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님,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레터를 쓰려고 몇 번 끄적여 봤었지만, 잘 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인지 끝까지 쓰지 못하고 영영 미루게 되더라고요.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각종 SNS에 올라오는 한 해 회고를 보면서야, ‘나도 올해를 좀 갈무리해 봐야 할 것 같은데’ 하는 조바심을 느끼게 되어서야 이렇게 겨우 레터를 쓰게 됐네요.
사실 다른 사람들이 올린 회고를 보면서 ‘사람들 참 부지런하다, 나는 오늘 안에 연말정산 못할 것 같아.’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제가 드디어 드라마 〈미지의 서울〉을 정주행하기 시작했거든요. 거기에 “살면서 이딴 산 하나도 제대로 못 오를 바엔 살고 싶지 않아서”라는 대사가 있어요. 연말정산 그거 하나 못 할 바엔 이제 더 이상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은 하지 말자는, 이상한 각오를 갖고 끄적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짐하건대 절대로 대충 써서, 한 해가 끝나기 전에 꼭 레터를 보내고야 말겠습니다.
8월에 썼던 게 마지막 레터였네요. 구독자 님도 그러시겠지만, 4개월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9월에는 이사를 두 번 했는데요. 이때 도노스티아에서 바르셀로나로 이사를 왔어요. 아, 그래서 저는 지금 바르셀로나에 있습니다. 바르셀로나의 가장 큰 축제 중 하나인 라 메르세 축제에 맞춰 이사 왔는데요. 그 전에 도노스티아에서 다 못 해본 것들을 부랴부랴 하느라 정신없는 한 달을 보냈습니다. 단 하루였지만 북쪽길 순례길을 걸어 보고 ‘내가 체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구나’라는 것도 깨닫고요. 바다 수영을 하다가 물에 빠져 스페인 구급차도 타보고 응급실도 가봤습니다.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 도대체 병원비가 얼마가 나올까 조마조마했던 게 지금도 생생한데요, 생각보다 그렇게 많이 청구되지는 않더라고요. 혹시 스페인에서 응급실에 가시게 된다면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혹시 저를 걱정하신다면, 다행히 지금은 멀쩡하고 병원비도 보험 청구해서 돌려받았답니다. 스페인 북부에 머무는 동안 와인으로 유명한 라 리오하에 꼭 가보고 싶었어서, 로그로뇨의 산 마테오 축제에도 다녀왔어요. 응급실에 다녀오고 일주일 동안 항생제를 먹어야 했어서 와인을 많이 못 마신 게 지금도 아쉽네요.
10월에는 뮌헨의 옥토버페스트를 다녀왔어요. 아무래도 10월이니까요. 그리고 추석 연휴에는 명절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한국인 패키지 투어를 보조하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중간에 손님들이 멱살을 잡고 싸우는 일이 있어서 그런지 정말 명절 느낌이 낭낭했습니다. 혹시 패키지 투어 보조 아르바이트를 고민 중이신 분이 있다면, 정말 말리고 싶어요. 바르셀로나 근교의 시체스에서 열린 영화제에도 다녀왔어요. 덕분에 한국 영화를 두 편이나 봤습니다. 저는 ‘어쩔 수가 없다’보다 ‘하이파이브’가 더 재밌었어요. 10월은 올해 중 가장 극악의 스케줄을 소화한 한 달이었는데요. 이 와중에도 사실 일을 하고 있었는데, 프로젝트가 다행히 일정 안에 마무리돼서 야무지게 포르투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11월에는 할로윈 시즌을 맞아 바르셀로나 근교 도시인 Sant Feliu Sasserra에서 열린 마녀 축제에 다녀왔습니다. 한 달 동안 어학원을 다니면서 이런저런 액티비티에 참여했고, IT 밋업과 언어 교환 모임에도 자주 갔어요. 가끔은 스케이트보드도 타러 다녔습니다. 바르셀로나 하면 관광을 빼놓을 수 없기 때문에 이곳저곳 관광지도 부지런히 다녔고요. 프랑스와 카탈루냐 사이에 있는 작은 공국, 안도라에도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왔네요. 12월에는 프리랜서 계약도 끝나고 완연한 백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여행을 잔뜩 다녔어요.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 독일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둘러보는 동유럽 여행을 하고, 일주일 동안 런던에서 친구와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생활은 도노스티아에서의 생활과는 또 엄청 달랐어요. 바르셀로나는 대도시라 그런지 저한테는 서울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매주 이런저런 이벤트가 정말 많아서, 눈 감았다 뜨니 벌써 한 해가 끝나 있더라고요. 도노스티아와는 다르게 한국인이 정말 많은데,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지만 한국인 때문에 고생을 정말 많이 하기도 했어요. 외국에서 한국인을 왜 조심하라고 하는지 체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바르셀로나에 있었던 덕분에 친구들도 많이 놀러 오고, 여러 사람들도 많이 만나서 즐거웠어요. 한편으로는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많이 못 가진 게 아쉽기도 합니다. 다음에 이사 갈 도시는 좀 더 한적한 도시이니,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보려고요.
정말 대충 한 해를 정리했는데, 돌이켜보면 참 고마운 인연이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구독자 님께도 참 감사해요.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천천히, 여유를 갖고 정리해 보겠습니다. 꼭이요.
스페인에 산 지도 7개월이 넘었습니다. 절대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던 것들이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게 참 신기하더라고요. 하지만 6개월 넘게 살면 스페인어도 잘하고 친구도 많이 생겨 있을 줄 알았는데, 뭐, 그렇게 사람이 쉽게 변하지는 않더라고요. 너무 채근하지 않으려고 해요. 그래도 새해에는 좀 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한국 시간으로는 이미 새해가 됐지만, 스페인은 아직이랍니다. 스페인에서는 새해가 되는 자정에 12번 종을 치는데, 종이 칠 때마다 포도알을 한 개씩, 총 12개의 포도알을 먹는 전통이 있다고 해요. 스페인 사람들은 늦게 먹거나 못 먹으면 한 해 동안 불운이 따른다고 믿는대요.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포도알 12개 먹기 챌린지에 성공할 수 있도록 기원해 주세요.
그럼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Feliz año nue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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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커피
2026년 더 멋진 경험 많이 하고, 더 행복하게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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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체
노체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새해부터 레터가 와서 너무너무 기뻐요! 그동안 뭐하고 지냈는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알려줘서 고마워요! 응급실에 갔단 이야기를 듣고 놀랐는데 병원비도 많이 안 나오고, 몸도 회복되어서 다행이에요. 타국에서 외롭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놓여요. 26년 바셀에서는 사람 조심하고 건강하게 돌아오길 바라요! 포도 12알 먹기 성공했는지도 궁금해요. 성공해서 행운이 가득한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못먹으면 그만이고~ 해피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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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기다리고 있었어요! 많은 일들이 있으셨군요,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잘 챙기시길 바라요.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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