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주간모기영 195호

[이정식의 밀플뢰르] 영화 <북샵>(2021)

2026.05.23 | 조회 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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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식의 밀플뢰르]

<북샵>(이자벨 코이젯트, 2021) :당신 곁으로 향하는 느린 걸음

 

몇 해 전 겪었던 신비로운 하루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2021년 어느 가을, 아내와 저는 양재의 어느 식당에서 저녁 식사 후 산책했습니다. 적당히 서늘한 바람이 등을 어루만지던, 걷기 좋은 날씨였어요. 그러다 최근에 알게 된 서점을 보여주고 싶어 그쪽으로 데려갔습니다. 문을 여는 순간 흠칫하고 말았습니다. 책을 읽던 한강 작가님과 눈이 마주쳐서요. 네, 그곳은 한강 작가님이 운영하던 ‘책방, 오늘’이었습니다.(현재 한강 작가님은 책방 운영에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오랜 시간 그녀의 열렬한 탐독자였던 저의 호들갑이 작가님의 고요를 깨트릴까 봐 침착함을 가장하고 저는 아내와 책 구경을 했습니다. 계산대에 있던 직원이 묻더군요. “피아노 연주를 해드릴게요. 단어 하나를 적어주시겠어요?” 마침 서점 안 피아노 앞에, 준비되었다는 듯 젊은 청년이 앉아있었습니다. 한강 작가님도 웃으며 말을 건넸습니다. “편하게 적어 주세요.” 작은 조각 카드를 받아들고 저는 고민하다가 적었습니다. “하얗다.” 그리고 시작된 피아노 연주. 투명한 구슬이 얼음 위를 구르는 것처럼 침묵 사이로 멜로디는 톡톡 튀어 올랐고, 지난 시간의 얼룩을 표백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연주 안에서, 저와 아내, 작가님과 서점 직원, 연주자 5명이 느슨하게 연결되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던, 신비로운 하루였습니다.

평소 한강 작가님의 애독자라면 그녀의 꿈이 서점을 여는 것이라는 걸 알았을 거예요. 

누구에게나, 실현 가능하지는 않으나 생각하는 것만으로 즐겁기 때문에 꿈꿔보는 일들이 한두 가지쯤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서점을 하나 여는 것이다. (…) 그 서점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매주 금요일 밤 8시 30분부터 열리는 소설과 시 낭송회다. 공간이 그다지 넓지 않으니, 책장과 책장 사이의 가운데 공간에 접이 의자 40석만 놓을 것이다. 낭송이라면 으레 시 낭송을 떠올리지만, 시보다 오히려 흡인력 있는 것이 소설 낭송이다.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열림원, 119-120쪽) 

꽤 구체적이고 분명한 목표죠. 서점을 열고 낭송회를 갖는 것이 그녀의 목표인 건 이런 경험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아이오와 시절, 한 달에 대여섯 차례씩 돌아오던 낭송회를 기억한다. 강당이나 강당이나 서점에 빼곡히 들어찬, 시와 소설 낭송을 듣기 위해 찾아온 학생들과 일반인들. 드라마틱 하기보다는 진지한 낭송, 몰입한 청중들. 그 고요와 긴장, 목소리의 떨림. 우리나라에서도 그것이 가능했으면 하는 생각을 그때 했다. (…) 그렇게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정신이 허공에서 에너지로 만나는 순간, 텍스트와 목소리, 감정과 표정이 한 덩어리가 되는 순간을, 그 시절 그 숱한 낭송회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경험할 수 있었을까.(121-123쪽)

   서점을 통해 나누고 싶던 것이 따로 있었다는 것. 그것은 낭독자와 청중, 작가와 독자, 소리와 침묵, 정서와 떨림이 얽히면서 연결되는 시간, 속된 세상의 소음과 구분되는 서점 고유의 울림. 이토록 소박한(또는 원대한) 꿈에 공명한 저도 언젠가 서점을 운영해 보는 것이 은밀한 소원이기도 합니다. 

<북샵>(이자벨 코이젯트, 2021), [출처: KMDB]
<북샵>(이자벨 코이젯트, 2021), [출처: KMDB]

서점, 고급예술과 문학의 충돌

1950년대 영국의 어느 해안도시에서 작은 서점을 열겠다는 <북샵>의 주인공 플로렌스 그린(에밀리 모티머)도 비슷한 것 같아요. 책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려는 것보다 그저 느린 속도로 책을 읽고, 사유하며, 읽은 내용을 곱씹으며 산책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좋아 서점을 열게 된 여인이에요. 재미있는 것은, 그런 그녀의 결정에 대해 주위 사람들이 하나같이 ‘용기’있는 선택이라고 칭찬한다는 점입니다. 서점을 여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은 2026년 신자유주의의 자장 아래 속한 한국의 환경이 더 적절할 것 같긴 하지만요. 영화를 다 보면 플로렌스에게 용기가 필요했던 이유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되어요. 책이 안 팔릴까 봐 가 아니라, 그 지역 권력자인 바이올렛 가맛 부인(패트리시아 클락슨)에게 미움받을 용기였습니다. 반동인물인 가맛 부인은 이 지역에 필요한 것은 서점이 아니라 ‘아트 센터’(art centre) 임을 공공연하게 밝히죠. 아닌 게 아니라, 플로렌스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는 말합니다. “그곳은 아트센터였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것이 가맛 부인의 단순한 희망사항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끈질기게 서점 운영을 방해합니다. 자신의 인맥,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해 먼저 그녀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법적, 제도적 허점을 파고들어 서점의 존재 조건을 부정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그녀가 내세운 법적 근거는 조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포착한 ‘빤한 악(무사유)’처럼이요. 플로렌스의 서점이 오래된 공간이었다는 것을 이용해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은 주민들을 위한 공간 외에는 사유화할 수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그 공간이 정말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공간인지를 따져봐야 하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정작 그 공간을 사유화하려는 사람은 가맛 부인이었죠. 명분은 공공을 위한 사업이었지만, 오히려 그곳에 그녀가 세우려는 아트센터는 그녀가 가진 계층적 위치를 더욱 공고화시켰을 겁니다. 

*여기서 가맛 부인의 ‘아트센터’(Art Centre)가 ‘문화센터’로 번역된 것은 지적해야 합니다. 한국 문화 안에서 ‘문화센터’는 예술, 혹은 문화를 실용적이고 대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공공시설이죠. 그러나 1950년대 영국에서 ‘아트 센터’는 지역 상류층을 위한 엘리트주의 예술만 취급함으로써 상류층의 문화적 우월감을 강조했습니다. ‘문화센터’는 이 두 단어의 뉘앙스를 섬세하게 고려하지 않은 번역어처럼 보입니다.

<북샵>(이자벨 코이젯트, 2021), [출처: KMDB]
<북샵>(이자벨 코이젯트, 2021), [출처: KMDB]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사회 구조의 계급적 층위를 폭로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가맛 부인이 이른바 ‘고급 취향’으로 범속한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구별 짓는’(부르디외) 사람이라면, 플로렌스 주변으로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녀는 하녀들이 쉬는 날 주로 입는다는 ‘적갈색’ 계통의 옷을 입고, 그녀의 서점에선 하층민의 딸 크리스틴이 일했죠. 이때 서점에 가장 많이 들여놓은 책이 시나 소설이라는 ‘문학’이라는 점은 상징적입니다. 그렇다면 플로렌스의 서점은 ‘문학’ 자체를 은유한다고도 여겨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엄정하게 생각하면, 문학 역시 당시 영국의 하층민과 노동자에게 진입장벽이 높았고, 고급 취향이라는 혐의를 받았던 예술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죠. 문학을 향유한다는 것은 단어를 해독할 수 있는 어휘력과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문해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이 고급 수용자만을 위함 예술이라는 것도 진실과 어긋납니다. 문학은 문학의 방식으로, 계층과 직위, 신분과 성별을 초월하여 여러 사람들과 연루되기 때문이에요. 

문학이 삶과 연루되는 방식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요. 문학은 어떤 방식으로 여러 사람들과 연루될까요? 떠오르는 몇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학평론가 김현 식대로 말하자면, ‘문학은 써먹을 수 없고, 바로 써먹을 수 없는 그 이유 때문에 인간에게 유용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김현,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국문학의 위상』) 가령 돈이나 지위같이 인간에게 쓸모 있고 유용한 것들이 실상 인간을 억압하지만, 써먹을 데 없는 문학은 적어도 인간을 착취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무딘 일상의식을 반성하게 하며,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억압받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거예요. 시간을 건너, 문학평론가 신형철 식대로 말하면 문학은 타인의 서사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신형철, 「스토리텔러로서의 시인—김상혁 시집 『다만 이야기만 남았네』,  『문학동네』) 이야기는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디폴트 세팅’으로부터 빠져나와 타인의 서사를 상상하게 만들어 준다고요. 이것을 그는 다른 글에서 ‘윤리학적 상상력’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습니다. 

<북샵>의 플로렌스는 문학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일을 알려줍니다. 고립된 이들을 바깥으로 나오게 만들어 타인과 연결되는 ‘용기’를 주는 일. 소위 ‘고급예술’이 철저한 구별짓기를 통해 하층민과 노동자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고립을 자처하는 것과 달리, 문학은 기꺼이 타인 곁으로 가는 용기, 나 자신의 속내를 타인에게 활짝 열어 보이는 용기를 사람에게 가져다줍니다. 그 용기의 메커니즘을 생각해 보는 일도 흥미롭습니다. 문학을 통해 독자는 작품 속 인물에 공감합니다. 공감을 통해, 나와 유사한 결핍과 정서를 가진 이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죠. 이 인식이 반복되면, 공감의 범위는 작품 바깥으로 나와 저자, 그리고 세계 속 타인에게로 점차 넓어지게 됩니다. 너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립니다. 타인은 괴물이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요. 각자의 계급, 직위, 신분, 성별, 취향의 차이를 가로질러 어느 누구라도 문학을 향유하는 한 하나의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음을 믿는 믿음과 관계된 것이기도 하네요.

<북샵>(이자벨 코이젯트, 2021), [출처: KMDB]
<북샵>(이자벨 코이젯트, 2021), [출처: KMDB]

그런데 저는, 이것이 문학만이 할 수 있는 특권 같은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영화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론 영화는 ‘이야기’로 환원할 수 없습니다. 영화적 문법(편집, 몽타주, 미장센 등)을 고려해야 하죠. 그렇다고 영화에 엄연히 있는 이야기적 요소를 모른 체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문학의 효용은 또 다른 이야기 매체라 할 수 있는 영화에도 성립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영화 역시, 일상에 몰두한 현대인들을 억압하는 것의 정체를 반성, 파악하게 하고(김현), 타인의 서사를 상상하게 만듭니다(신형철). 그렇게 길러진 공감 능력으로 우리는 영화의 캐릭터만이 아니라 현실의 타인까지 가닿으려 노력하죠. 그러므로 문학과 영화를 이렇게 정의할 수 있을 겁니다. 문학과 영화는 당신의 곁으로 향하는 느린 걸음이라고요.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우리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여기까지 적고서 글을 마무리하려니,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 영화제. 모기영이 하는 일의 의미를 이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어요. ‘모두를 위한 기독교 영화제’, 왜 우리는 이 일에 기꺼이 마음을 모으는 걸까요. 위악적으로 말해보자면, ‘고작’ 영화제일 뿐인데. 기독교 영화제의 효용이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제게 영화는 현실(일상)과는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크린은 다른 세계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창문이기도 하고, 그곳으로 건너갈 수 있는 문이기도 해요. 관객은 영화를 통해, 이 세계의 삶(나)과 저 세계의 삶(캐릭터)을 비교하게 되죠. 둘 중 누구의 삶이 아름다운지에 대해서요. 영화는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답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게 존재할 겁니다.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는 기독교적 가치를 제시하지만, 그것만이 정답이라며 관객에게 따라야 할 절대적 기준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이런 세계도 있다’고 소개해요. 그 소개로부터, 아직은 희박한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 저마다의 내면에 움트기를, 미세한 절단선이 관객 저마다의 내면에 고요하게 그어져 이전의 자기 세계와 단절하여 각자의 답을 내리기를 바라는 것이 모기영의 소박한 목표입니다. 그렇게 모기영은 가장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습니다.

<북샵>(이자벨 코이젯트, 2021), [출처: KMDB]
<북샵>(이자벨 코이젯트, 2021), [출처: KMDB]

*밀플뢰르(millefleurs)는 직역하면 ‘천 송이의 꽃’인데요. 14세기에서 16세기 초반까지 프랑스에서 융성했던 직조 방식으로, 벽걸이 양탄자에 작은 꽃들을 촘촘하게 배치해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한 영화를 보며 떠오른 사유와 정동과, 기독교적 필터를 거친 해석을 한계없이 나누고 싶다는 소망이 코너명에 담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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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식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6년 5월 23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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