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돌이와 꿈돌이를 경험한 세대라면 VHS테이프와 비디오 대여점 역시 기억할 것이다. (모르는 사람은 한국사 시간에 ‘이런 것이 있었다.’라고 배웠을지 모른다. (허허참!)) 순진무구했어야 당연했던 어린 나이의 나는 비디오가게 유리창에 붙어있던 포스터, 그 중 좀 덜 입은(!) 사람들이 빨간 글씨 가운데 있다면 더욱 눈 여겨 봤다. (아니, 나만 그런건 아니잖아?!) 그 중 반라의 남자 앞에 앉아있는 故강수연 배우가 몽환적인 눈빛으로 뚫어져라 보던 포스터가 있었으니, 제목도 야릇하다, <경마장 가는 길>. 아니, 경마장에 가면 말 달리는 거 보는데, 가는 길에 뭐가 있나? 비디오가게 아저씨가 절대 빌려줄 리 없는 그 작품을 마흔 줄에 들어서야 보게 되었으니, 이게 이리 오래 기다려 봐야했을 작품이었을까 싶다.
19금 비디오가 책과 무슨 관련이 있냐고? 최근 참여한 8090년대 한국소설을 읽는 모임에서 이 영화의 원작인 소설을 읽게 되었는데, 관련 자료를 찾던 중 영화까지 보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찐한 베드씬이 수 페이지에 달함에도 낯 하나 안 뜨거워지는 걸 보면 비디오가게 앞에 서 있던 순수(한 척)했던 내 자신이 야한 걸 야하게 보지 않고 분석하고 있는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나는 한국에 돌아온 지 이제 거의 한 달이 됐지. 그동안 나는 흡사 내가 허구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 가령 길에서 보는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중략) ..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모두 그 원인도 결과도 그리고 의미도 알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지.” (267쪽)
주인공 R은 프랑스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문학박사로, 지방에 가난한 부모님과 자신을 부양하기 위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에서 일한 누나와 여동생들, 그리고 그의 자식 2명을 키우며 시댁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본처가 있다. 유학파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는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자리 잡을 곳을 찾지 못하고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떠돌아다닌다. 유학 당시 동거를 하며 부부처럼 지내던 J는 R이 서울에 올 때마다 다방과 밥집, 여관 등을 함께 다니는데, 매번 R의 불타는 욕구/욕망을 여긴 프랑스가 아니라며 매몰차게 거절한다. “메흐드, 메흐드!(젠장, 젠장!)” 싫다고 해도 갖은 이유를 들어 매달리는 것을 보면 R은 지식인보다 발정난 개와 같았다.

◎ “가난하다는 건 죄악은 아닐지 모르지만 대단히 불편한거야. 돈이 없으면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할지라도 그걸 발휘해볼 수가 없지. 반면에 돈이 많으면 무엇이든지 해볼 수가 있지. 특히 한국과 같은 사회제도 속에서는.” (351쪽)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R에게 가난은 남들보다 수백 배의 고통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다. 공부를 할 때도, 사회생활을 할 때도, 출세를 해보려 할 때도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걸어 다니는 지갑처럼 등장한 인물이 J. 공장장의 딸로 서울에 사는 백수임에도 자가용을 끌고 다닐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그녀가 유학생활 당시 그를 금전적으로 지원했던 것이다. R은 J의 부족한 학업능력을 꾸짖으면서도 논문을 써주는 등 여러 면으로 그녀가 학업을 마쳐서 취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문제는 이 관계를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돈을 줄테니 제발 화내지 마세요. (267쪽)”라는 J의 외침처럼 돈은 R과 J를 현실적으로, 또 감정적으로 묶어주는 수단이며, 또한 관계의 장벽이기도 하다. 가난이 존재하는 한 R은 J보다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R을 동정하느냐? 오우, 노노! 책 전반을 보고 있노라면 R은 J를 가스라이팅 하고 있고, J는 R이라는 개미지옥에 빠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중심 없이 덜 자란 어른마냥 히스테리를 부려대기만 한다. 그래서 독서모임에서 다수가 입을 모아 남긴 인물평은 “R도 싫지만 J도 싫어요.”였다.
◎ “물론 한국에 산다면 장차 나는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직업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고, 또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나아질 수가 있을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432쪽)
처음 혐오에 가까웠던 R에 대한 감정도 더 깊게 생각할수록 달리 해석하게 되었다. 그를 한 가정의 가장이자 아들로 본다면 그는 가족의 희생을 발판삼아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고자 애쓰고, 본인의 감정에 휩싸여 그간 홀로 시부모님과 자식을 돌보며 돈을 벌어온 본처를 버린 냉혈한이다. 그리고 딱히 크게 노력한 것이 없음에도 아무도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는다며 세상을 탓하는 게으른 야심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선을 돌려 그를 R이라는 한 인간으로 본다면 그는 가족들 전체의 도움이 있어야만 그간 해온 학업을 마칠 수 있는 상황이며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이를 갚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비록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 이혼을 하려 하더라도 이혼 후 아내와 자식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책임감 역시 가지고 있다.
나 자신은 R이 살던 당시보다 여성의 인권이 보장된 시대에 살고 있고, 또 여자이자 전업주부이기 때문에 R의 행동 하나하나에 감정을 한껏 이입할 수밖에 없으며, 그를 이성적이고 냉정하게 평가할 수 없다. 그의 비정상에 가까운 집착과 종잡을 수 없는 언행, 심지어 별별 이유를 붙여 행하는 폭력은 물론이거니와 ‘~느냐’, ‘자네~’ 등 현실에서 사용하지 않는 문어체, 버는 건 없음에도 다방과 여관을 줄기차게 다니는 것과 심지어 매일 오전 규칙적으로 똥싸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나는 R이 밉기 때문에 그가 처한 상황과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 “근본적으로 하나의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행위는, 그리고 그 작품을 읽고 어떤 반응을 일으켜야 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자유에 해당하는 문제이고, 따라서 독자는 자신의 자유에 따르는 책임을 다 해야 할 일이지 작가에게 그것을 전가해서는 안 될 일이다." (7쪽)
이 작품은 기존 기승전결의 체계에 벗어나 포스트모더니즘을 잘 구현한 소설로 유명하다. 그래서 구성이 탄탄하다는 것보다 중구난방으로 쓰여진 것 같다. 하지만 표현력이 섬세해서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임에도 술술 잘 넘겨지고 계속 읽게 된다. (나 역시 결말에 집착하다보니 밤을 새우며 완독을 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 같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R의 행위 역시도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책의 후반부에서 R은 J에게 함께 프랑스로 돌아가자는 제안과 함께 관계를 맺는데 성공(?!)하게 되는데, 수 페이지에 걸쳐 마치 유기체를 실험하는 듯 자세하게 묘사된 섹스 장면을 읽으며 순간 작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썼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책의 서두를 보면 작가는 문학작품을 읽고 반응은 하되 독자로서 누리는 자유에 대한 책임을 작가에게 전가시켜서는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작가의 의도에 대해 의심하고 질문하며 책임을 전가하는 것 역시 독자가 보여주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반응의 일부이자 응당 누려야할 자유라고 생각된다.
서두의 ‘이 글에 묘사된 모든 것들이 비록 작가의 상상에 의해 이루어졌다고는 할지라도, 엄격히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는 문구와 같이 마치 책을 현실에 복사-붙이기 한 것 같은 사건이 있었다. 작가가 자신이 근무하는 모 대학에서 제자를 성추행하여 실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물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중립기어를 두고 지켜봐야한다고 하지만 혐의와 별개로 미투를 폄하하는 발언까지 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 작품 속 R은 작가 본인을 표현한 게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이다.
제목과는 달리 경마장과는 하등 관련 없고, 말 한 마리도 나오지 않는 소설이지만 “도대체 경마장은 언제 나오는데?”라는 궁금증으로 끝까지 읽게 하는 에너지를 가진 소설. 작가와 작품은 별개라지만 마치 허구의 이야기를 현실화한 것 같은 뉴스 때문에 씁쓸함을 머금고 이 글을 마무리 지어본다.
◎매달 12일의 글쓴이 꼰냥은,
도서관 서가 사이에 있으면 심박수가 떨어지고 톨킨(반지의제왕)과 이노우에 다케히코(슬램덩크) 작품 앞에서 심박수가 올라가는 다방면의 덕후입니다. 고양이들과 간식먹으며 책 읽는 시간을 제일 좋아하고요. 앞으로 주욱 즐거운 책, 재밌는 순간을 찾아가며 살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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