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의 시네마 분더카머
한 줌의 온기
건축학적 지식이 좀 더 있었다면 이 영화에 대해 보다 풍성한 내용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제게는 그럴만한 지식도, 유창한 언어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감각한 것들, 영화와 희미하게나마 관련지어진 사유의 편린을 좀더 확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요. 그 욕망을 차분하게 따라가보려고 합니다. 어떤 경로가 앞에 놓여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는 미국으로 이민 오는 동안, 뜻하지 않게 가족과 떨어집니다. 영화는 라즐로가 아내와 조카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미국에 입항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요. 그는 전쟁 전에 먼저 미국에 정착한 사촌 아틸라(알레한드로 니볼라)의 집에 신세를 집니다. 탁월한 건축가였던 라즐로의 덕을 내심 기대했었는지, 아틸라는 부유한 사업가인 아버지의 서재 리모델링을 해달라는 해리 리 밴 뷰런(조 앨윈)의 제안에 기꺼이 응하고는, 라즐로의 경력을 자랑스럽게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서재가 리모델링 되는 줄 알지 못했던 해리슨 리 밴 뷰런(가이 피어스)이 크게 역정을 내는 바람에, 일은 취소됩니다.(아들 해리의 말에 의하면, 서재 리모델링은 서프라이즈 선물로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라즐로와 해리슨이 엮이게 되는 지점부터, 영화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라즐로와 해리슨의 만남과 엇갈림, 오해와 호혜, 충돌과 껴안음의 대립을 <브루탈리스트>는 동력으로 삼아 내달립니다. 흥미로운 건, 라즐로를 예술로, 해리슨을 자본으로 환원해서 이해해도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의 역학구도가 어느 정도 들어맞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미국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해리슨과 모더니즘 건축 사조인 ‘브루탈리스트’ 그 자체인 라즐로가 삶의 어느 지점에서 겹쳐지게 되었을 때,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반응을 영화는 추적합니다. 당연하게도(당연하지 않게도) 서로는 서로를 제거할 수 없습니다. 양자택일이라는 나이브한 결론을 영화는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는 그런 분열적 충돌 그 자체를 보여주려는 것은 아닌지, 저는 생각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분열적 충돌은 라즐로 내면에서도 이미 심하게 앓고 있는 증상이기도 했습니다. 마약에 탐닉된 채 어둠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의 영혼은 빛을 향한 향일성이 있었죠. 그것이 하나의 물성으로 드러난 것이 끝내 미완인 채로 존재하는 반 뷰런 커뮤니티 센터 프로젝트 건물입니다. 실내공간을 극단적으로 좁게 만들어놓은 이유가, ‘그래야 사람들이 위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그의 대답에서, 우리는 그의 정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어렴풋하게 알 수 있죠. 라즐로가 말한 그 ‘위’에서 생긴 틈 사이로 빛이 들어와 제단 바닥에 십자가 윤곽이 반사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제1회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에서 열린 라즐로의 전시회에서 그의 조카 조피아(래피 캐시디)는 그 좁은 방 공간이 라즐로가 오래 전 갇혔던 수용소의 크기를 재현한 것이라고 말하는데요. 여기에 이르면, 라즐로가 건축에 무엇을 담길 원했는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저희 식대로 표현하자면, 신적인 무언가를 갈망한 것은 아니었을지요. (물론 라즐로는 유대교에 속해있지만 냉담자에 가깝긴 해서 어떤 신성을 자신의 건축물에 담아 표현하려는 의도가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말하고 싶은 건, 부박한 현실과 분명하게 구분되는 어떤 ‘빛’, 그것이 자신의 건축예술적 성취이건, 이상이건, 가치관이건 그 모든 것을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 빛이 자신의 건축물에 있기를 바랐던 것이고, 그것을 향해 그는 끊임없이 고개를 올려다보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장장 215분이나 되는 영화의 러닝타임을 견디다 보면 에필로그에서 우리는 뜻하지 않은 도착지에 당도하게 됩니다. 위에서 짧게 언급한, 1980년 제1회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에 라즐로의 전시회가 열리는데요. 시간이 오래 흐른 탓인지, 라즐로는 말을 잃고 휠체어에 앉아있습니다. 그대신 조카, 조피아가 강연을 합니다. 강연에서 그녀는 라즐로 건축의 특징, 가치관 등을 주석하는데, 이상한 것은 그 설명이 어딘가 동의되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반 뷰런 커뮤니티 센터의 실내공간이 수용소의 크기를 재현했던 것’이라는 사실적인 측면에서는 이견을 달기 어렵겠지만, 건물의 어떤 공백이 라즐로의 아내인 에르자벳(펄리시티 존스)의 부재를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적인 측면에서는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영화가 지금껏 보여준 라즐로의 생애를 보면, 그가 정말 에르자벳의 부재를 표현하려고 했는지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죠. 조피아의 의견에 반박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주목하는 건, 원작자는 음소거된 채 청중이 되고, 원작자가 아닌 사람이 원작자와 비슷한 종류의 권위를 얻어 발화하는 장면입니다. 게다가 그 말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해석이 어느 정도 가미된 내용이죠. 저는 이 장면에서, 라즐로는 타인에 의해서도 분열되는구나, 싶어서 잠깐 아득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열이 나쁘기만 한 걸까요. 그로써 라즐로는 영원히 오해되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것이 애초에 그렇게 던져진 인간의 조건이라면. 시대와 세계와, 자기 자신의 내면과 불화하느라 분열된 사람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삶에 대해 그 어떤 해명이나 해석도 할 수 없는 것이 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면. 씁쓸하긴 하나 누군가에 대해, 심지어 자기 자신에 대해 단 하나의 정돈된 진실에 가닿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상황이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은 아닐까요. 다만, 빛을 추구하는 일은 포기하지 않는 것. 뒤집힌 십자가의 윤곽이라도 간직하기를 바라는 그의 안간힘만큼은 정확한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누구도 어느 사람을 완벽하게 아는 일은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해석되지 않은 공백의 영역이 있고, 그곳을 채워야 하는 것은 그를 바라보는 주체인 ‘나’에 달려있죠. 그것이 타인이건, 심지어 자기 자신이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공백을 재구성하는 일을 이왕이면 너무 냉정하게 하진 말자, 라는 다짐을 저는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따뜻함과 한 줌의 온기가 그 여백을 덥혀주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생각입니다. 순진해보여도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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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일상의 많은 것들이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죠.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은 긴장과 걱정도 있지만, 그래도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이 더 크잖아요.
언젠가는 옅어지더라도 그 마음의 온기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순진하고 순박한 바람을 모기영은 변함없이 품고 있습니다.
가장 마지막까지 그럴 거예요.
글 : 이정식
편집 디자인 : 강원중
2025년 3월 8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주간모기영에 바라는 점이나 아쉬운 점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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