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 온 지 한 달이 되었습니다. 이제 6월도 지나고 7월이 되었네요. SNS를 보니 상반기 회고 글이 하나둘씩 올라오더라고요. 벌써 올해가 절반이나 지났다니, 어쩐지 믿기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 어학원에서 스페인어의 과거형 문법을 배우고 있어요. 최근 수업 시간에는 지난달에 무엇을 했는지 문장을 만들어보는 활동을 했습니다. 한 달 전, 저는 마드리드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레터를 쓰고 있었죠. 그때 저는 아무런 계획도 없었고, 스페인어도 영어도 자신이 없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의 제가 기대한 모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달 동안 아는 사람도 생겼고, 어학원도 다니기 시작했고, 목표로 했던 서핑도 해보았습니다.
구독자 님은 한 달 전, 제 첫 레터를 읽고 계실 때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아무래도 기억나지 않으시겠죠. 저도 가끔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까지의 시간이 종이처럼 반으로 접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페이지에 꽂혀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책장에 있는 모든 책을 한 장 한 장 들춰보지 않는 이상 다시는 펼쳐 볼 일이 없는 기억이 되는 거죠. 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그 종이가 책에서 떨어져 나와 눈앞에 펼쳐지면, “아, 이런 시간이 있었지” 하며 참 반갑더라고요. 지금의 나는 오로지 혼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내가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구나' 싶어져서요. 지금, 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순간들이, 사실은 과거의 내가 치열하게 고민해 준 덕분에 가능한 시간이라는 걸 깨달을 때면, 문득 나 자신에게 고마워지더라고요.
지난 레터에서 제가 서핑을 왜 배우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했었는데요. 일주일 동안 서핑 수업을 듣고 난 지금, 저는 서핑을 좋아하게 되었을까요? 거짓말 같게도, 서핑이 좋아졌습니다. 큰맘 먹고 서핑 수업을 5일 결제했는데요. 월요일에는 파도가 거의 없어서 머리카락도 젖지 않은 채 바다에서 나왔습니다. 화요일 수업은 빼먹었는데, 다행히도 파도가 별로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수요일에는 번개가 쳐서 바다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나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서핑이 싫었어요. 레터에 썼듯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나’하는 회의감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목요일에 날씨가 정말 좋았습니다. 파도도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요. 파도가 좋아서인지 서핑 강사님이 밀어주신 네 번 중 세 번이나 일어설 수 있었어요. 얼떨결에 일어난 것에 가까웠지만, 일단 일어설 수 있으니까, 서핑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금요일에는, ‘이제는 강사님이 밀어주지 않아도 내가 직접 파도를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해변에 나갈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정말 흔치 않은 기회이긴 하니까요. 생활이 안정되면 서핑 수업을 더 들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도노스티아에 있는 동안, 혼자서도 파도를 잡을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양양에서 서핑 수업을 들었을 때, 주말마다 부산에서 양양까지 서핑을 하러 오시는 분이 계셨어요. 어떻게 그렇게까지 서핑을 좋아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파도가 좋았던 날을 경험하고 나니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더라고요. 서핑을 나간 날 파도가 없으면 실망이 컸는데, 일주일간 연속으로 서핑해 보니 ‘날씨는 어쩔 수 없는 거고, 다음엔 좋은 파도가 오겠지’라는 마음가짐도 생겼습니다. 이것도 다음이 없다면 가질 수 없는 마음가짐이겠죠.
생각해 보면 제가 지금 좋아하는 취미인 자전거와 수영도, 처음에는 정말 하기 싫었어요. 운동 신경이 좋지 않은 편이라 못하는 나를 견디는 게 힘들었거든요. ‘이렇게 고통받으면서까지 굳이 계속해야 할까?’ 싶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했던 그때의 제게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왠지 서핑도 그럴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계속 하나 봅니다.
문득, 스페인어 공부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페인어로 대화하는 건 정말 힘들어요. 특히 모든 문장을 못 알아듣는데, 계속 “다시 한번 말해줘” 하기도 어렵고, 다시 말해줘도 못 알아들으니 결국은 그냥 알아들은 척하게 되는 거요. 그냥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집에서 쉬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게 살 거였다면 굳이 한국을 떠날 필요가 없었죠. 스스로 불러온 재앙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소셜 모임에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인떼르깜비오(intercambio)'라는 언어 교환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가는 내내 그냥 돌아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어차피 궁금해서 언젠가는 가게 될 거라면, 지금 안 가면 다음 주의 내가 또 번뇌할 뿐이니까요. 막상 가보니 참 좋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요. 어학원 사람들은 서로 배우는 처지니까 쉬운 단어로 천천히 말해줘서 그나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언어 교환 모임은 영어든 스페인어든 하나는 유창하게 하는 사람들이 오는 분위기더라고요. 말이 정말 빨랐습니다. 90퍼센트는 못 알아들었어요. 늘 그 단어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잘 설명해 주는 어학원 선생님께 새삼 감사함을 느끼게 됐습니다. 그래도 매주 참석하다 보면 언젠가는 나아지지 않을까, 낙관적인 마음을 가져봅니다. 물론 언어 실력이 나아지기 전까지는 꽤 괴롭겠지만요. 과연 이렇게 빠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소셜 모임이나 서핑 외에도 몇 가지 새로운 도전을 해봤는데요. 지난주부터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어학원에 가보기 시작했어요. 정확히 말하면 ‘사이드워크 서핑 보드’입니다. 28인치 캐리어에 30인치 보드까지 들고 이동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어서, 그동안은 보드가 애물단지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이 보드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으려면 잘 타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커뮤니티를 찾아볼까 하다가, 문득 보니 자전거 도로가 정말 잘 되어 있더라고요. 오랜만에 타보니 방법이 가물가물하고, 여기저기 굴러다닌 보드 상태도 걱정됐지만 막상 타보니 오히려 한국보다 더 타기 좋은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등하굣길에 타고 다니기에 꽤 괜찮은 교통수단이 될 수 있겠더라고요. 아직은 걷는 것과 속도가 비슷하지만요. 그래도 매일 타다 보면 보드에 익숙해지겠죠. 이렇게 보드를 탈 수 있게 된 것도, 과거의 내가 두 달 동안 수업을 들었던 덕분입니다.
걸어서 해변까지 갈 수 있는 곳에 살고 있다 보니, 꼭 바다 수영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수영복은 어디서 갈아입지? 짐은 어디에다 두지? 나오면 어디서 씻지? 별별 걱정이 들더라고요. 그러던 중 서핑을 마치고 맑지만 덥지 않던 어느 날, 라 콘차 해변에서 바다 수영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될 대로 돼라'는 마음으로 갔더니, 정말 어떻게든 되더라고요. 전에 서핑 수업 때 바닷속에서도 눈을 떠도 된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서, 물속에서 눈을 떠봤는데요. 그렇게 맑은 물은 아니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물속에서 손 위로 윤슬이 지나가는 장면이 참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자유형도 해보고, 평영도 해보고, 무료 파도풀도 즐기고, 바다 위에 누워 하늘을 나는 갈매기도 봤어요. 문득 ‘내가 이렇게 바다에서 놀아본 적이 있었던가?’ 싶더라고요. 그동안은 바다를 보기만 하거나, 발만 담그거나, 서핑 수업을 듣기만 했지, 이렇게 내 마음대로 바다를 누린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저는 경험주의자이고 그동안 꽤 여러 가지 경험을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제까지 이런 경험을 해볼 생각을 못 해봤을까 싶었어요. 꼭 죽기 전에 해봐야 하는 건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 장면이 불현듯 생각날 날이 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어요. 지금도 가끔 교환학생 때, 함박눈이 내리던 학교 잔디밭 위에 누워 얼굴 위로 쏟아지는 눈송이를 한참 바라보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요.
어릴 때 글짓기 공모전에 몇 번 응모한 적이 있었는데요. 대체로 내용을 좋게 포장하길 권장하는 공모전들이었어요. 그래서인지 글을 쓸 때마다 마무리를 좋게 감싸려는 습관이 남아 있습니다. 그 습관을 고쳐보고자, 이번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로 마무리해 보려 합니다.
저는 외형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었어요. 아마도 군중 속의 익명성 덕분이었겠죠. 그런데 동양인이 거의 없는 이곳에 오니, 더 이상 군중 속에 숨을 수 없는 외형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더 신경을 쓰게 되더라고요. '혹시 내가 누군가의 처음 만나는 한국인이 된다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한국인의 이미지가 내가 되어버리면 어떡하지?'하는 자의식 과잉적인 걱정도 들고요. 이곳은 해변에 가면 여자들도 상의를 벗고 다닐 정도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인데, 저는 오히려 더 신경 쓰게 되는 게 좀 아이러니하더라고요. 막상 저도 상대에 대해서 대화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적어지다 보니, 사람들을 스테레오타입으로 바라보게 되는 감도 있어요. 그동안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내 편견대로 규정하지 않으려 꽤 노력해 왔는데요. 누군가를 편견 없이 대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대화로 오해를 풀어가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정작 대화를 할수록 오해가 더 쌓이는 기분이라 그 여정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듣기 공부가 시급하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넷플릭스를 켜봤습니다. 스페인에서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작품 1위가 ‘오징어 게임’이더라고요. 친절한 슈퍼마켓 점원이 제가 못 알아듣자 중국어로 번역해서 보여주고, 식당에서는 일본어 메뉴판을 먼저 주는 이곳에서, 공유할 수 있는 한국 콘텐츠가 있다는 게 참 반갑게 느껴졌어요. 문제는 제가 오징어 게임을 안 봤다는 것입니다. 케이팝 이야기가 나와도 제가 아이돌을 잘 모르니 맞장구치기도 어렵고요. 제 취향을 개조하지 않더라도 제가 재밌어하는 이야기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생길 수 있을까요? 한 달 동안 꽤 많은 도전을 해온 것 같지만, 앞으로도 더 많은 도전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의견을 남겨주세요
JIYEON HA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Buenas Noches
비공개 댓글 입니다. (메일러와 댓글을 남긴이만 볼 수 있어요)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