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식의 밀플뢰르]
느린 걸음으로 당신에게 다가가는 두 가지 방법에 관하여
지난달 주간모기영에서 저는 이런 문장을 적었습니다. “문학과 영화는 당신의 곁으로 향하는 느린 걸음”과 같다고요. 인간 일반은 늘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것이 ‘디폴트 값’이지만, 이야기는 ‘타인의 서사를 상상’(신형철)하게 만들며, 공감 능력의 범위를 넓혀준다는 취지에서 적은 문장이었습니다. 그것은 느린 걸음처럼 더디게 이루어지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포기하지 말자는 의도도 들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영화죠. 작년 제7회 모기영의 개막작이기도 했으니까요. 방금 적은 위 명제를 주인공 빌(킬리언 머피)은 그대로 실천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타인의 곁을 향해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는 데 성공합니다. 상대방과 눈도 못 맞출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그는, 대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과 감응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을 가졌습니다. 영화는 친절하지만 직접적이지는 않은 방식으로, 어떻게 그가 기적과도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구체적이고 체계적이기까지 해서, 아예 ‘감응/공감의 매커니즘’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하나하나를 일별하고 싶은 충동이 이네요. 타인의 서사를 포착하는 폭넓은 공감 능력으로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고 싶은 겁니다. 그 구조를 느리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팀 밀란츠, 2024), [출처: KMDB]](https://cdn.maily.so/du/cff4every1/202606/1781862685930463.jpeg)
그전에 영화를 이해하는 데 중핵이 되는 정보를 짚어야 할 것 같군요. 영화는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수녀원 세탁소 사건’을 배음에 둡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곳은 1922년부터 1996년까지, 무려 74년동안 인권 유린이 일어난 장소예요. 고아, 미혼모 등 갈 곳 없는 젊은 여성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수용하여 극심한 노동을 떠안겼습니다. 석탄업으로 마을의 온기를 책임 지던 빌 펄롱은, 우연히 수녀원에서 한 소녀를 만납니다. “저희 좀 도와주세요. 강까지 데려다주세요. 대문까지만이라도요.” 빌은 소녀의 마음속 절실함과 다급함을, 두려움과 불안을 알아차립니다. 그렇게 공은 빌에게 넘어갔네요. 그녀를 도와줄 것인가, 모른 척할 것인가.
최은 부집행위원장님의 유려한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빌이 처한 상황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딸이 다섯이나 있는 아빠이자 수녀원 부설 학교의 학부모이고 수녀원을 주 거래처로 두고 있는 자수성가한 가장으로서 펄롱에게는 침묵해야 할 이유가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수녀원의 영향력이 마을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빌이 맞서 일어선다면 자칫 가족 전체의 생존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만약 빌이 침묵한다면 우리는 그를 도덕적으로 단죄할 수 있겠지만, 심정적으로 비난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최은 부집행위원장님은 이런 문장을 덧붙였네요.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즉, 딸이 다섯이나 있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으므로, 그에게는 침묵을 깨고 어린 소녀를 위해 행동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요컨대 빌이기 때문에, 가능한 선택이라는 거죠. 더 둘러가지 않고 말하겠습니다. 저는 빌이 그런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요인을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팀 밀란츠, 2024), [출처: KMDB]](https://cdn.maily.so/du/cff4every1/202606/1781862707688593.jpeg)
너의 윤곽을 바라보기
영화 내내 빌은 말수가 없습니다. 그는 말보다 주변의 공기와 기미로 소통하는 것에 더 능숙한 사람처럼 보여요. 그는 목소리 대신, 심연의 기척을 듣습니다. 그것을 영화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이 자주 타인을 ‘바라보는’ 위치에 두어요. 몇 가지 장면을 근거로 들 수 있습니다. 영화 초반부, 잠이 오지 않는 빌은 집 밖으로 난 창문 앞에 앉습니다. 자신의 시야만큼 커튼을 여니, 창문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프레임이 되네요. 그렇게 세상의 단면이 빌에게 포착됩니다. 거리의 술 취한 연인들, 가난한 이들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옵니다.
창문-프레임의 구도는 빌이 엄마를 볼 때도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빌은, 자신의 외투를 정성껏 닦는 엄마를 봅니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빌에게 침을 뱉었거든요. 그때 빌이 엄마를 보는 화면이 그전에 나온 창문-프레임과 구도적으로 동일합니다. 이어 빌은 그 집에서 함께 일하던 일꾼 네드와 엄마가 포옹을 나누는 모습을 보는데요. 여기에서도 창문-프레임은 다시 나옵니다. 빌은 타인의 아픔과 괴로움을 언어로 이해하기 전에, 풍경과 정서로 접속했습니다. 누군가의 고통, 눈물이 해석되기 전에, 내면 깊숙한 곳에 먼저 자리 잡은 것이죠. 세계의 부조화와 균열이 누군가에게는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하겠지만, 빌에게는 가장 명료하게 보였을 겁니다.
시몬 베유는 이러한 ‘바라보기’가 가능하려면 ‘주의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나아가 그는 주의력 자체에 영적 힘을 부여하기도 했죠. “가장 높은 단계에서의 주의력은 기도와 같다. 믿음과 사랑을 상정한다. 그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은 주의력은 기도이다.”(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157쪽) 그녀는 바라봐야만 구원을 얻는 모세의 ‘구리 뱀’을 언급하며, 기독교가 애초에 ‘바라봄’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주의 깊은 기다림은 하나님을 대할 때에도 가져야 할 태도라고도 덧붙이죠. 그러므로 ‘바라본다는 것’은 주체를 초월적이게 만들어준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늘 자신이기만 했던 스스로에게서 빠져나와, 타인과 하나님을 마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주의 깊은 바라봄 덕분입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팀 밀란츠, 2024), [출처: KMDB]](https://cdn.maily.so/du/cff4every1/202606/1781862726362810.jpeg)
그러므로 빌은 주의 깊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영화 초반부, 믹 시노트의 어린 아들, 디어미드가 땔감을 줍기 위해 도로를 위태롭게 걷고 있을 때, 그가 그에게 반복해서 물었던 질문 “괜찮아?”는 아이를 주의 깊게 봤기 때문이겠죠. 그는 마치 자기 손에 묻은 석탄의 검댕과 같은 세계의 얼룩을 바라봤습니다. 이 바라봄은, 세계의 문제와 아픔을 모두 꿰뚫어 보는 전지와 같은 개념은 아닐 겁니다. 바라보는 자는 세계의 윤곽을, 부조리한 어느 부조화만을 겨우 보겠죠. 대신 그는 그것으로 추측과 짐작을, 작은 편린을 붙잡고 어떤 종합을 이끌어 내려 할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이요.
너를, 나의 서사로 상상하기
상상은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타인의 입장에 서게 만들어요. 그러므로 그가 느낄법한 감정과 고통을, 때로는 행복을 짐작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시몬 베유에 의하면, 상상은 외려 의혹이 짙은 행위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상상은 끊임없이 타인을 ‘흡수통일’한다는 겁니다. 나는 너가 될 수 없어서, 너의 아픔을 모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아픔을 기준 삼아서 너의 고통의 강도와 정도를 짐작할 수밖에 없을텐데, 그 짐작이 ‘상상’이겠죠. 그러나 이 상상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시몬 베유의 입장입니다.
이 영화에 시몬 베유의 통찰을 대입하기에 주저되는 지점이 여기인데요. 사실 빌은, ‘타인의 서사를 상상하기’보다, ‘나의 서사를 상상’했거든요. 그가 소녀 세라를 구출해 낼 수 있던 것은, 그 자신이 어린 시절 위태로운 환경에 놓여있었고(그가 ‘나’ 같아 보였고), 세라가 사랑하는 엄마와 닮아 보였기 때문입니다(비록 엄마의 죽음을 막지 못했지만, 사랑하는 엄마를 닮은 그녀를 돌보는 일은 놓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빌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세라의 참혹한 환경을 바라볼수록, 그는 되려 자신의 비참한 어린 시절을 떠올렸죠. 빌은, 타인의 아픔을 자기에게 당겨와, 자신의 고통을 되짚어보고, 그것을 기준 삼아서 타인의 어려움을 짐작한 겁니다. 이것은 타인을 ‘흡수통일’한 것은 아닐까요? 이 공감의 방법은 윤리적으로 결백한 걸까요?
![<이처럼 사소한 것들>(팀 밀란츠, 2024), [출처: KMDB]](https://cdn.maily.so/du/cff4every1/202606/1781862745823037.jpeg)
이번에는 영국의 문학비평가 제임스 우드의 신간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에서 통찰을 빌려오겠습니다. 우드는 철학자 테드 코언의 『타인을 생각하기: 은유 재능에 관하여』를 인용하며, ‘은유 재능’이란 단순히 시적 은유를 생산하는 언어적 감각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설 속 등장인물과 동일시”하는 능력이라고 밝힙니다.(152쪽) 은유 재능이 있다는 것은, 타인을 나처럼 생각하는 것에 능숙하다는 것이죠.
그러니 빌의 상상은, 일종의 은유적 동일시가 작동한 겁니다. 타인의 세계를 자아로 흡수통일한 것이 아니라요, ‘나는 여자가 아니고, 아이를 가져본 적 없으며, 어딘가에 강압적으로 갇혀본 적도 없어서 네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를 조건 없이 환대하는 사람이 있을 때 삶에 행복이 깃든다는 것은 알고 있어. 내가 네게 그런 사람이 될게.’ 이런 감응 능력으로, 빌은 기꺼이 세라를 자신의 가족으로 맞아들입니다.
은유 ‘재능’이라 했지만, 정말 이것이 재능의 영역에 속한 것은 아닐 겁니다. 갈고 기르는 훈련에 더 가깝다는 말입니다. 저는 제임스 우드의 책을 읽으며, 그 대목에 밑줄을 긋고는 이렇게 메모했습니다. ‘성육신은 인류 최고의 은유다.’ 신이 인간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나의 아픔을 이해 못 할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깊은 위로를 받죠. 저는 영화의 이야기가 그려낸 은유적 동일시가, 혈육과 세대를, 시간을 건너간다는 점이 마음에 듭니다. 끊기지 않고 이어진다는 것이니까요. 이건 우리 기독교인이 가장 잘하는 일어야 하겠고요.
*밀플뢰르(millefleurs)는 직역하면 ‘천 송이의 꽃’인데요. 14세기에서 16세기 초반까지 프랑스에서 융성했던 직조 방식으로, 벽걸이 양탄자에 작은 꽃들을 촘촘하게 배치해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한 영화를 보며 떠오른 사유와 정동과, 기독교적 필터를 거친 해석을 한계없이 나누고 싶다는 소망이 코너명에 담겼습니다.
글 이정식
편집디자인 모기영 편집부
2026년 6월 20일 토요일
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주간모기영
주간모기영에 바라는 점이나 아쉬운 점 있으면
아래 버튼을 눌러 소중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
![▲ 필자의 다른 글 보기 [이미지 클릭]](https://cdn.maily.so/du/cff4every1/202603/1773981049838956.png)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