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열두 번째 밤

무서워만 했던 일들을 하나씩 시도해 보았습니다. 언어 교환 모임에도 다녀오고, 피소메이트와도 대화를 나눴습니다. 적당히 이해할 수 있는 자유와 사소한 건강 염려증 사이를 오가며 한 주를 보냈습니다.

2025.08.20 |

구독자 님은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 간다면 뭘 해보고 싶으신가요? 괜히 뭔가 굉장한 일탈 같은 걸 해야 할 것 같지 않으신가요? 저는 이곳에서 뭔가 시도하는 걸 과하게 두려워할 때마다, 도대체 뭐 때문에 두려운 건지 스스로에게 묻곤 합니다. 사실 이곳에는 제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잖아요. 제가 내일 당장 미용실에서 머리를 망치고 나타나도 "머리 왜 잘랐어? 전이 훨씬 나은데"라고 말할 사람도 없고, 모르는 사이든 아는 사이든 마주치는 모든 이에게 밝게 인사하며 오늘 기분 어떤지 물어도 "쟤 왜 저래? 왠지 되게 애쓴다"라고 할 사람도 없다는 뜻이죠.

스페인에서 저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저를 'Noche'라는 이름으로 기억할 텐데요. 제가 한국으로 돌아간 다음 'Noche'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다면, 스페인에서 만난 친구들은 아무리 수소문해도 저를 찾을 방법이 없을 거예요. 누군가 아무리 'Noche'를 욕하고 다닌다 해도 그 말이 저에게 닿지도 못할 거고요. 그런 점에서 'Noche'라는 사람은 딱 1년만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평소의 나와 다른 행동을 하는 게 어렵다는 건 저 스스로도 의외예요. 먼저 말을 걸었다가 문장을 잇지 못하는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도, 사실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2주 안에 떠날 사람들이잖아요. 저도 이 도시에 남아 있을 시간이 이제 한 달 정도밖에 안 남았고요.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의 이점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누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번 레터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적을 게 별로 없어요. 하지만 수요일마다 보내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왜 자꾸 주말에 오지?"하고 의아해하실 분이 계실 것 같아 부랴부랴 따라잡아 보려 합니다.

 

돌이켜보면 스페인에 도착한 첫 달은 정말 모르는 것투성이에 온갖 사건사고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별일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게 문득 신기합니다. 지난주에 9월에 살 집을 보러 갔을 때도 별생각 없이 집을 보러 가겠다고 했다가, 집주인을 마주하니 그제야 '아, 나 스페인어를 별로 못하지'라는 자각이 들더라고요. 처음 집을 구하러 다녔을 때는 뷰잉 전날에 너무 무서워서 제발 누가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스페인어 실력이 엄청나게 는 것도 아니고 경험이 크게 쌓인 것도 아닌데, 이제는 더 이상 무섭지 않다는 게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평화롭기만 한 건 아니에요. 진짜 TMI이긴 한데, 레몬 슬러시를 한가득 먹고 난 뒤부터 양치할 때마다 이가 시리더라고요. 슬러시 좀 먹었다고 이가 시리다니요. 나이 들어 치아가 약해진 걸까요? 아무튼 구독자 님도 레몬 슬러시는 조심하시고요. 스페인에서 병원에 가기 어렵다고 생각하니 약간 건강 염려증이 생긴 것 같아요. 사실 전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것도 잘 먹었었는데, 이제는 조금만 지나도 버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제가 무서워하던 것 중 하나는 언어 교환 모임에 가는 거였는데요. 예전에 딱 한 번 가봤는데, 말이 너무 빨라서 그 어떤 것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같이 대화한 분이 스페인 분이셨는데 영어를 저보다 훨씬 잘하셔서, 이래저래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에 부담스럽더라고요. 그때 "다음 주에도 올 거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했지만, 결국 거의 두 달 동안 안 갔습니다. 화요일에는 레터를 써야 해서 못 간다고 핑계를 댔지만, 사실 그냥 가기 싫었던 거였죠. 더 이상 회피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오늘 언어 교환 모임에 다녀왔는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계 곳곳에서 살다 온 멋진 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즐거웠거든요. 한국에서도 공부하신 적 있다고 해서 더 반가웠고요.

오늘은 피소메이트와도 오랜만에 대화했어요. 저는 주방에서 같이 요리하는 게 부담스러워 주로 피소메이트들보다 일찍 밥을 먹는 편인데요. 그래봤자 점심은 2시쯤, 저녁은 8시쯤 먹는 거지만요. 그런데 오늘은 어쩌다 보니 밤 10시 반쯤 먹게 됐는데, "이제 요리하는 사람은 없겠지" 했더니 피소메이트가 들어오더라고요. 한참 정적이 흐르다가 피소메이트가 먼저 "이번 달이 마지막이지?"라고 물어봐 준 덕분에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어요.

언어 교환 모임에서도 스페인 남부 사람들과 바스크 사람들의 차이에 대해 잠깐 얘기했는데요. 발렌시아에 갔을 때는 사람들이 먼저 말을 거는 경우가 많았는데, 바스크 사람들은 그렇진 않은 것 같다고 했어요. 물론 제 경험이 많지 않아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요. 같이 대화하던 분이 본인은 이탈리아인이라 언제나 먼저 말을 거는데, 그러면 다들 잘 받아준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저한테도 먼저 말을 걸어보라고 응원해 주셨어요.

어쩌다 보니 피소메이트와도 남부와 바스크 사람들의 차이에 대해 얘기하게 됐는데, 피소메이트가 느끼기에는 여기 사람들이 남부보다는 덜 친근한 편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더 Cerrado(닫혀 있는)한 편이라는 거야?" 하고 물으니, "Muchísimas(엄청나게)"라고 대답해서 웃겼어요. 사실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제대로 알 수 없겠지만요. 다만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상대가 다르게 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피소메이트는 대화 시도만 하면 참 친절하게 잘 대답해 주는데, 왜 그동안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까 싶더라고요. 결국 해보지도 않고 무서워만 했던 게 많았던 것 같아요. 뭔가가 무서울 때는 그냥 냅다 해보는 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는 걸 되뇌며 한 주를 보내야겠습니다.

 

언어가 잘 안 통하는 나라에 사는 게, 역설적으로는 편할 때도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해 적당히만 이해해도 괜찮다는 사실이 주는 묘한 자유가 있거든요. 한국어로는 듣고 싶지 않았던 것도 듣게 될 때가 있고, 말하지 않은 것까지 의도치 않게 알아버릴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스페인어로는 심오한 질문을 던질 수도 없고, 문장이 조금만 길어져도 잘 못 알아듣기 때문에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어요. 사실 말하지 않아서 모르고 있을 뿐, 우리 사이에는 수많은 오해가 있을 거예요. 가끔은 상대가 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걸 알아도 해명할 수 없어서 그냥 두기도 하고요. 그런데 꼭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더라고요.

언어가 잘 안 통해 불편한 점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불편한 건 위로의 말을 건네기 어렵다는 점이에요. 상대방이 안 좋은 일을 겪었거나 아플 때,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언젠가는 스페인어로도 위로의 말을 잘 건넬 수 있게 될까요?

 

한국에서 그리운 게 있냐고 하면 의료 시스템이나 음식 같은 게 떠오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그리운 건 코인노래방이에요. 그렇게 자주 간 것도 아닌데 아예 못 가게 되니 괜히 헛헛하더라고요. 그래도 바르셀로나에 가면 가라오케에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무튼 저는 이번 한 주 동안 일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으니, 혹시 코인노래방에 가시게 되면 제 몫까지 즐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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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시각으로 밤마다 스페인에서 워킹홀리데이하는 이야기를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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