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은 광복절이었죠. 구독자 님은 해방의 자유를 만끽하는 하루 보내셨나요? 스페인도 8월 15일이 'Asunción de María', 성모 승천 대축일이라는 국가 공휴일입니다. 성모 마리아가 죽은 뒤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늘로 올라간 걸 기념하는 날이라고 해요. 도노스티아에서는 8월 15일이 있는 주를 'Aste Nagusia'라고 부르면서 일주일 내내 축제를 즐깁니다. 스페인어로는 'Semana Grande'라고 부르는데, '큰 주'라는 의미예요. 스페인 사람들은 8월 15일에 주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서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종교적인 기념일이라 무신론자라면 특별히 하는 게 없다고 하더라고요. 스페인에는 종교적 의미의 공휴일이 정말 많은데요. 사람들은 동일한 시공간에서 함께 어떤 경험을 공유할 때 고양감이 커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스페인은 가톨릭 신자에게는 참 살기 좋은 나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무신론자로 온갖 성인을 기리는 공휴일이 있는 나라에서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졌습니다.
저는 로컬 축제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라서 매일 잠깐이라도 행사를 구경 가겠다는 원대한 꿈을 꿨는데요. 하도 뭘 많이 해서 결국 포기했습니다. 지난주 토요일, 개막식에서의 대포 발사(Tradicional cañonazo)를 시작으로 'Gigantes'와 'Cabezudos'라는 거대 인형 퍼레이드, 직접 만든 해적 깃발 뗏목을 타고 해변까지 항해하는 'Abordaje Pirata', 바스크 전통 스포츠 대회인 'Herri kirolak', 불꽃을 뿜으며 아이들을 쫓는 황소 인형 퍼포먼스인 'Toro de Fuego', 그리고 각종 공연이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축제인 걸 모를까 싶었는지, 정말 어디에서나 작은 공연과 퍼레이드가 열리더라고요. 올드타운 바 앞에서 한잔하고 있을 때도, 집 앞에 장 보러 갔을 때도 우연히 공연과 퍼레이드를 만났습니다. 의미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바스크 전통 의상과 기묘하게 생긴 거대 인형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지난 주말에는 9월 셋째 주까지 지낼 집을 알아보러 뷰잉을 다녀왔습니다. 지금 지내는 집은 8월까지만 계약이거든요. 집주인이 9월 1일부터는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고 해서 8월까지만 계약한 건데요. 저는 이미 계약된 사람이 있는 줄 알았는데, 부동산 앱에 제게 낯선 이 도시에서 이상하게도 너무 익숙하게 느껴지는 방 하나가 매물로 나와 있더라고요. 이제부터 구할 생각인가 봅니다. 단기로 방을 구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일단 2주만 묵을 수 있다고 되어 있는 방이었지만, 여기저기 옮겨 다니자는 마음으로 방을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집주인이 언제부터 묵길 원하는지 묻길래 사실은 8월 31일부터 갈 곳이 없다고 했더니, 짠해 보였는지 그때부터 묵을 수 있도록 조정해 주셨어요. 다행이죠. 그래서 더 고민하지 않고 그 집에 묵기로 했습니다. 처음부터 9월 셋째 주까지 머물 수 있는 집을 계약했다면 몸은 더 편했겠지만요. 늘 현명한 선택만 하며 사는 건 아니지만, 구멍이 나더라도 어찌저찌 이어 붙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그나마 대화를 자주 나누던 어학원 친구들과 작별하고 또다시 혼자가 되었는데요. 개막식 행사를 보러 가는 어학원 액티비티에 참여했는데, 가는 길이 너무 뻘쭘해서 그냥 혼자 가고 싶더라고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말수가 거의 없던 같은 반 친구를 만나서 대화를 트게 됐습니다. 둘 다 스페인어를 잘 못하다 보니 엄청 간단한 문장만 주고받았는데, 그러니 이해를 못 해도 아는 척하고 넘어가는 건 좀 덜 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이번 주는 내향적인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는데요. 그동안 제가 스페인어도, 영어도 잘 못해서 대화가 잘 안 이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재미없는 대화 상대일 것 같아 어디 같이 놀러 가자고 하기도 미안했고요. 그런데 이 친구들은 제가 떠듬떠듬 말하는 것도 끝까지 기다려주고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는 게 고마웠습니다.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정말 대단한 능력이라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혹시 제가 처음 상경했던 스무 살 때로 돌아간 것 같다고 했던 거 기억하시나요? 그때처럼, 이전과 달라지려면 불편한 일도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맞추려다 보니 스트레스만 쌓이고 자존감만 떨어지더라고요. 하지만 남에게 나를 억지로 맞추는 건, 용기를 내는 일과는 다른 것 같아요. 스무 살 때의 저는 ‘나’라는 게 뭔지도 잘 모르겠고 혼자 살아갈 자신도 없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조금 혼자 지낸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거든요. 언어를 못 한다는 건 미숙한 것일 뿐이지, 저라는 사람의 개성을 무효화시키는 건 아니니까요. 이제는 그냥 ‘나’로 살아도, 결이 맞는 사람은 분명히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 것 같아요.
하지만 스페인어가 정말 잘 안 느는 건 좀 문제가 있다고 느껴요. 벌써 어학원에 다닌 지도 2달이 됐더라고요. 반은 점점 올라가는데 여전히 거의 알아듣지 못하고 있어요. 마치 벽이 점점 좁아지는 방에서 저만 탈출하지 못하고 갇혀 있는 신세가 된 것 같아요. 다른 학생들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듣는 건지 모르겠어요. 저보다 간절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말이죠. 그렇다고 제가 간절한 만큼 노력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요.
공휴일에 어학원이 쉬는 김에 레터를 쓰려고 했는데요. 저는 한국인이니 광복절을 기리며 해방의 자유를 만끽하기로 했습니다. 그냥 하루 종일 놀았다는 얘기입니다. 독일 친구가 도노스티아에서 머무는 마지막 날이라 근교 도시에 놀러 가려고 했는데요.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고 무작정 버스정류장에 갔더니 다음 버스가 너무 늦게 온다 그래서 포기했습니다. 대신 함께 쑤리올라 해변을 다녀왔어요. 어학원 친구랑 따로 만나서 같이 논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요. 둘 다 내향인이지만 인파 속에서 불꽃놀이도 보고 댄스 페스티벌에서 춤도 추며 우리에게 맞는 주파수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친구에게 올해 도노스티아의 여름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페스티벌을 좋아하는 친구가 ‘DIIV’라는 미국 인디 록 밴드가 도노스티아에서 공연을 한다면서 꼭 보러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상으로 봤을 때만 해도 크게 기대가 되진 않았는데, 라이브 공연은 정말 최고더라고요. 제가 스페인에서 본 공연 중 최고였어요. 미국 밴드이긴 하지만요. 혹시 구독자 님이 록을 좋아하고, DIIV가 구독자 님 나라에서 공연을 한다면 꼭 한번 보러 가시길요.
이번 주 내내 도노스티아에서는 불꽃놀이가 열렸습니다. 일종의 불꽃놀이 대회라 매일 다른 나라나 스페인의 다른 지역 팀이 불꽃놀이를 선보이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이번에 지구 대기오염에 도노스티아가 크게 기여한 셈이 됐습니다. 첫날엔 라 콘차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봤는데 정말 아름답긴 했지만, 다시는 못 오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사람 붐비는 걸 싫어해서 서울세계불꽃축제도 한 번도 본 적 없거든요. 그래도 여의도 한강공원보다는 덜 붐볐을 것 같긴 해요. 그런데 밤 10시 45분만 되면 집에서도 불꽃놀이 소리가 엄청 크게 들리더라고요. 그러면 괜히 보러 가고 싶어지잖아요. 혹시 집 근처에서도 보일까 해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금 나가봤는데, 정말 집 앞에서도 보였어요. 오히려 불꽃이 강물에 비쳐 보이는 풍경이 더 운치 있게 느껴졌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문득 이 도시가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이 도시를 떠올렸을 때 정말 행복한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미래의 나는 지금 이 도시에 있던 나를 자랑스러워했으면 해서, 불꽃놀이를 보고 돌아온 뒤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원래 12~14일에 유성우를 관측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화요일 밤에 유성우를 보러 간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저도 따라가려고 과자도 한 아름 샀는데 날씨가 좋지 않아 무산됐어요. 과자 까먹고 걸스토크하면서 밤에 별 보는 낭만적인 추억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불꽃놀이를 보고 있으니 불똥이 떨어지는 모습이 꼭 유성우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주는 내내 불꽃놀이를 보러 다녔습니다. 이제는 유성우를 못 본 게 아쉽지 않아요. 불꽃놀이도 눈치가 있다면 유성우 대신 제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까요?
P.S. 지난주에 생겼던 상처는 이제 거의 다 나았습니다. 구독자 님이 걱정해주신 덕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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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커피
거리 퍼레이드라니 멋있네요! 아무래도 한국 특히 서울에선 거리 퍼레이드를 보기 힘들죠(시위 제외하구요) 외국이라 할 수 있는 경험이니 충분히 즐기시면 좋겠어요!
Buenas Noches
아 그렇게 생각하니 진짜 서울에는 퍼레이드가 많지 않은 것 같네요. 사실 있는데 관심이 없었던 걸까요? 다음에는 퍼레이드 행렬 속에서 같이 걸어보기도 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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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체
이번 주는 즐겁게 축제를 즐기신 것 같아서 보기 좋아요! 한국에서는 불꽃축제를 한다고 하면 불꽃보다 사람 구경을 더 하게 되는데 노체님이 인스타에 올려주신 사진덕분에 저까지 힐링했어요. 상처도 아물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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