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주간모기영 203호

[이정식의 밀플뢰르] <프렌치 수프>(트란 안 홍, 2024)

2026.07.18 | 조회 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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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밀플뢰르]

사라질 것이므로, 사랑하겠습니다

<프렌치 수프>(트란 안 홍, 2024)

 

사소한 오해는 미리 말씀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프렌치 수프>에는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요소들이 가득한데요. 저는 그만 아찔해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여러 의미에서 ‘아름답다’는 수식어가 어울립니다. 미장센(어느 장면이라도 그것을 잘라 액자에 담는다면 곧장 아름다운 작품이 될 것 같은), 음식에서 중요한 것은 미각만이 아니라 시각도 맞다는 듯이 화려하고 감각적으로 플레이팅된 요리의 향연은 우리의 감각을 다채롭게 충족시켜 줍니다.(특히 영화 시작부터 30분 동안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요리 장면은 압권이죠.) 19세기의 장식적인 식탁과 식기들, 조리기구 등 당대 프랑스의 공기까지도 재현하는 데 성공한 이 영화에서 저는 왜 어떤 이물감을 느껴야 했던 걸까요. 그 이물감을 곱씹으며 이토록 빛나는 것들이 대체 무엇을 위한 걸까, 를 오래 생각했습니다. 영화의 중반부가 지나자, 제 고민을 이루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프렌치 수프>는 국제적으로 명성이 드높은 요리사이자 미식가인 도댕(브누와 마지멜)과 그의 전속 요리사인 외제니(줄리엣 비노쉬)가 함께 만드는 요리 이야기입니다. 어떤 음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도댕이 구상하면, 그 의도를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도록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재료를 고르고 조리하며, 식감과 맛으로 구현해 내는 것은 외제니의 몫이었습니다. 그렇게 20년을 서로는 서로를 보완하고 반영하는 파트너였습니다. 동시에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는 연인이기도 했는데요. 특기할 점은 도댕의 청혼을 외제니가 승인해주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싶은 거라고 저는 읽었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순간이 오기까지를 기다리는 것이라고요. 일적으로는 도댕이 주도권을 쥐었을지 몰라도, 사랑에 있어서는 그 지위가 역전되었다는 것도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네요.

<프렌치 수프>(트란 안 홍, 2024), [출처: KMDB]
<프렌치 수프>(트란 안 홍, 2024), [출처: KMDB]

영화의 서사는 가느다란 편이에요. 어느 날 유라시아의 왕자에게 도댕은 식사 초대를 받습니다. 왕실의 식사답게 장장 8시간이나 이어진 긴 만찬이었지만 도댕에게 그 시간은 시련이었습니다. 코스로 이어지는 요리는 화려했을지 몰라도 정작 중요한 것은 빠진 것 같다고요. “질서나 체계 없이 행진”하는 것 같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도댕은 이후 왕자를 초대해 요리를 대접하고자 합니다. 물론 외제니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기획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제가 서두에 적었던, 영화에 대해 오해를 갖게 된 지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제게 이 영화는 너무 환하게 느껴졌어요. 세상의 근심과 아픔은 깨끗하게 표백되고, 화면 속 재현된 19세기 프랑스의 어느 자택은 내내 고고하고 단아한 세상이었습니다. 그 자체로 충만한 세계에 사는 것 같았던 거죠. 물론 영화라는 시청각 매체가 미각과 촉각, 그리고 후각을 느끼게 할 수는 없을 테지만, 이 영화의 목적은 마치 오감 전체를 기어이 관객에게 전달하고야 말겠다는 목표만을 향해 달리는 것 같았거든요. 무엇보다, ‘음식’이라는 것이 영화에서 그리 긍정적이지 않은 은유로 사용된 사례도 적지 않았으니까요.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슬픔의 삼각형>(루벤 외스트룬트, 2022)이 보여준 바 있는, 음식에 대한 상류층의 게걸스러운 식탐이었죠. 이미지와 감각이 명징하고 아름다울수록, 그것이 되려 깊이가 얕음을 은폐하는 효과가 아닌지, 저는 의심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서사에서 저는 경계를 풀고 말았습니다. 도댕과 외제니는 어느 날 결혼을 약속합니다. 오랜 기간 시도했던 도댕의 청혼이 그제야 이루어진 거예요. 도댕이 진심을 담아 외제니에게 청혼하는 장면도 흥미로운 역전현상이 있습니다. 이전까지 외제니가 해준 요리를 그는 맛을 음미하며 ‘비평’했지만, 이제 도댕이 그녀를 위한 요리를 하며 그녀가 그의 맛을 비평하죠. 앞에서 저는 외제니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때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이제 시간이 되었다고 그녀는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지고, 그만 목숨을 잃습니다. 누구도 그녀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도댕은, 깊이 슬퍼하고 오래 힘들어합니다. 그녀의 상실을 앓는 도댕의 모습을 영화는 절제된 화면으로 천천히, 그리고 긴 시간 응시합니다.

<프렌치 수프>(트란 안 홍, 2024), [출처: KMDB]
<프렌치 수프>(트란 안 홍, 2024), [출처: KMDB]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저는 <프렌치 수프>에 마음을 주고 말았습니다. 새로운 요리사를 찾았다며 모두가 자리를 비운 그 집에서 카메라는 외제니가 생전에 일한 부엌을 패닝 숏으로 담는데, 그제야 부엌의 전체 풍경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이전까지 음식이나 인물을 클로즈업한 쇼트로 파편적으로 밖에 볼 수 없던 공간 전체를 드디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그리 감격적이지 않은 장면이겠지만, 그곳은 외제니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곳, 그러니까 외제니에 관한 도댕의 기억이 고인 곳이죠. 그녀가 요리하면서 입었던 앞치마, 사용했던 도마, 칼, 그리고 팬과 오븐. 한꺼번에 많은 조리를 동시에 진행하느라 분주하게 오갔던 동선까지. 이제 볼 수 없어도 언제라도 생생하게 떠올리거나, 현실의 시공간으로 파도처럼 밀려드는 기억들.

그곳에서 도댕과 외제니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마치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곡선으로 흘러가며 언제건 원하는 장면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듯이요. “20년 동안 같은 집에서 살면서 어떻게 그런 지조와 인내를 계속 보여줄 수 있는 거죠?” 이어지는 도댕의 답은 이렇습니다. “성 오귀스탱(성 어거스틴)은 말했어요. ‘행복은 갖고 있는 것을 계속 열망하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가진 적 있나요?” 재차 이어지는 그녀의 질문.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내겐 아주 중요한 질문이에요. 난 당신의 요리사인가요, 아내인가요?” 그녀의 눈빛을 오래 바라보던 그는 말합니다. “나의 요리사죠.” 만족한 답변이라는 듯, 외제니도 말합니다. “메르시”.

<프렌치 수프>(트란 안 홍, 2024), [출처: KMDB]
<프렌치 수프>(트란 안 홍, 2024), [출처: KMDB]

혹시라도 여러분도 영화를 보신다면, 이 장면을 오래 음미하시길 바랍니다. 제가 음미한 맛을 조심스럽게 소개해 드리죠. 영화의 초반부에서 도댕이 외제니에게 청혼하자, 그녀가 완곡하게 거절해요. “우린 부부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요. 자료와 요리법을 연구하고 만들고 맛보고 (…) 그렇다면 이대로도 좋지 않나요?” 아까 외제니의 주체적인 결정 운운했지만, 이 문장은 그간 도댕의 청혼을 피한 결정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음을 넌지시 알려다 줍니다. 결혼하지 않은 지금도 우리는 이미 부부와 다를 바 없으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녀의 죽음 이후 저는 이 말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도댕과 외제니의 결혼 생활은, 그의 청혼 전부터 이미 시작됐었구나, 라고요. 그렇게 보면, 이 이야기는 20년 동안 함께 살던 두 사람이 긴 기다림 끝에 결혼했지만 안타깝게 신부가 세상을 떠나버린 비극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일과 사랑에 있어 ‘한 몸’이 되어 20년 동안 함께 했던 두 사람의 마지막 이별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결혼한 이후의 짧은 시간이 소중한 것만큼이나, 결혼하기 전에 함께 나누었던 긴 시간도 동등한 비중으로 중요합니다.

결혼에 대한 외제니의 이 생각은, 사실 요리와 음식과도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영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니, 음식을 만드는 장면에 비해, 음식을 먹는 장면은 짧게 나와요.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 영화 초반 롱테이크로 담은 30분의 요리 장면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저도 모르게 아깝다고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들인 노력과 시간에 비해, 맛보는 순간이 과도하게 짧아서요. ‘저렇게 짧게 사라질 순간을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해야 하는가’. 그러나 외제니의 생각은 다른 것 같습니다. 아직 손질되지 않은 재료를 고르고, 손에 익은 감각으로 필요한 만큼 다듬으며, 그 재료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향취를 맡고, 팬에 익혀지는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외제니는 음식을 맛보고 있던 겁니다. 도댕의 청혼 전부터 그녀의 결혼 생활이 시작한 것처럼요. 도댕의 ‘(당신은) 나의 요리사’라는 답변은, 그 또한 결혼 전의 생활을 그녀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의미였으므로, 외제니는 만족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시간은 모든 것을 움켜잡고 흘러갑니다. 황홀한 순간은 찰나일 뿐, 곧 사라지고 말죠. 음식도, 사랑도, 그리고 삶도요. 이 사실이 가져다주는 허망함 때문에 모든 것을 무의미함으로 뒤덮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때마다 저는, 외제니가 보여준 태도 하나를 오래 기억하고 싶습니다. 사라지기 때문에, 사랑하겠다는 태도요. 여러분도 외제니가 차려준 영화의 맛을 오래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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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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