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일기장"
사춘기 무렵, 어디선가 도형들을 조합한 암호 문자를 접한 후, 일기를 그 문자로 썼던 기억이 납니다. 일기는 오롯이 나만의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불시에 읽힐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글을 쓸 때 살짝 행간을 남기는 습관도 비슷한 시기 시작된 것 같아요. 저에게 글쓰기는 누군가가 읽고 공감해주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완전히 파악되고 싶지는 않은, 자기모순과 싸우는 일입니다. 나의 글로 인해 혹시라도 타인이 받게 될 충격이나 오해, 즉,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소심함이 지배하는 현장이기도 하고요. 신변에 관한 글일수록 더욱 그렇죠. 대신, 글쓰기가 지닌 치유의 힘은 드러냄과 감춤의 기술 연마라는 다소 나르시시즘적인 즐거움으로 만나곤 합니다. 보이지 않는/의도치 못한 독자와 의미를 두고 게임을 하는 거죠.
그래서 『빈 일기』의 저자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의 글이 반가웠을 겁니다.
일기의 비밀스러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저자였지만, 그는 어머니가 남긴 일기장들을 열어보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책장에 빼곡히 꽂힌 일기장이 모두 비어있었거든요. 십 수년을 암환자로 살다가 쉰 넷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수수께끼와 숙제로 딸에게 남겼습니다. 모르몬 교도로 평생을 유타주에서 살았던 윌리엄스 가문의 여성들은 일기를 쓰고 기록을 남기는 전통을 갖고 있었어요. 엄마의 빈 일기장은 혹시 전통에 대한 도전이나 패러디였을까요. 윌리엄스 말대로, 마치 라우센버그의 <흰 그림>(1951)이나 존 케이지의 ‘침묵’ 처럼요. 생태보존 운동에 투신해 작가가 된 중년의 딸은 엄마가 돌아가신 그 나이가 되었을 때, 멈추어버린 엄마의 나이 숫자만큼의 에세이로 빈 일기장을 채워나갑니다.
마흔 다섯 번째 글, 암호처럼 전해 내려오다가 지금은 멸종한, 여성들의 문자 ‘누슈’에 관한 언급이 특히 마음에 남습니다. 고대 갑골문자 같기도 한 누슈(’여성들의 글‘이라는 의미)의 형상들은 새의 발자국을 닮았다고 저자는 말했어요. 수백 년 동안 중국 후난성 장융현 시골 마을에서 사용되던 여성들의 은밀한 서체랍니다. 남자가 아니어서 한자를 배우지 못했던 이 지역 여성들이 남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문자를 만들어 공유했던 건데요, 손으로 제본한 누슈 책자를 한 여자에게서 다음 여자에게, 딸이나 며느리, 가까운 친구들과 ’자매님들(의자매들)‘에게 선물하거나 부채의 접힌 면과 손수건과 전족을 동여맨 헝겊에 새겼다고 해요. 윌리엄스는 여자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항상 암호로 글을 써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의 어린 시절, 암호를 써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내 목소리’는 어떤 내용이었을까요? 사실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 번 이사를 하면서도 버리거나 불태우지 않고 아직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여전히 그 문자를 기억하고 있지만, 학창시절 이후 단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거든요. 그 시절의 저라면, 어른이 된 자신에게조차 해독되기를 거부할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한없이 유치찬란하거나 쓸데없이 조숙할지도 모를, 과거의 나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현재의 거부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그 아이도 지금의 저를 만나고 싶지 않겠지요.:)
매일 열심히 썼지만 스스로와의 소통마저 거부하는 제 일기장은 아직 그렇게, 가득한 채 비어있습니다. 딸이 그 시절 제 나이를 훌쩍 넘어섰는데도 말이죠.
장프로의 <환상의 마로나 Marona’s Fantastic Tale>(2019)
강아지 마로나가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
모기영 장다나 프로그래머가 추천합니다.
❤ 정기후원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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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뉴스레터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은 빈 일기장 대신 빈 투표용지를 채워야 할 시간이 불과 몇 시간 남지 않았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이 글을 받아보실 때는 이미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난 후이겠지요. 감히 예측하기도 겁이 나지만, 이럴 때는 유명한 영화 대사가 콩알만큼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그나저나 이 영화가 벌써 8년 전이라니요...ㅠ 잠시 깜짝 놀라고 가겠습니다...^^;;)
요즘 같아선 과연 답이 있기나 한 걸까 자꾸 되묻게 되지만,
우리가 너무 소모적인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여전히 간절합니다.
암호 같은 ‘누슈’를 공유하고
모기영의 빈 일기장을 함께 채워나갈
친구님들을 기다리며,
그리스도의 평안을 빕니다.
2022.3.12.토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수석프로그래머 최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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