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온 지 3주가 됐습니다. 도노스티아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꼭 “어떻게 도노스티아에 오게 되었냐”라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라 여기를 어떻게 알게 된 건지도 의문인데, 이 작은 도시에 3개월이나 머문다고 하니 의아한 거죠. 한국에서는 요리 대학 진학을 위해 온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제가 말한 적이 있었던가요? 도노스티아는 세계에서 미슐랭 레스토랑 밀집도가 가장 높은, 미식의 성지입니다. 이곳에는 명성 높은 요리 대학인 'Basque Culinary Center'가 있어요. 하지만 저는 요리에는 재능이 없습니다. 물론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다면 좋긴 하겠지만, 매일 미슐랭 레스토랑을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제가 워홀을 시작하며 도노스티아에 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서핑, 다른 하나는 날씨입니다. 스페인은 여름 태양이 뜨거운 나라입니다. 스페인에서 가장 덥다는 세비야는 이번 주 최고 기온이 40도를 넘고,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도 30도를 웃돌고 있습니다. 반면 도노스티아는 스페인 북쪽에 자리 잡고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기온이 낮고 비가 많이 오는 편이에요. 대신 여름에는 비가 자주 오지 않고, 30도를 넘는 날도 많지 않아서 스페인 왕실과 귀족들의 피서지로 사랑받았다고 해요. 이번 주도 맑은 날은 더웠지만, 흐린 날엔 선선해서 밖을 많이 돌아다닐 수 있었어요. 이번 주도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지 않을 예정입니다.
구독자 님이 있는 곳은 날씨가 어떤가요? 이번 주에 유독 쪄 죽을 뻔 했다는 말을 SNS에서 많이 봤어요. 길을 걷다가 시원한 바람이 살랑 불 때마다, 한국 여름에서는 정말 상상도 하기 어려운 날씨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놀리려는 의도로 날씨 얘기를 꺼낸 건 아니고요. 날씨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중 하나잖아요. 지옥 같은 열대야와 장마를 견뎌야만 하는 여름 말고도, 다른 여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여름을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체감해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호기롭게 날씨가 좋다고 말한 게 무색하게도, 지금 창밖에는 매섭게 비바람이 치고 있어요. 천둥번개도 함께요. 덕분에 레터 쓰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다만 오늘 집 근처 축구 경기장에서 대규모 공연을 하는 중인데요. 'Bruce Springsteen'이라는, 미국 대중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국민 가수의 투어 공연이래요. 이번 주 내내 도노스티아 곳곳에서 이 가수의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어요. 그래미상을 20개나 수상한 전설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이번에 이름을 처음 들은 게 더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관객들의 함성이 들렸었는데요. 경기장이 비는 잘 막아주는지, 관객들은 공연이 끝나고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좀 걱정이 되네요.
그사이 저는 생일을 맞았습니다. 6월 23일은 제 생일이자 어학원 생활을 시작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어학원 매니저가 나이를 물어봤을 때, 30살이라고 대답하려다 문득 오늘 생일이라는 게 떠올라 31살로 정정했어요. 여러모로 새로운 시작이 겹친 하루였습니다. 더 이상 앞자리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만 30살과 31살은 그게 그거 아니냐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워킹홀리데이를 꿈꿔왔던 저에게는, 이제 영영 워홀을 갈 수 없는 나라들이 생겼다는 사실이 은근한 상실감으로 다가왔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얻는 것보다 잃는 것에 더 마음이 가는 건 왜일까요. 젊음을 잃는다는 감상에 젖지 않더라도, 아무래도 이번 생일은 좀 외롭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스페인에 온 지 3주밖에 되지 않아, 함께 생일을 보낼 친구를 사귀기도 어렵겠다 싶어서요. 감사하게도 그걸 걱정해서 생일날에 메시지를 보내주신 사려 깊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스페인 시각으로 7시간 전부터 축하 메시지를 보내주신 덕분에 올해 생일은 더 길게 보낼 수 있었답니다. 또 운 좋게도 이번 주는 일주일 내내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어요.
제 스페인 관련 인연들은 대부분 '스페인책방'을 통해 시작됐는데요. 작년 여름, 빌바오에 사는 일러스트레이터 작가님 부부가 한국에 오셨을 때, 스페인책방에서 번개 모임을 열어주셔서 참여하게 됐어요. 그때 처음 '바스크' 지방에 대해 알게 됐습니다. 그때만 해도 워홀을 어디로 갈 예정이냐고 물었을 때 '바르셀로나'라고 답했었는데요. 이렇게 바스크 지방으로 워홀을 와있다니 사람 일은 정말 닥치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입니다. 어학원 수업을 시작하기 전, 작가님을 뵈러 빌바오에 다녀오고 싶었습니다. 작년 여름 이후로 1년 만에 뵙는 건데도 작가님은 흔쾌히 초대해 주셨어요. 도노스티아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이면 빌바오에 도착합니다. 외국에서 도노스티아로 오신다면 대부분 빌바오 공항을 거쳐 오시게 될 거예요. 두 도시는 가까이 있지만 서로 주도 다르고 분위기도 꽤 달랐습니다. 특히 빌바오의 고층 빌딩을 보며, 빌바오가 더 큰 도시라는 게 실감 났습니다. 도노스티아에는 고층 빌딩이 없거든요. 빌바오에 오면 꼭 가야 할 곳으로 꼽히는 ‘구겐하임 미술관’에서는 이 도시의 모던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빌바오도 여름에 그렇게 덥지 않은 편인데, 제가 갔던 날은 이례적으로 더운 날이었어요. 그런데도 작가님 부부는 하루 종일 저를 위해 미술관, 올드타운, 광장, 아시안 마트까지 빌바오 곳곳을 돌아다니며 소개해 주셨어요. 작가님은 제가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일기를 늘 챙겨 읽고 계셨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제가 스페인에서 잘 지내는지 걱정이 되셨다고요. 제가 도노스티아의 아시안 마트에서는 매운 라면밖에 팔지 않아서 라면을 못 사겠다는 한탄을 남긴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시고는 빌바오의 아시안 마트에 데려가 주셨어요. 그곳엔 정말 다양한 종류의 한국 라면이 있더라고요. 반가운 마음에 한가득 담았는데 감사하게도 작가님께서 선물로 사주셨습니다. 덕분에 지금 이 레터를 쓰는 동안 생라면으로 요깃거리를 잘하고 있어요.
나중에 빌바오를 추억하면 배불렀던 기억부터 떠오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멕시칸 타코, 바티도, 핀초, 챠콜리, 시드라, 무알콜 맥주, 젤라또까지 정말 쉴 새 없이 먹었는데요. 이 모든 걸 작가님 부부께서 무한 제공해 주셨어요. 한국에서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누리던 혜택을 머나먼 이국땅 바스크에서도 누리는 기분이었습니다. 헤어질 때쯤에는 썸씽 바스크인 바스크 과자와 썸씽 코리아인 마스크팩을 선물로 주셨어요. 달달한 바스크 과자는 레터를 쓰는 동안 다 먹어 치웠고, 마스크팩은 이번 주 도노스티아 관광으로 그을린 피부에 요긴하게 사용했습니다. 작가님께서 바스크의 상징 꽃인 Eguzkilor를 모티브로 직접 만든 키링, 스티커, 엽서도 함께 주셨어요. 따뜻하게 챙겨주시는 마음이, 아무리 감사하다고 말해도 부족할 만큼 고마웠습니다. 지난주에는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작가님 부부를 만난 덕분에 오랜만에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바스크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늘 따뜻한 환대를 받아서인지, 언젠가 이 지역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환대의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아요. ‘환대의 바스크’라는 타이틀에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저도 바스크에 오는 사람들을 환대해 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다짐을 실천할 기회는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왔습니다. 다음 날, 대학 동기인 친구가 도노스티아로 6일간 여행을 왔거든요. 저희는 서로 워홀을 응원하던 사이였는데, 1년 전 친구가 먼저 아일랜드로 워홀을 떠났고, 워홀을 마친 뒤 제가 있는 스페인으로 여행을 왔습니다. 제가 아직 스페인에 온 지 3주밖에 되지 않아 능숙한 가이드가 되어줄 수는 없었지만, 숙소와 여행 메이트를 제공해 줄 수는 있었습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시작된 여행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1일 1도전을 하게 되었는데요.
첫째 날의 도전은 핀초뽀떼(Pintxo Pote)였습니다. 친구가 도착한 날이 마침 목요일이라 Gros 지역의 핀초뽀떼를 가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도노스티아에 온 첫날 젊은이 무리를 보며 압도당했던 것처럼 친구도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어요. 그래도 용기를 내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Tinto de verano 한 잔과 치즈 튀김 핀초를 주문했습니다. 이 모든 걸 단돈 3.5유로에 먹을 수 있었어요. 핀초뽀떼는 술을 한잔 사면 핀초 하나를 무료로 주는 이벤트거든요. 대신 테이블을 앉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길바닥에 앉아 먹어야 했습니다. 하나 더 도전하기에는 기가 너무 빨려서 스페인 젊은이들의 절약 정신에 혀를 내두르며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둘째 날의 도전은 서핑이었습니다. 도노스티아의 Zurriola 해변은 서핑 명소로 유명한데요. 사실 서핑 때문에 도노스티아에 온 거였는데 혼자서는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온 덕분에 용기를 내봤는데요. 한국에서 서핑을 몇 번 해보긴 했지만 모두 파도가 높지 않았었습니다. Zurriola 기준으로 이날 파도가 높았던 건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제 기준으로는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높았습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몇 번 일어나긴 했었는데 여기에선 테이크오프는 커녕 라인업까지 나가기도 힘들었어요. 이날 서핑 강사님은 많은 것을 설명해 주진 않았는데요. 그래도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생존 스킬을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익힐 수 있었습니다. 그 흔적으로 무릎에 영광의 멍이 남았고요. 개인적으로는 서핑에 대한 공포가 더 커진 날이었는데, 함께한 친구는 처음 하는 건데도 재밌었다고 해서 그 담대함이 부러웠습니다. 사실 어학원 개강일부터 일주일 동안 서핑 클래스를 예약했는데 매일 어떻게 가야 할지 걱정이 태산입니다.
셋째 날의 도전은 클럽이었습니다. 함께 여행한 친구는 대학 때부터 음악 페스티벌 마니아였는데요. 도노스티아에서도 음악 공연을 같이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친구가 머무는 동안에는 마땅한 공연이 없었어요. 그래서 도노스티아에서 힙하다는 클럽 'Dabadaba'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밤 11시 45분부터 시작하는 DJ 공연 티켓을 사서 느즈막이 12시 반 넘어서 들어가려고 했는데요. 가보니 아직 준비 중이라 그래서 의도치 않게 오픈런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1시쯤 가장 먼저 입장해서 한동안 뻘쭘함을 견뎌야 했습니다. 클럽에 가면 젊은이 구경을 많이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연령대는 저희랑 비슷해 보였고, 내향인들이 많은 느낌이었어요. 퍼스널 스페이스가 적절히 지켜지더라고요. 저는 음악 장르는 잘 모르지만, 친구 말로는 '레게톤'이라고 하던데요. 그다지 흥이 나는 음악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주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큰맘 먹고 내일의 체력을 당겨쓴 거라 아쉬움은 좀 남았지만,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어서 가치가 있었습니다.
넷째 날의 도전은 카약이었습니다. 블로그를 보고 산타클라라 섬까지 카약으로 다녀오는 투어가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저희는 제주도 쇠소깍에서 함께 카약을 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별걱정 없이 도전해 보기로 했습니다. 대체로 수영복을 입고 가는 것 같아서 수영복을 챙기고, 그 블로그가 추천해 주는 카약 렌탈샵에 갔습니다. 그게 저희가 찾아본 것의 전부였는데요. 직원에게 노를 젓는 법을 알려주는지 물어봤는데 별로 어렵지 않다고만 말해줬습니다. 추가로 섬에 가면 뭔가가 있는데 거기에 카약을 묶고 한 명은 수영하면 된다고 알려줬습니다. 사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못했지만 일단 가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 카약을 들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부터 모르겠어서 헤맸는데요. 겨우 찾았는데 알고 보니 카약 타는 곳 바로 근처에 렌탈샵이 있었습니다. 그건 사실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일단 카약에 탔는데 노를 젓는 방법을 모르겠는 것입니다. 처음엔 노 2개를 양손에 잡고 저으려 했는데 너무 무거워서 하나를 양손으로 가로잡아 젓는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걸 겨우 익히니 갑자기 페리가 저희 카약으로 달려들고 있었습니다. 방향을 바꾸는 법을 몰라서 최대한 알아서 피해달라는 제스쳐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섬 근처까지 갔지만, 섬과 부표 사이의 거리가 꽤 멀었습니다. 부표에 카약을 매달면 바다 수영을 해서 섬으로 가야 했는데 저희 둘 다 바다 수영은 해본 적이 없었어요. 구명조끼가 있으니 물에 뜨긴 하겠지 싶어서 친구가 먼저 물에 뛰어들었는데, 곧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합니다. 결국 저희는 카약을 섬 계단 쪽으로 몰고 갔고, 친구는 카약에 매달려 간신히 계단에 도달했습니다. 계단 난간에 카약을 묶고서야 겨우 섬에 오를 수 있었어요. 알고 보니 한 명을 섬에 내려 주고 한 명은 다시 부표 쪽으로 이동해서 부표에 카약을 묶고 수영해서 섬으로 가야 했나 보더라고요. 저희는 그 사실을 모르고 갔다가 바다가 아닌 요단강을 건널 뻔했습니다.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미리 찾아보고 갈 테니 괜찮겠지만 극강의 P인 분들에게 카약의 위험성에 대해 주의를 주기 위해 구구절절 적어봤습니다. 평소 운동을 많이 하시는 분들은 유난 떤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운동과 거리가 먼 분들은 기억하세요. 서양인들의 대중 액티비티는 우리나라의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도 다행히 죽을 뻔한 기억으로만 남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염원했던 바다 수영을 해볼 수 있어서 만족했고 친구는 카약 렌탈샵 직원의 미모에 만족했습니다.
다섯째 날의 도전은 축제였습니다. 저에게 6월 23일은 제 생일이지만 스페인에게 6월 23일은 ‘산 후안의 밤(La Noche de San Juan)’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 밤, 사람들은 해변이나 광장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그 안에 소원을 적은 종이나 과거의 나쁜 기억을 상징하는 물건을 던져 넣습니다. 소년들이 모닥불 위를 뛰어넘는 걸 보면서 '젊으니 저런 용기도 샘솟는구나'하고 말았는데요. 알고 보니 모닥불 위를 7번 뛰어넘으면 액운이 사라진다고 믿는다고 합니다. 해변 근처의 광장에서는 라이브 밴드가 바스크 전통 노래를 연주하고 사람들이 춤을 추는 무도회가 열렸는데요. 남녀노소 춤을 추고 팔짱을 끼고 돌고 어깨동무를 하며 노는 모습을 보니, 옆에 있던 이방인인 저희까지 흥이 나서 플로어로 나가서 어설프게나마 따라 췄습니다. 그때야 저와 친구는 젊은 사람들이 노는 걸 보려고 돈 주고 클럽에 갈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밤이 되니 해변 곳곳에 피어오른 모닥불들이 꼭 생일 초처럼 보여서 온 도시가 내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 같은 감상에 빠지기도 했는데요. 한국 사람들이었다면 분명 저 모닥불에 고구마를 구워 먹었을 텐데 오직 불만 피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무용한 것에 시간을 쓴다는 건 얼마나 낭만적인 일인지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아침부터 한국에서 많은 생일 축하 메시지를 받고, 친구와 함께 축제를 즐긴 덕분에 특별한 생일을 보냈습니다. 이 도시에서 생일을 보내게 되어서 참 행운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5가지 도전 이외에도 온갖 핀초바와 관광지 도장 깨기를 했는데요. 이제 도노스티아의 웬만한 관광지는 다 가봤다는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이게 다 친구가 도노스티아에 놀러와 준 덕분입니다. 친구와 함께 보낸 6일은 이제 막 워홀을 시작한 뉴비가 워홀 고인물에게 노하우를 전수 받는 부트캠프처럼 느껴졌습니다. 1년간의 워홀을 마친 친구는 장을 15분 만에 보고, 아침밥을 5분 만에 뚝딱 만들고, 카페에서 내가 원하는 커피 옵션이 가능한지 정확하게 물어보고, 사고 싶은 물건을 어디에서 저렴하게 살 수 있는지도 알고, 처음 보는 외국인과도 자연스럽게 스몰토크를 하고, 지도를 보지 않고도 ‘여긴 맛집이다’ 싶은 곳을 알아보는 부러운 능력의 소유자가 됐습니다. 한국에서 만났을 때보다 훨씬 여유로워 보였고 올해 안에 영국으로 다시 워홀을 갈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친구를 보면서 나는 이 워홀이 끝난 후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다 이런 질문도 떠올랐습니다. ‘내가 한국에 있었어도 이렇게 6일 동안 친구와 여행을 다닐 수 있었을까?’ 왠지 그럴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왜 한국에서는 이런 선택을 할 수 없다고 느꼈을까요?
드디어 어학원 수업도 듣기 시작했는데요. 친구는 어학원에서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서 놀러 다니라고 했습니다. 좋은 기회라고요. 당연한 얘기지만 어학원을 등록한 것만으로는 친구가 생기지 않습니다. 애들이 영어로 대화를 하는데 못 알아듣겠으니 소외감이 들더라고요. 왜 언어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막심합니다. 말을 못 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호감을 살 수 있을지 깊은 생각에 잠기자, 친구는 처음 시작하는 사람끼리 공유할 수 있는 감각이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도움을 잘 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도움을 잘 받는 사람에게도 호감을 느낀다는 얘기를 들려줬어요. 어쩐지 조금 위안이 되는 말이었습니다.
카약을 타러 가기 전, 친구는 제게 "이거 재밌을 것 같아?"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혼자서는 해보기 어려운 경험이니까 같이 있을 때 해보면 좋을 것 같다고 대답했어요. 친구는 그런 거 말고 그냥 재밌을 것 같냐고 물어본 거라고 했습니다. 대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요즘 서핑하러 나갈 때마다 제가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옆에 있던 사람들이 "Are you OK?"라고 물어봅니다. 다른 사람들은 서핑을 즐기러 나오는데, 저는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즐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왜 죽상을 하고서 계속 바다에 나가는 걸까요?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인데 대체 어떤 망령에 씌었길래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비싼 돈 들여서 계속하고 있는 걸까요? 다음 레터를 쓸 때쯤에는 서핑 클래스가 끝납니다. 그쯤 되면 서핑을 계속할지 그만둘지 결판이 나겠죠.
레터를 쓰는 사이 날이 밝아버렸고, 그 사이에 어학원과 서핑 클래스까지 다녀왔습니다. 오늘도 오후에 번개가 쳐서 서핑 클래스를 가고 싶지 않았는데, 수업은 취소되지 않는다길래 울며 겨자 먹기로 다녀왔어요. 수업이 비싸거든요. 그런데 죽어라 패들링 해서 라인업에 나가자마자, 번개가 칠 것 같다며 나가자고 하더군요. 저는 이 수모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수업만 미리 취소됐어도 레터를 25일 안에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여전히 제가 약속 시간을 지킬 거라고 믿고 기다리신 분들께 또 한 번 실망을 안겨드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주는 제게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한 주였기에, 늦더라도 제대로 쓰고 보내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국 시각으로 밤에 레터를 보내게 됐습니다. 그래도 제가 어제 저녁부터 레터를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아주세요. 이렇게 된 이상, 한국 시각으로 밤에 보내는 레터 컨셉으로 바꾸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 주 더 도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레터까지는 여행하는 이야기를 적었다면, 다음 레터부터는 일상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적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겠죠? 이번 주 저의 가장 큰 도전은 친구를 만드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혹시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노하우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저는 구독자 님이 알려주신 방법을 시도해볼 수 있도록 언어 공부에 매진하며 한 주를 보내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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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anca
이번 레터도 정말 재밌게 잘 읽었어요! 같은 스페인 워홀 뉴비로써,, 공감되는 부분도 많고 부러운 부분도 많아요! 도노스티아는 ‘환대의 바스크’라고 하셨는데, 환대를 베풀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라는 점도 - 환대를 잘 받아들이고 감사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점도 - 닮고 싶네요 ㅎㅎ 도노스티아의 일상 잘 보고 있어요, 다음 레터도 기다릴게요 :)
Buenas Noches
이번에 하루나 늦고 분량도 엄청 길어서 다들 더이상 포기하셨을까봐 걱정했는데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해요! 도움 주시는 많은 분들 덕분에 도노스티아에서 보내는 여름이 정말 선물처럼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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