 멈추지 않는 현기증 같다. 나는 그게 좋다. 다음 날과 맞바꾼 해방감에 몸이 비틀거리고 지나치게 투명해진 마음이 별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젊은이>
상욱
술은 이상하다. 한 잔 두 잔 취하면 취할수록 크고 작은 기분들의 차이가 흐릿해지고, 그럴 때 뱉는 모든 이야기들은 순서 없이 커다란 덩어리처럼 한데 뭉쳐 쏟아져 나온다. 그런 순간 튀어나온 투박한 마음들이 못나게 느껴질 때 보통 술김에 실수했다는 말을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다 약간은 나의 진심이 아니었는지?
숙취는 더더욱 이상하다. 술기운이 빠져 나가며 느껴지는 두통, 갈증, 텁텁한 입 안 따위의 감각들은 전날 밤 대책없이 뭉개버린 심리적 경중의 경계선을 복구하는 수리비처럼 느껴진다. 저질렀으면 뭐든 책임을 져야 하니까.
그러나 그 책임을 지는 걸 각오하고 툭 말하고 싶은 말들이 종종 있다. 대개는 앞에 앉은 사람에 대해 늘 품고 있는 걱정, 사소한 애정, 큰 미안함, 약간의 불만 따위의 좀스러운 말들이다. 그런 낯간지러운, 혹은 머쓱한 이야기들을 술김에 털어놓을 때마다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곧 숙취가 따라오는 일련의 과정이 완결성과 책임이 있어 다행이라고 늘 생각한다.
퀸즈의 영웅 스파이더맨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라온다는 말을 평생 품고 살듯이 우리 같은 소시민들도 큰 알콜에는 큰 숙취가 따라온다는 말을 품고 살아가는 셈이다.
슬
반 쯤 풀린 눈으로 바라보는 반사된 빛을 좋아한다.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이겨내기 위해 마시는 술이지만, 사람들과 허황된 꿈을 나누며 번뇌에서 멀어지는 것도 잠시, 정신을 차리고 난 뒤 몰려오는 후회와 끔찍한 숙취로 인해 우리는 더 깊은 괴로움에 빠진다.
이런 술자리의 기억들은 ‘이불킥’을 하는 부끄러운 일화로 남거나 다른 술자리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웃긴 이야기로 평생을 따라다닌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우리에게 남은 것은 푸른 기억들 뿐', '거품같이 부숴진 추억들은 모래사장에 남긴 채' 처럼 묘하게 아름다운, 그 장소를 지날 때 불현듯 떠오르는 좋은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나는 이런 반사된 빛 같은 순간들을 위해 술을 마신다.
누군가에겐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될 만큼 끔찍한 숙취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다시 술자리에 나선다. 낯선 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설레기 마련이고 그 뒤에 따라오는 후회는 나중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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