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책 편지
4월의 첫 주말, 토요일입니다.
평온하게 잘 보내고 계실까요. 저는 코로나 타격을 입고 말았어요. 네. 올 것이 온 셈이죠. 담담하게 넘기려 해도 심신 에너지가 바닥을 뚫고 가는 중이라 역시 몸 건강을 잃게 되니 마음도 척박해지는 것이라는 걸 다시금 느끼는 중입니다. 몸과 마음은 역시 연결되어 있네요. 그래서 힘들 수록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더욱 절절히 하게 되는 것도 같아요.
혼자. 우리는 때때로 그 '혼자' 를 갈망합니다.
그렇지 않으실까요? 사실은 제가 그렇습니다. 부끄럽지만 잠시 사적인 환경을 말씀드리자면 저로서는 유자녀 기혼자가 된 이후 이 현실에서 혼자 있는다는 것이 아직은 퍽 이나 힘든 상황입니다. 아직 여러모로 돌봄이 필요한 다둥이 부모의 삶에서 혼자' 란 사실 있을 리 만무하거든요.
그 혼자의 시간을, 단 몇 시간이라도 마음 편히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한편 멍 때리기라도 하고 싶다는 그 절실함.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그렇기에 더 '혼자' 의 은둔을 갈망하는 이유는 어쩌면 손에 붙잡기 힘든 '꿈' 같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요.
이 글을 읽는 님께서는 어떤 환경의 삶을 살아가실지 모르겠지만 감히 묻고 싶어집니다.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절실히 있었는지. 은둔하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그런 의미에서 제가 이번주에 읽은 책 중 단연코 이 책을 소개해드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혼자의 시간을 늘 열렬히 갈망하는 제게는 그 은둔의 시간이 정말이지 '낭만' 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일텐데요.
낭만적 은둔의 시간, 데이비드 빈센트, 더 퀘스트, 2022, p.328
책은 '혼자가 좋아, 역시 혼자가 짱이다! 은둔하자' 뭐 이런 식의 가벼운 책이 아닙니다. 의외로 '역사' 속 시대상과 그 시대 속 '혼자 있는 시간' 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제목에서도 들어가 있듯 '혼자' 의 시간. 은둔하는 시간이 역사 속에서 철학자들에게, 문예가들에게, 예술가들에게, 그리고 17세기 18세기 당대 시대 속에서 사람들에게 그 혼자의 시간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졌고 우리는 어떤 형태로 은둔을 갈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련의 서사가 잘 서술 되어 있습니다. 저자 분의 통찰도 한 몫 하는 것으로 느껴지고요.
참 유명한 철학자였던 '몽테뉴' 도 이런 말을 했다죠.
이제 우리는 동반자 없이 혼자 살기로 작정하였으니, 우리의 행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들한테 묶어 놓은 속박 에서 느슨히 풀어놓으세요 진정으로 혼자 살 수 있는 힘을 얻도록 합시다. 아주 만족스럽게. p.14
그런데 참 이게 말이 쉽습니다. '진정' 혼자 '살 수 있는 힘' 이라는 이 짧은 문장을 현실에서 실천해내는 것. 어렵지 않나요? 혼자 일을 하는 프리랜서라 해도 사실 일을 혼자 수행할 뿐이지 그 일과 엮인 '관계' 속에서 결국 '밥벌이' 라는 현실의 생태계는 움직여집니다. 네. 생각해보면 우리는 '관계' 에서 느슨해질 수 없을 것도 같아요.
일을 하든, 사랑을 하든, 가족을 꾸려 나가든. 결국 모든 인간은 '관계' 속에서 촘촘히 그물망처럼 네트워킹되어 있기 때문일텐데요. 그래서 더욱 엮여진 그물망이 한편 피곤하고 고단하고 고통스럽기까지 느껴질 때. 그럴 때 우리는 더더욱 은둔을 갈망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총 7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낭만적 은둔의 역사' 는 그야말로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한 여러 고찰들에 대해서 적혀져 있습니다. 의외로 그 혼자의 시간이 그리 달갑지 않게 받아 들여진 시대도 있었고, 그럼에도 예술가들은, 철학자들은, 일상을 지내는 그 시대의 '우리' 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혼자의 시간을 누리려 노력했다는 것이 여실이 보여집니다.
읽으면서 생각해보게 되는 부분은 '혼자' 있는 시간이 자발적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선사하고, 한편 가난한 이들의 혼자와 그렇지 않은 이들의 혼자는 또한 엄밀히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의외로 고찰하게 되는, 그야말로 '혼자 있는 시간' 에 대한 또 다른 재발견이었어요.
사실 저는 혼자 있는 시간을 갈망하는 편이지만 한편, 어떤 분들에게는 비 자발적으로 '어쩔 수 없이' 혼자 있게 되는 순간이 있기도 한 법이죠. 에컨대 나는 고립되고 싶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진다면. 비 자발적인 은둔 이라고도 볼 수 있을 테고요.
흔히 군중 속의 고독이라 하죠. 혼자를 자청해도 결국 우리는 '미디어' 를 찾게 되고 끊임없이 누군가와 연결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생각해보면 이 시대는 혼자 있을 수 없게 만드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고요.
책 속으로
수치심이나 후회 좌절된 희망에 대한 유감, 질병의 피로감으로 영혼이 너무도 상처 입고 무력해지면, 동년배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고독이라는 은밀함 속에 웅크리게 된다. 이런 경우 은둔하려는 성향은 자기 회복을 향한 적극적 충동이 아니라, 사회가 주는 충격과 마찰에 대한 두렵고 조심스러운 혐오다. p. 17
혼자 있음은 일상을 벗어나 장기적으로 은둔하는 방식보다 압박감을 주는 생활에서 잠시 짬을 내는 방식이 더 흔하다. 다시 말해 혼자란 주위에 사람들이 있다가 없는 순간의 경험이었다. p. 26
가족 부양을 위해 부단히 노동하고, 복작대는 집에서 신체 접촉을 피치 못하니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혼자인 순간을 기대할 수 없었다. 빈 방도 없고 잠깐의 짬도 나지 않았다. 정기간행물과 여가활동용 장비를 구입할 돈도 없었다. p. 113
혼자 있기는 프라이버시와 은밀함의 경계선상에 있다. 이는 자신을 탐구하고 정체성을 발전시키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한 개인의 생각과 행동 그에게 일어나는 일에서 타인을 배제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 균형은 개인과 사회가 쌓은 신뢰가 결정한다. 적개심이 들끓던 당시의 반가톨릭 분위기에서 누군가를 혼자 두는 행위는 은밀한 불법행위나 괴롭힘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p.185
책에서 의외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자기 회복과 자유롭고자 하는 경향' 이라던 '가장 건전한 형태의 고독' 에 대한 부분이었어요.
책은 말합니다. 건강한 고독은 오히려 "가장 바쁜 삶 속에 아로새겨진다." 라고. "사적인 자기 성찰과 사교적인 만남을 계속 오가야만 조화와 가치의 감각을 기를 수 있다. " 고 말이죠. (p. 324)
정말 그렇습니다. 마냥 '혼자' 있을 수가 있나요? 인간은 혼자 살지 않는 동물이라죠. 사회 속에서, 집단 속에서, 관계 맺기를 하는 게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일 텐데요.
결국 책을 읽다 보니 마냥 혼자 있고 싶어도 결국 '조화' 로운 삶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일종의 교훈(?) 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사적인 혼자의 시간, 사실 너무 좋죠. 그러나 그 은둔하는 시간을 마련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와 관계에서 너무 소원하며 멀리 달아나지도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사실 저는 여전히 갈망하게 됩니다. 혼자의 시간을.
혼자 책 읽는 시간, 혼자 글 쓸 수 있는 시간. 결국 시간과 공간의 문제라면 역시 새벽의 식탁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건 그것이 저에게는 '낭만적 은둔' 의 시간이라 그럴 것 같아요. 저로서는 낭만이 바로 그런 순간이거든요.
바다, 석양, 책, 글자, 편지, 시원한 바람, 그리고 혼자, 그런 시간들...
생각만 해도 삶을 이겨내게 만드는 그런 기억. 그런 성찰도 혼자 은둔했던, 은둔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나오는 것일까 싶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는 어떤 시간이 낭만적 은둔의 시간이실까요.
궁금함은 잠시 제 마음에 간직해두며, 이렇게 두 번째 책 편지 마무리를 짓습니다.
좋은 책과 좋은 주말 맞이하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