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주간모기영 156호

[이정식의 시네마 분더카머]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2025.04.12 | 조회 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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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시네마 분더카머

🚪 스무 번째 방: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비극의 재현에 관하여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단어는 문제적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홀로카우스톤(holokauston, 전체+타다)에서 비롯되었는데, 풀이하자면 기독교의 신에게 몸 전체를 바치는 희생제물이라는 의미죠. 그렇게 아우슈비츠의 소각로는 하나님을 위한 제단이 되어버립니다. 언어가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다니요. 이런 이유로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학자도 있습니다. 조르조 아감벤이 대표적입니다. 그는 대신 히브리어 ‘쇼아’를 제안합니다. ‘재앙’, ‘파국’이라는 의미입니다. 두 단어 모두 사태의 실상을 적확하게 지시하지 않는 완곡어법이지만, 누군가의 악의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을 두고 하나님께 드려진 번제물 따위의 말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으로부터) 당한 심판, 재난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의 존엄을 지키는 쪽에 더 가까운 선택은 아닐지요. 괄호 속에 들어가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하게 아니라고 할 수가 없는 저 ‘하나님으로부터’라는 말이 몹시 사무치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쇼아는 미스터리이자 의문입니다. 인간이 어째서 같은 인간에게 그토록 잔인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와 그것을 (결과적으로) ’내버려두신’ 하나님을 향한 의문이 제게는 쇼아의 총합입니다. 이중 후자의 부분은 애석하게도 희생자도, 우리도 영영 그 답을 알아내지 못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희생자들의 고통에 함께 하셨다는 것만을 믿을 따름이지요. 어쩌면 남겨진 우리의 몫은, 이러한 쇼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함을 다짐하고, 그러한 재난을 통과한 공동체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데 힘써야 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 목표에 영화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쇼아를 다룬 모든 영화를 언급할 수는 없겠지만 쇼아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영화 몇 편을 소개하려 합니다. 가장 먼저 알랭 레네의 다큐멘터리 <밤과 안개>(1955)를 꼽을 수 있습니다. 알랭 레네는 쇼아 기록 영상과 생존자의 증언으로 다큐멘터리를 구성했습니다. 이것이 많은 이들에게 호평을 받은 것은, 영화가 보여준 적절한 거리감 때문이었습니다. 서사를 구성해 관객을 희생자와 동일시 되도록 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도 어떤 미적 기교 없이 쇼트들을 구성한 덕분입니다. 쇼아를 재현하는 데 있어 가장 윤리적인 엄정한 형식을 보여주는 영화로는 클로드 랑즈만의 <쇼아>입니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장장 10시간에 육박합니다. 그 시간을 그는 생존자, 사형 집행인 등을 인터뷰한 기록만으로 구성합니다.

영화 <밤과 안개>(알랭 레네, 1955), 영화 <쇼아>(클로드 랑즈만, 1985)
영화 <밤과 안개>(알랭 레네, 1955), 영화 <쇼아>(클로드 랑즈만, 1985)

 두 영화 모두 쇼아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다큐멘터리를 택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유명한 명제의 영향, 함부로 희생자의 고통을 재현할 수 없다는 선의가 배어있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가장 최근에 쇼아를 다룬 영화 조나단 글레이저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볼 수 있는 것 같고요. 아우슈비츠 수용소 담장 바로 옆에서 살고 있는 루돌프 회스 중령의 가정을 담은 이 영화에서 쇼아는 시각적으로는 어떤 윤곽과 흔적으로만, 나머지는 오로지 청각에 의해 드러납니다. 이를테면 회스 중령의 마당을 전경으로 찍을 때, 그 너머에 보이는 수용소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난다든지, 자녀들과 함께 호숫가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을 때 물줄기를 타고 흘러온 희생자의 뼈와 검은 재가 그들의 몸에 묻었다든지. 평화로운 그들의 가정의 실내로 불쑥 아우슈비츠의 비명이 넘어 들어온다든지.

   이러한 장면들은 분명 쇼아를 시각적 스펙타클로 재현하지 않겠다는 윤리가 작동되는 선택이었을 겁니다. 그러한 선의를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뜻밖의 지점에서 한가지 고민거리가 생겼는데요. 쇼아를 시각적 스펙타클로 재현하지 않겠다는 윤리적인 입장이, 결국 관객으로 하여금 사태의 외곽만을 보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 말입니다. 이 영화에서 관객은 아우슈비츠를 소리만으로 감각하고 인지합니다.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자행되고 일어났는지는 보지 못하고 알 수 없지요. 그렇다고 희생자들이 당한 고통을 관객이 알고 볼 수 있도록 재현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사태의 실상의 본질을 돌파하려는 선택보다 ‘재현 불가능성’이라는 거대한 명제 뒤로 서사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서사로 만들어도 아우슈비츠의 외부를 비추는 식의 조금은 안전한 선택을 내리는 몇몇 영화의 선택을 곱씹어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조나단 글레이저, 2024) 스틸컷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조나단 글레이저, 2024) 스틸컷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디디-위베르만의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이라는 책 때문입니다. 2001년 파리에서 사진사학자 클레망 셰루와 피에르 보놈의 사진전 <수용소의 기억, 나치 강제 수용소와 절멸 수용소 사진(1933~1999)>이 열렸는데요. 이 전시를 두고 영화 감독 클로드 랑즈만(<쇼아>의 그 감독)과 정신분석학자 제라르 바츠만, 문학자 엘리자베트 파뉴의 격렬한 논박문이 있었습니다. 그 전시에 포함된 단 네 장의 사진 때문입니다. 사진은 아우슈비츠의 시체처리반 ‘존더코만도’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찍은 수용소 내부의 모습인데요. 절멸수용소에 관한 증거사진은 이 네 장이 유일합니다. 나치 및 역사수정주의론자들은 절멸수용소의 존재를 끈질기게 부정하고 있지만 이 사진의 존재가 그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하지만 바츠만과 파뉴는 그 사진은 고통을 페티시화 하는 ‘외설적인 사진’이며,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비극은 절대적인 악이므로 상상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대상이라며 그 사진전을 비난합니다. 

   랑즈만, 바츠만, 파뉴와 같은 ‘재현 불가능 논리’에 의하면 아우슈비츠는 결코 재현되거나 상상될 수 없는 거대함 그 자체인데, 몇 개의 이미지 만으로 재현/재구성하려는 것 자체가 아우슈비츠에 대한 숱한 오류를 낳을 것이며, 피해자의 고통을 외설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지만, 디디-위베르만의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에 의하면 그러한 선택은 지적 태만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이미지가 단 네 점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을 끈질기게 응시함으로써 피해자의 고통을 더 적극적으로 사유하자고, 상상해보자고 힘주어 말합니다. 사유할 수 없기 때문에 사유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아우슈비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나치의 절멸 시도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겠냐며요.

   아우슈비츠를 영화로 보여주는 것은 가능할까요? 희생자의 존엄을 훼손하지 않는 윤리적인 입장에서,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거나 그 둘레만을 피상적으로 훑지 않으며, 그 심연까지 적확하게 가닿으며, 남은 자들에게 비극의 기억을 간직하게 하고, 그 공동체의 치유와 회복을 도와주는 영화는 가능한 일일까요? 모르긴 몰라도 그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쯤은 알 것 같습니다. 다만 그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영화, 그것을 추구하는 영화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이 장면만큼은 저는 영화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계단을 내려오던 회스 중령이 문득 구토한 이후 텅 빈 복도를 바라볼 때, 화면은 현재 아우슈비츠 박물관 내부를 비추는 장면으로 전환됩니다. 희생자들의 얼룩과 주인 없는 신발 무더기가 거기에 있습니다. 다시 회스 중령은 구토합니다. 그 순간 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허구와 사실을 건너뛰어 한데 뒤섞어 놓습니다. 그 구토는 무의식적 반응이었고, 어쩌면 회스는 구토 이후에도 자기 행위의 악함을 인지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같은 인간’으로 공유하는 연하고 여린 지점이 그 같은 사람 안에도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럼으로써 조나단 글레이저는 가해자의 얄팍한 도덕성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의 인간성을 보존한 셈입니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조나단 글레이저, 2024) 스틸컷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조나단 글레이저, 2024) 스틸컷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한강,『소년이 온다』, 창비, 2014, 114쪽. 

 

 영화가 비극을 재현할 때 지켜야할 윤리의 범주와 범위를 제시하는 건 제 역량을 넘어서는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소박하지만 진실된 목표 하나만은 언급하고 싶어요. 공동체의 치유와 회복은 참혹한 어둠만 응시해서도 안되고, 어둠을 괄호에 넣은 채 빛나는 것들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과 빛 모두를 함께 묶어야 한다는 것. 빛이 환하게 드리운 순간이 영화에 있다면, 그것은 어둠의 한복판을 통과해 나온 것이어야 한다는 것. 결코 그 어둠 자체에 빠지지 말 것. 모든 것을 무릅쓰고, 끈질기게 단 한 줌의 빛을 향해 나아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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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창한 봄에 무거운 주제와 영화를 언급하는 것이 좋은 일인지 많은 고민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어둠에 가까운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약하지만 은은한 빛쪽으로 나아가려는 것임을 발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한강의 이런 문장처럼요.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 한강, 『소년이 온다』, 창비, 2014, 213쪽.

 

 과거와 현재의 도움과 죽은 자와 산 자의 연대로 우리의 역사는 어둠을 향해 가는 것 같더라도 밝은 쪽에 이른다는 경험을 저희는 얼마전 경험했습니다. 주님께서 앞으로도 저희에게 밝은 은혜를 비추시기를 빕니다.

 


글 : 이정식
편집 디자인 : 강원중

2025년 4월 12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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