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을 복제한 스타트업
얼마전 와이콤비네이터에 참가한 한 스타트업이 실리콘밸리 개발자 및 오픈소스 커뮤니티를 발칵 뒤집어놓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오픈소스 AI 코드 에디터'를 내세운 스타트업 PearAI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PearAI의 창업자 듀크 팬 (Duke Pan)은 오픈소스의 철학을 자신들의 제품뿐 아니라 제품 개발 과정 전반에 적용하겠다며 관련 유튜브를 함께 공개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당당하게 자신들의 AI 코딩 에디터가 VSCode와 Continue.dev의 '클론'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문제는 Pear AI가 오픈소스인 원 프로젝트에 Pear Enterprise License라는 자체 폐쇄 라이선스를 붙인 것이 알려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개발자 커뮤니티는 순식간에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X(구 트위터)에서는 날카로운 비판이 쏟아졌죠. 처음에는 원래 오픈소스이고 스스로 VSCode와 Continue 활용 여부를 밝혔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응했지만 비판은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이후 X에서 커뮤니티 노트를 통해 상황을 설명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부정확해 삭제되는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Pan은 서둘러 사과문을 발표하고 라이선스를 원래의 Apache 오픈소스 라이선스로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PearAI에 등을 돌린 상황입니다. 게다가 Continue 측에서는 "오픈소스는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다"라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지며 우회적으로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본전도 못 찾은 와이콤비네이터
이번 사태의 핵심은 단순히 오픈소스 코드를 가져다 쓴 것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를 바탕으로 제품을 수익화하고 와이콤비네이터의 투자까지 받았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와이콤비네이터의 수장인 개리 탠이 '원래 오픈소스인데 뭐가 문제야?'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며 Pear AI를 옹호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이번 사태의 또 다른 아이러니는 피해자 입장에 선 Continue.dev 역시 불과 1년 전 와이콤비네이터의 투자를 받은 신생 스타트업이라는 점입니다. 창업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들이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닌, 사업의 근간이 되는 제품을 그대로 베끼는 상황에서 와이콤비네이터는 마구잡이식 투자를 한 겁니다. 게다가 '고객들에게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 좋은 거 아니냐,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라는 식의 안일한 대응을 보였죠. 이런 와이콤비네이터의 행태는 결국 자신들의 신뢰도에도 타격을 주고 말았습니다.
결국 와이콤비네이터는 개리 탠 명의로 공식 입장문을 올리며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대응한 점', '외부의 비판을 와이콤비네이터 기업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한 점'을 인정한 것입니다.
와이콤비네이터가 위대한 기업을 만드는 창업자에게 투자한다고 자신들을 알려왔지만 실상은 남의 콘텐츠를 베껴 방송하는 트위치 스트리머 수준의 창업자만 양성한다는 비판은 곱씹어 봐야 할 대목입니다.
또 다른 오픈소스, 워드프레스의 운명은
한편에서는 또 다른 대표적인 오프소스 프로젝트 워드프레스와 워드프레스 웹사이트를 위한 관리형 호스팅 서비스 기업 WP엔진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2003년 워드프레스를 창립한 맷 뮬렌웨그 (Matt Mullenweg)는 올해 들어 WP엔진과 긴장 관계를 이어왔는데 얼마 전 해당 사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입니다.
워드프레스는 웹사이트와 블로그를 만들고 관리하는 데 쓰이는 오픈소스 콘텐츠 관리 시스템(CMS)입니다. 관련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쓸 수 있고 각종 플러그인과 테마 사용, 커스터마이징이 자유로워 인기를 끌었죠. 탄생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현재 전 세계 웹사이트의 43%를 차지할 정도로 강력한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맷 뮬렌웨그는 이 워드프레스의 영향력을 두 갈래로 확장해 왔습니다. 한편으로는 비영리재단인 WordPress.org를 운영하며 오픈소스로서의 가치를 지켜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활용한 호스팅 서비스인 WordPress.com을 소유한 오토매틱(Automattic)이란 영리 법인을 만들어 워드프레스를 활용한 다양한 사업을 펼쳐 왔죠. 이 전략이 성공을 거두면서 2024년 오토매틱의 예상 매출은 1조 원에 달하고, 현재 추정 기업가치는 무려 10조 원을 넘어섰습니다.
영리법인과 비영리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병행하며 인터넷 호스팅 시장을 지배해온 워드프레스가 최근 들어 마찬가지로 오픈소스를 활용해 사업을 키워온 경쟁사들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요 갈등 사항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WP엔진이 워드프레스의 중요 기능인 게시물 수정 이력 기록을 기본적으로 비활성화한 것입니다. 둘째, 'WP' 약칭 사용으로 인한 브랜드 혼동 문제입니다. 많은 사용자들이 WP Engine을 워드프레스의 공식 서비스로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습니다. 셋째, 상표권 침해 논란입니다. 뮬렌웨그가 설립한 오토매틱은 WP엔진이 워드프레스와 우커머스(WooCommerce) 상표를 무단으로 사용해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은 돈 문제로 귀결됩니다. WP엔진이 오토매틱 법률팀에 보낸 공식 서한에 따르면, 뮬렌웨그는 오래전부터 WP엔진 수익의 일부를 공유하라는 압박을 계속해 왔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일정 시점까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WP엔진의 명성을 실추시키고, 워드프레스 커뮤니티 행사에서 배제시키겠다고 협박까지 했다는 주장입니다.
뮬렌웨그 역시 라이선스 계약 협상을 진행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워드프레스 재단의 소유주인 자신에게는 당연한 권리가 있다는 것이죠. 누군가 오픈소스 지적재산권을 활용해 수 천억 원을 벌어들이면서 이를 다시 커뮤니티에 환원하는 데 인색하다면, 더 많은 기부를 요구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사태는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오토매틱과 WP엔진과의 분쟁이 워드프레스의 오픈소스 철학에 반한다는 직원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뮬렌웨그는 자신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직원들에게 6개월 월급 또는 3만 달러의 퇴직금 중 높은 금액을 받고 당장 퇴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내부 공지를 올린 것입니다. 오토매틱 전체 직원의 8.4%는 패키지를 받고 퇴사를 선택했습니다.
AI 시대 설 곳을 잃은 오픈소스와 비영리 재단
오픈소스와 비영리 재단, 그리고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근사한 비전이 서로 얽히며 묘한 기시감이 드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역대 최대 규모의 벤처 자금 조달에 성공한 오픈AI입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비영리재단 중심의 이사회가 재단 설립의 목적을 강조하며 샘 알트만의 해임까지 시도했던 곳인데 이제는 영리법인 전환을 조건으로 조 단위 펀딩에 나서도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핵심은 간단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AI 시대에는 오픈소스와 비영리 재단의 자산도 손쉽게 돈벌이에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명확해졌습니다. 오픈AI의 GPT 모델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상업 서비스의 등장은 이런 현상을 잘 보여줍니다. 기업들이 오픈소스 AI 모델을 활용해 빠르게 서비스를 출시하고 수익화에 성공하면서 오픈소스의 의미 자체가 퇴색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AI 기술과 오픈소스의 결합은 라이선스 해석을 한층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AI 모델 학습에 사용된 데이터의 저작권 문제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죠.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한 상업 서비스가 늘어나면서, 기존 라이선스의 범위와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생성형 AI로 인해 소프트웨어의 경제적 가치가 급격히 치솟으면서, 오픈소스 프로젝트의 상업적 가치도 재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는 기여자와 상업적 이용자 간의 이해관계 충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워드프레스와 WP엔진의 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한 상업 서비스가 원 프로젝트의 브랜드 가치를 활용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논란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지난 30년간 투명성, 협업, 혁신을 바탕으로 IT 산업 발전의 근간을 형성해온 오픈소스 이니셔티브가 AI로 인해 일대 위기에 처한 셈입니다. 과연 오픈소스 커뮤니티와 상업적 이용자들이 오픈소스 프로젝트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한 새로운 모델과 규범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주목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