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24. Eyes blue like the Atlantic

킬리언 머피

킬리언 머피는 아일랜드 출신 배우로 오묘한 분위기의 마스크와 깊고 푸른 눈이 특히 매력적인데요. 개봉 이후 여전히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오펜하이머>로 인해 입덕하는 분들이 더 많아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실 9월 레터로 생각해 둔 주제가 있었는데요. <오펜하이머>를 보고 주제를 후다닥 바꿔버리게 된 것도 킬리언 머피의 매력에 빠졌기 때문이거든요. (원래도 좋아하는 배우였지만 좀 더 깊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킬리언 머피는 법대를 다닌던 중 우연한 계기로 출연하게 된 연극 <디스코 픽스>가 호평을 받아 여러 나라를 돌며 순회공연을 하게 되면서 연기에 재미를 느끼고 진로를 변경하게 되었다고 해요. 인터뷰에 따르면 그때 함께 작업했던 동료들과는 지금까지도 가까이하는 오랜 친구로 남았다고 하니 <디스코 픽스>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배우 킬리언 머피’를 볼 수 없었을 것 같아요. 동명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기자의 길을 걷게 된 킬리언 머피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에서 인데요. <디스코 픽스>를 본 감독이 직접 주인공으로 발탁했다고 합니다.

이후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플루토에서 아침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같은 예술 영화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참여하며 필모그래피를 쌓아 나갔는데요. 개성 있는 마스크 덕분에 순진한 소년부터 사이코패스까지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 스펙트럼도 넓은 편입니다. <플루토에서 아침을>로 골든 글로브상 후보에,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과 <선샤인>으로 영국 독립영화상 후보로 지목되기도 했으며, <배트맨 비긴즈>로 영화평론가협회상 후보에도 오르는 등 연기력 역시 인정받았는데요. 최근 개봉한 <오펜하이머>에서도 완벽한 싱크로율과 연기력으로 제96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킬리언 머피는 연기력과 더불어 푸른 눈동자가 풍기는 오묘한 매력 때문에 팬들은 물론이고 감독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인데요. 그중에서도 킬리언 머피 눈동자 덕질의 1인자로 불리는 이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으로 킬리언은 놀란 감독의 페르소나로도 유명합니다. 실제로 <다크 나이트> 3부작을 시작으로 <인셉션>, <덩케르크>, <오펜하이머>까지 놀란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요. 국내 팬들 사이에서는 킬리언 머피가 놀람 감독의 애착인형이란 썰도 있을 만큼 놀란 감독은 킬리언 머피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내 왔는데요. 한 인터뷰에서 “*내가 하는 모든 영화에 킬리언 머피를 캐스팅할 수 있고, 내 경력의 남은 기간 동안 머피에게 기대어 살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 ”이라고 할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영화 <배트맨 비긴즈>에 킬리언 머피가 배트맨 역할로 오디션을 보면서 시작됐다고 해요. 킬리언은 본인이 배트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떤 역할로든 출연하고 싶어 지원했고, 놀란 역시 그가 배트맨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슈트를 입혀 카메라 테스트까지 받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를 메인 빌런인 닥터 크레인 역할로 캐스팅하여 이후 <다크 나이트>, <다크 나이트 라이즈>까지 3부작에 짧게라도 모두 출연시켰어요. 특히 놀란 감독은 킬리언 머피의 ‘눈’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닥터 크레인은 원작 설정상 안경을 써야 하는데 그의 눈을 담기 위해 안경을 벗는 장면을 만들어서 넣거나 본인이 직접 촬영 카메라를 들고 찍어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보통 특정 감독의 페르소나로 알려진 배우들은 많지만 유독 크리스토퍼 놀란과 킬리언 머피 사이의 일화가 유명한 것은 놀란 감독이 킬리언 머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내놓고 표현하기 때문인데요. <인셉션>에서는 시나리오가 완성된 후 킬리언에게 대본을 주고 마음에 드는 역할을 고르라고 한다거나, 함께 출연한 톰 하디와 킬리언 모두 스키 타는 장면을 찍어야 하는데 탈 줄 모른다고 하니 톰 하디에게는 왜 미리 말하지 않았냐며 불같이 화를 냈지만, 킬리언에게는 별말 없이 강사를 붙여주는 등 ‘킬리언 머피 한정’ 무한한 애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 팬으로서는 좋아하는 감독의 작품에서 좋아하는 배우를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이 즐거울 따름이기에 앞으로도 놀란 감독의 킬리언 덕질이 계속되길 바랍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켄 로치, 2006년 개봉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킬리언 머피를 처음 알게 된 작품이기도 한데요. 아일랜드 독립 전쟁과 내전을 배경으로 한 형제간의 갈등을 그린 켄 로치 감독의 작품입니다. 영화는 2006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제목은 부활절 봉기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한 젊은이의 운명을 노래한 19세기 아일랜드 시인 로버트 드와이어 조이스의 시에서 따왔다고 해요. 아일랜드인들은 이 시에 멜로디를 붙여 민요로 부르곤 한다는데요. 영화에서도 영국군에게 맞아 죽은 미하일의 장례식에서 할머니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켄 로치 감독은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며 자신의 신념을 일관되게 스크린에 구현해 온 영국의 대표 감독 중 한 사람인데요. 영화의 주제의식과 함께 그의 독특한 촬영 방식도 유명합니다. 켄 로치 감독은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주지 않고 매일 그날 찍을 분량만큼의 대본만 준다고 해요. 또 시간과 비용이 들더라도 시나리오 순서대로 촬영하기를 고집하고요. 이는 캐릭터가 겪는 사건을 시간 경과에 따라 찍으며 배우들이 영화 속 캐릭터와 자신을 일치시켜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요. 캐릭터 연구를 통해 나오는 연기가 아닌 즉각적인 반응을 통해 나오는 연기로 배우에게서 자연스럽고 깊이 있는 감정을 끌어내기 위한 켄 로치 감독만의 방법이라고 합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역시 같은 방법으로 촬영했다고 해요. 어떻게 보면 배우가 캐릭터를 분석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도 없고, 매일 쪽대본으로 촬영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오히려 몰입이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데요.  킬리언 머피는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에 대해 무언가가 느껴진다면 바로 그것을 역할로 승화시킬 수 있고,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닌 그 인물 자체가 되어 같은 과정을 겪게 되기 때문에 역할의 감정에 완벽하게 동의하게 된다* ”라고 밝히기도 했어요. 진정한 장인은 도구 탓을 하지 않듯 진정한 연기자는 대본이나 환경 탓을 하지 않는다 뭐 그런 느낌이려나요.😅

영화는 아일랜드 독립 전쟁과 내전을 다루고 있기에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감상하면 더 몰입해서 볼 수 있는데요. 1916년 부활절 기간에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 IRB(Irish Republican Brotherhood)와 IV(Irish Volunteers), ICA(Irish Citizen Army)가 주축이 되어 영국으로부터 아일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나지만 영국군에 의해 금방 진압되고, 사건을 주도한 ‘제임스 코널리’라는 인물이 처형당하는 것으로 일단락됩니다. 이후 1918년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아일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는 신페인당이 다수의 의석을 얻어 의회를 설립하고 아일랜드가 독립국임을 선언하는데요. 그러나 독립은 인정되지 않고 오히려 영국으로부터 더욱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IV가 ‘아일랜드 독립군’으로 알려진 IRA(Irish Republican Army)로 명칭을 바꾸고 본격적인 투쟁에 들어갑니다. 특히 1920년 아일랜드 남부 지역에서 게릴라 투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자, 영국은 휴전 협정을 맺고 북아일랜드 지역을 제외한 지역의 자치를 허용합니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지역을 제외한다는 조약을 두고 IRA 내부에서 조약에 찬성하는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고 이는 내전으로 번지게 됩니다. 내전 끝에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이 탄생하고 이후 영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얻어 아일랜드는 독립된 하나의 국가로, 북아일랜드 지역은 아일랜드 섬 내 영국령으로 남게 됩니다.

아일랜드의 독립투쟁은 역사적 사건이자 과거를 넘어 현재까지도 이어진다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이라는 나라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로 이루어진 연합 왕국으로 지금도 스코틀랜드나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곤 하니까요. 켄 로치 감독은 “역사는 언제나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일깨워 주는 중요한 테마”라고 밝히며, 영화를 통해 현재의 다른 사건들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요.

1920년 아일랜드. 젊은 의사 데미언은 런던의 병원에 일자리를 얻어 떠나던 날, 아일랜드인에 대한 영국군의 횡포를 목격하고 형 테디와 연인 시네이드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뛰어듭니다. 오랜 투쟁 끝에 아일랜드는 마침내 영국과 평화조약을 맺지만, 일부 지역의 자치만을 허용한다는 영국의 발표에 독립군 사이에는 대립이 생기고, 이로 인해 데미언은 형 테디와도 대립하며 연인 시네이드와의 애정에도 이상이 생기게 되는데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형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과의 관계에서 위기를 맞게 된 데미언의 선택과 그 선택이 불러올 운명의 끝은 어떻게 될까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은 아일랜드의 독립투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영화 속 주된 갈등 역시 영국군과 아일랜드 독립군 간의 갈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 구조는 영화가 진행 됨에 따라 변하기 시작해 아일랜드 내부의 갈등으로 바뀌게 되는데요. 영국과의 평화 협정에서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이 아닌 일부 지역을 자치령으로 남겨두고 영국 국왕에게 충성하겠다는 조약을 놓고 이에 동의하는 온건파와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강경파 사이의 갈등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갈등은 형제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져 형 테디는 온건파, 동생 데미언은 강경파에 서서 영국군을 향해 겨눴던 총부리를 서로에게 겨누게 되는데요. 두 형제의 선택과 갈등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영국군의 조건에 동의하는 온건파가 현실과 타협하는 쪽이라면 데미언이 선택한 강경파는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이라는 이상을 추구한 셈이죠.

데미언이 절친했던 동생을 밀고죄로 직접 처형하고 난 후에 했던 말인데요. 영국과의 갈등이 아일랜드 독립군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형제간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을 때도 결코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길 원했던 데미언의 의지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데미언에게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은 함께 자란 동생을 죽여야만 했고, 이후 자신의 죽음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간절하게 얻어야만 했던 것이라 생각하면 정치적 갈등에서 시작돼 동족 간의 갈등으로 번진 아일랜드 내전이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조국의 미래라는 무거운 주제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는데요. 씁쓸하지만 대부분 결말은 현실이 승리할 때가 많습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결말 그리고 실제 아일랜드 내전의 결과도 강경파의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1940년대 후반 헌법개정을 통해 아일랜드는 영국 왕권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게 되는데요. 이는 끝까지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포기하지 않았던 지난 과거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하면 영화의 결말이 마냥 씁쓸하게 느껴지지 만은 않았어요. 켄 로치 감독은 정치적인 주제와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노동자 계급,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어 왔는데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도 영국군이 아일랜드 독립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켄 로치 감독은 영국 출신이라는 거에요.😅 영국 감독이 아일랜드 독립군의 입장에서 영화를 만든 건데 반대로 출연한 배우들은 대부분 아일랜드 출신이란 것도 흥미로운 지점입니다.

오펜하이머 (Oppenheimer), 크리스토퍼 놀란, 2023년 개봉

<오펜하이머>는 개봉 이후 200만 관객을 넘기며 지금까지도 높은 예매율을 기록하고 있는 킬리언 머피의 가장 최근작입니다. 상영 중인 영화를 소개한 적은 한 번도 없음에도 킬리언 머피 특집에서 <오펜하이머>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추천작으로 선정하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리면서도 주연을 맡은 적은 없었던 킬리언 머피의 첫 주연작이기도 하니까요. 영화에는 킬리언 머피 이외에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맷 데이먼, 에밀리 블런트, 플로렌스 퓨, 조쉬 하트넷, 라미 말렉, 데인 드한, 캐네스 브래너, 케이시 애플렉, 게리 올드먼 등 손에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쟁쟁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놀란 감독이 장르로서는 처음으로 다루는 전기 영화로 미국의 핵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며 원자폭탄을 개발한 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데요. 영화는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집필한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바탕으로 합니다. 원작 도서는 한국어판 분량만 1천 페이지가 넘어가는 만큼,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집필되었는데 두 저자가 25년에 걸쳐 모은 오펜하이머의 개인 문서와 유품, 수천쪽에 달하는 FBI의 기록물과 녹취록, 100여 명 넘는 오펜하이머 주변인들의 인터뷰를 주된 자료로 삼았다고 해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평전부터 음악, 영화 등 여러 요소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스토리의 바탕이 된 것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지만 오펜하이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스팅이 냉전 시기 구소련 체제를 비판하며 불렀던 “Russians”의 가사였다고 해요. 가사에는 ‘How can I save my little boy from Oppenheimer’s deadly toy?’라는 구절이 있는데, ‘little boy’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무기의 이름을 의미합니다. 또한 오펜하이머와 대립하는 스트로스와의 관계성은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경쟁심리를 그린 영화 <아마데우스>를 참고하여 스토로스를 연기하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에게 ‘권모술수를 행할 때만 매력적인 캐릭터’를 연기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고요. 오펜하이머의 스타일은 데이비드 보위의 외양을 참고했는데 실제로 깡마른 체구를 가졌던 오펜하이머의 외모를 재현하되, 그의 고독함과 예민함은 보위 특유의 분위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오펜하이머>는 제작 과정에서부터 팬들의 호기심과 기대를 불러일으킨 작품인데요. 놀란 감독은 CG 사용을 지양하는 것으로 유명한 만큼 핵무기 개발을 다룬 전기 영화 제작 소식이 알려지자, 이번에도 CG 없이 촬영할 것인가가 큰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CG 없이 트리니티 실험 장면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는 진짜 핵실험을 한 것은 아니고 재래식 폭약을 사용하여 비슷한 폭발 효과를 연출한 것이라고 해요.

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 개발을 위해 미국에서 비밀리에 진행된 ‘맨해튼 프로젝트’.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과학 파트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오펜하이머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던 과학자 동료들을 모아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갑니다. 마침내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하면서 원자폭탄 개발과 함께 2차 대전도 종식되자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며 언론과 대중들의 주목을 받지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손에서 대량살상 무기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데요. 물리학자로서의 명성과 인간으로서의 고뇌까지 모두 그린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대기가 펼쳐집니다.

발행인이 영화를 감상하는 패턴은 시놉시스를 읽어보고 흥미가 생기면 간략한 정보만 읽고 영화를 본 후 궁금했던 점은 추가로 더 찾아보곤 합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 만큼은 개봉 전부터 틈틈이 영화에 관한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던 작품이에요. 모태 문과생인 관계로 수많은 과학자와 물리학 이론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는 영화를 과연 제대로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됐거든요. 다행이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 내내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고 몰입해서 감상할 수 있었어요. 더불어 영원히 모른 체 살 것 같았던 과학 (지식까지는 아니고…) 상식도 얻을 수 있었고요. 아직 영화를 보지않았지만, 볼 계획이 있는 구독자분들께는 오펜하이머라는 인물과 원자폭탄의 원리 그리고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해 간단하게 찾아보고 감상하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영화는 크게 두 파트로 나뉘는데요. 오펜하이머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컬러 화면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연기한 스트로스 시점에서 진행되는 흑백 화면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두 시점이 교차하면서 오펜하이머의 시점에는 ‘핵분열’, 스트로스의 시점에는 ‘핵융합’이라는 타이틀이 짧게 표기되는데요. 이는 나중에 나오게 될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개발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원자폭탄은 핵분열 반응을 통해 만들어지고, 수소 폭탄은 핵융합 반응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원자폭탄 개발을 이끈 인물이 오펜하이머라면, 원자폭탄 개발 과정에서 발견된 현상을 발전시켜 만들게 된 수소폭탄과 미국의 수소폭탄 제조를 지지하며 위원회를 이끈 인물이 스트로스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핵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며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기여한 물리학자로 21살에 하버드를 2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할 만큼 명석했으며, 6개 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도 공부한 지 일주일 만에 네덜란드어로 강의하는 모습에 놀라워하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해요.) 하버드를 졸업한 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실험물리학을 공부했는데 자신은 이론물리학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독일의 괴팅겐 대학으로 옮겨가 본격적으로 이론 물리학을 공부하게 되는데요. 당시 괴팅겐은 양자역학의 본산으로 여겨지는 곳으로 그의 지도교수는 양자역학의 혁명을 주도했던 막스 보른이었습니다. 이후 버클리 대학에 교수로 임명되어 후학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발탁되게 됩니다. 영화를 통해 물리학자로서의 오펜하이머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현대 물리학의 혁명기로 불리는 시기에 그 중심지에서 공부하며 학위를 받았고, 이후 미국에서 이론물리학 발전을 이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러나 오펜하이머가 한 국가의 비밀 프로젝트를 맡아 과학자들을 이끄는 책임자로 임명된 것에 의문을 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실험물리학자도 아니고 대규모 연구진을 이끈 경험도 없으며 무엇보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중에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들이 다수였지만 정작 오펜하이머는 노벨상 수상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해요. 그럼에도 그가 책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펜하이머의 잠재력과 천재성을 알아본 그로브스 장군이 파트너로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로브스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려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이 아닌 지금까지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며 미지까지 잡아낼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오펜하이머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던 거죠. 특히 개성이 뚜렷한 과학자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었던 것도 오펜하이머의 강인한 리더십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임을 생각한다면 그로브스의 선구안에 감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영화에 그대로 묘사된 오펜하이머가 실제로 남긴 가장 유명한 말인데요.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 이후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개발에 회의를 느끼고 미국의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하면서 공산주의 스파이로 몰려 청문회에 불려 나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으며 원자폭탄 개발에 회의감을 드러낸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사실 원자폭탄 개발을 두고 사람들의 견해 역시 갈리는데요. 유럽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2차 대전을 종식시킨 구원이라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후 전 세계가 무기 개발 경쟁을 통해 끝없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게 한 재앙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원폭 개발의 중심에 있던 인물로서 자기 손에서 만들어진 무기가 앞으로 어떻게 쓰일 것이며, 이로 인해 세상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 오펜하이머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대사였어요.

영화에는 정말 많은 과학자가 등장하고 과학 상식을 전제로 하는 대사도 많은 데다 전기영화라는 점 때문에 자칫 어렵지 않을까 걱정될 수 있는데요. 극이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고, 인물과 인물 그리고 현재와 과거가 바뀔 때마다 이해하기 쉽도록 짜인 플롯 덕분에 영화를 따라가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과학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오펜하이머의 고뇌를 보며, 권력의 요구에 맞서 어떻게 자신의 신념을 지킬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보게 되는 작품이기도 했어요. 특히 인물 하나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대사들이 많았던 만큼 대사를 다시 곱씹어 보고 싶어 재관람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영화입니다.

Epilogue

‘누군가 ~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을 보게 하라’에 각종 단어를 조합해 활용하는 것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죠. 저는 ‘누군가 킬리언 머피의 매력을 묻거든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보게 하라’로 바꿔 말하고 싶을 만큼 이번 특집을 준비하면서 팬심이 한층 깊어졌는데요. <오펜하이머>에서의 완벽한 캐릭터 소화력은 재관람 욕구를 불러일으킬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킬리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장면을 볼 때마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미묘한 감정변화를 세밀하게 표현하는 배우로서의 강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왜 놀란 감독이 그토록 킬리언 머피의 눈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달까요. 무엇보다 앞으로의 작품활동이 더욱 기대되는 배우입니다.

📺 함께보면 좋은 추천 콘텐츠: <피키 블라인더스> 시리즈

<피키 블라인더스>는 영화에서는 좀처럼 주연으로 보기 힘든 킬리언 머피가 전 시즌 내내 주연으로서 극을 이끌며 갱스터로 완벽하게 변신해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다시 한번 입증한 작품입니다. 발행인도 소문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 보지는 못했는데요. 그동안 영화에서 봤던 것과는 또 다른 매력의 킬리언 머피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함께 보기 좋은 추천작으로 선정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후 사회적으로 혼란스럽던 시기, 영국 버밍엄에서 활동한 ‘피키 블라인더스’라는 범죄 조직과 조직을 이끄는 쉘비 가문의 이야기를 그린 시리즈로 시즌당 6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2013년 시즌1을 시작으로 시리즈는 시즌6를 끝으로 막을 내렸고, 후속 이야기는 영화 제작이 확정된 상태라고 합니다. <피키 블라인더스>는 매 시즌 완성도 높은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호평받았는데요. 1920년대 영국의 시대상을 정확하게 구현한 분위기와 스타일리시한 연출로 마니아층을 양산하며 사랑받은 만큼 주말 동안 작정하고 몰아보기 하기에도 좋을 것 같아요.

🔗소개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OTT

🔖 Reference (씨네아카이브 참고 자료 출처 표기방식)

씨네아카이브 수신에 동의하지 않으면 하단의 구독 취소하기(unsubscribe)를 눌러주세요🥹 구독을 해지 않은 경우 메일리를 통한 씨네아카이브 구독 및 수신에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이메일이 발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