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그 시대의 사랑 / 독후감

2021.09.13 | 조회 1.39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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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의 고전 읽기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고전 문학 이야기

이미 오래전 영화로도 제작되어 꽤 인기를 끈 작품이다 보니,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고풍스러운 사랑 이야기라는 생각에 언젠가는 읽어보게 되겠지 싶어 미뤄두었어요. 그러던 중 이 소설로 작가가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는 설명을 보고는 ‘대체 어떤 소설이길래?’ 하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낯설고 새롭고 화려하면서도 보수적인 1870년대 미국의 상류층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웠고, 외부로 드러나는 우아함 뒤 암호처럼 얽혀있는 미묘한 태도와 언어, 예의범절과 사회적 규칙들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위트와 조소를 얹어 우아하게 풀어내는 문장들은 독보적이라고 느꼈어요. 아마도 당시 상류층에서 태어난 이디스 워튼이 자연스럽게 습득한 것들에 작가적인 관찰력과 필력이 더해진 결과일 것이라고 짐작해봅니다.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되는 ‘결혼’이라는 커다란 사회 관습에 거슬리는 것은 언제나 호락호락하지 않고, 시대를 불문하고 늘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은 잃을 것도, 감수하거나 희생해야 하는 것도 많은 법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아처의 안타까운 사랑은 그렇고 그런 뻔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결국 시대의 희생양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순수의 시대’의 마지막 남자, 아처와 그의 사랑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적어봅니다.

 

독후감은 객관적으로 전체 줄거리를 요약한다거나 주제를 명시하지 않고 그저 제 감상을 남깁니다. 제가 특히 언급하고 싶은 특정 부분에 대해서만 기록하기 때문에, 작품의 전반적인 정보를 다 설명하지 않습니다.

 

 

작가 이디스 워튼과 순수의 시대에 대한 간략 소개는 ↓

 

 

 

 

1. 이별 뒤 남은 것

아처와 엘렌이 만난 시기 모든 것은 전혀 그들의 사랑에 적합하지 않았고 그렇게 그들은 제대로 인연을 맺지 못한 채 헤어지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는 애초에 마음에 따라 행동할 수 없던 상황에서 사랑하게 된 둘이 서로 미묘하게 마음을 표현하고, 질투를 느끼기도 하고, 결국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인생에서 짧지만 폭풍처럼 강렬한 한때를 그려냅니다. 그리고 각자의 세월을 살고 풍파를 견딘 뒤늦은 중년의 나이에 다시 서로가 재회할 뻔했던 기회를 결국 흘려보내는 아처의 모습으로 마무리되죠. 책을 읽는 동안에는 아처와 엘렌이 서로에게 점차 빠져드는 과정에 많이 몰입했지만 가장 마음에 오래 남는 건 후반의 마지막 페이지들이었어요.

긴 인생에 비추어 보면 둘이 만나 잠시 마음을 확인했던 기간은 기껏해야 2년도 안 되는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어요.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을 못해 본 별것 아니었던 과거의 작은 사건 중 하나로 여길 법도 하지만 둘에게는 큰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변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말한 적 없지만, 그들을 잘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 인연이 소중했음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불장난 같은 것이 아니었음을 다들 짐작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들이 만났던 시절은 관습에 의한 사회적인 정답이 있던 때였고, 언제나 좋고 이상적인 것만을 보여주어야만 하던, 그 어떤 문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던 ‘순수의 시대’ 였죠. 더욱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상류층에 속해 있는 이상 내 처신 하나하나가 가족들과 주변인들에게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기 때문에 나만의 생각대로 행동하기는 더더욱 어렵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무시할 수 없던 아처는 뒤늦게 용기를 내보지만 결국 임신한 아내의 우아한 공격으로 인해 우아한 방식으로 완전히 패하게 됩니다. 그러고는 성실한 남편과 가장으로, 상류층의 인품 좋고 취향 좋은 영향력 있는 인사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일구어 나가며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가 놓친 것이 있다면 인생의 꽃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얻기 어렵고 가망 없는 것이어서, 복권에서 1등을 뽑지 못한 것처럼 놓쳤다고 절망스럽지도 않았다. 그의 복권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표가 있었지만 상은 딱 하나뿐이었으므로, 그 기회를 잡는다는 건 그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엘렌 올렌스카를 생각하면 책이나 그림 속 가공의 연인을 생각할 때처럼 막연하고 평온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그가 놓친 것 전부를 한데 뭉뚱그린 환상이 되었다. 희미하고 미약했으나, 그 환상 때문에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어 본 적이 없었다.

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 (민음사 p.425)

 

 

책에서는 이별 이후 그가 어떻게 견뎌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나오지 않아요. 폐쇄적이던 ‘순수의 시대’를 살아가며, 우아하고 똑똑한 아내와 결코 입 밖으로 그의 과거에 대해 언급하는 이 아무도 없는 우호적인 지인들에 둘러싸여 아픔을 표시조차 내지 못한 채 긴 세월을 견뎌내다 그것이 습관이 되고 일상이 되었을 거라고 짐작해 봅니다. 때로는 짧은 인연이었어도 관계의 상실이나 헤어짐이 오히려 그전에 함께 나눈 시간보다 삶에 더 큰 흔적을 남기기도 하는데, 이 둘에게도 이별 뒤 삶 역시 각자에게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모든 사람이 무언으로 합의한 시나리오 속에서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만을 뼈저리게 깨달으며 엘렌을 보낼 수밖에 없던 아처는 지켜내지 못한 사랑을 생각하며 얼마나 많은 나날을 좌절감 속에서 보냈을까요. 그저 일상에 기대어 그렇게 하루하루를 일궈나가며 점차 어른이 되어가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의 일상은 좌절이라는 모래 지반 위 쌓아가는 탑의 모습에 가까웠을 것이고 한때 희망했던 정서적인 교감을 이루는 파트너로서의 아내에 대한 기대는 완전히 접고 꿈꿔왔던 삶의 모습에 대한 기대 역시 진작 내려놨을 거예요. 어차피 엘렌이 아니라면 그런 교감을 이루는 결혼 생활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고, 평화스러운 가정을 위해서는 자신이 희생해야 하는 것도 많다는 것을 알았을 테죠. 그는 더 이상 열정을 향해 살지 않게 되었고 그저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로 살아갔어요.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지나 스스로 이야기하듯, 의무를 다 하는 성실한 결혼생활 역시 그 자체로 괜찮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는 성실한 남편이라는 평을 받았고, 메이가 막내를 간호하다가 옮은 폐렴으로 갑자기 죽었을 때에도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들이 함께 한 긴 세월을 통해 그는 결혼이 지루한 의무일지라도, 의무의 존엄성을 유지하는 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혼에서의 일탈은 추악한 욕정과의 투쟁이 될 뿐이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자시의 과거를 자랑스러이 여기는 한편으로 슬퍼했다. 어쨌거나 흘러간 옛날이 좋았다. 

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 (민음사 p.426)

 

 

엘렌에 대한 마음은 영원히 그의 속 어딘가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고, 누구나 그러하듯 그녀에 대한 미련 역시 끝내는 시간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겠지만 결국 그 인연이 그의 인생의 방향을 이끈 셈이 돼버렸죠. 그렇게 자신의 위치에서 성실하게 지내온 아처는 어느덧 50대 후반이 되었고, ‘남자라면 누구라도 살아볼 만한 삶 (p.425)’을 일구어 냈습니다. 아들의 요청으로 드디어 여행으로 가보게 된, 엘렌이 살고 있는 파리. 그곳에서 아들을 통해 다시 그녀의 이름을 듣게 되고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봅니다. 한때 상류층의 청년들 중 누구보다 깨어있고 순수한 정신을 지닌 그였지만 신세대인 자신의 아들을 보며 어느덧 자기는 그저 구식인 사람이 되었음을, 자신의 삶은 정서적으로 많이 피폐해져 있음을 깨닫게 되죠. 마음 한편에 영원한 기념 석상처럼 남아있던 엘렌이 갑자기 현실 속에서 이제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는 대상이 되었지만 복잡한 심경으로 반나절을 보낸 그는 결국 재회를 포기합니다.

세상은 그새 조금씩 변해 그가 젊었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졌고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자신의 아들이 한때 자기가 질투하고 미워하던 보포트의 딸과 결혼을 앞두고 있어요. 심지어 그의 두 번째 부인의 딸이라 예전 같았으면 스캔들이 크게 나고도 남았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두 팔 벌려 새로운 가족을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사업에서 크게 실패해 사회에서 거의 매장당하다시피 도망치듯 다른 곳으로 떠난 보포트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나름의 자리를 잡고 아무 문제 없이 평화롭게 자신의 삶을 일궈냈죠. 그렇게 세상은 변했고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벽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어요.

아처 자신은 엘렌을 마음속에 품고 그렇게 여전히 구식의 남자로 남아있는데, 엘렌은 끝내 세속적이기만 하던 과거 시대의 잣대에 맞추어 살기를 거부했고 영원히 남편에게는 돌아가지 않은 채 그녀 자신의 모습을 지켜냈습니다. 반면, 아처는 영혼 그대로를 투명하게 드러내던 과거의 자신에 비해 지금은 너무 달라졌다고 느꼈을 것 같고,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인정할 만한 삶이었음에도 막상 엘렌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자신의 모습이 자랑스럽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 누구도 아처가 잘못 살았다고 할 수 없을 거예요. 이별은 그에게 흔적을 남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삶의 방향을 바꿔버렸어요. 사랑 앞에서 용감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고,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어요. 그저 시대의 장벽에 부딪혀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픔을 최선을 다해 이겨내려 했던 그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지금은 그 끈이 다 한 과거의 인연을 떠올려봅니다. 아픔은 시간을 따라 무뎌지지만 영혼의 민낯을 내보이며 맺은 인연들은 마음속에서는 사라지지 않고 엘렌과 아처가 서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 모습을, 내 삶의 노선을 바꾸기도 하죠. 언젠가 먼 훗날 나 자신의 모습이 그래도 조금은 떳떳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2. 영화 ‘순수의 시대’

1870년대 화려한 미국 상류층의 모습이 흥미로우면서도 배경지식이 부족해 시각적으로 상상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며 한껏 호기심을 채울 수 있었어요.

1994년 제작되었으며 감독이 무려 마틴 스콜세지이고 출연진들 역시 초호화 캐스팅이네요. 고혹적인 미셸 파이퍼와 물망초처럼 싱그럽고 청초한 위노나 라이더, 연기의 스펙트럼이 어마하게 넓은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주요 인물들을 맡았어요. 책을 읽고 봐도 부족하다거나 아쉽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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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한결같은 빛을 발하는 고전 문학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어요.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작가의 작품, 너무 유명해서  마치 읽은 것 같지만 사실 들춰본 적도 없는 책, 어릴 때 아동용 요약본만 읽었던 책들, 그런 고전들 위주로 읽고 소개합니다.  

 

한달에 두세편의 작품을 소개하며, 한 작품당 두편의 뉴스레터가 발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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