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쓴' 작품 / 독후감

2021.10.12 | 조회 1.03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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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의 고전 읽기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고전 문학 이야기

유진 오닐이 노년에 마비가 된 손으로 힘겹게 쓴 이 마지막 작품은 그의 인생을 언제나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개인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아내 칼로타에 따르면 작가는 이 작품을 쓰는 동안에는 매번 수척해진 모습으로, 때로는 울어서 눈이 충혈되어 작업실에서 나오곤 했습니다. 마음 한편 묻어둔 과거의 상처를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을 텐데, 자기에게 큰 아픔을 주었고 그리고 서로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던 가족의 모습을 생각하고, 평생을 마음속 커다란 돌덩이처럼 끌고 다녔을 자신의 상처를 헤집어 들여다보며 재편집해 기록으로 남기는 그 과정은 상상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겠죠. 작가도 책 앞머리 칼로타에게 남긴 헌사에 ‘눈물로, 피로 쓴 이야기’라고 표현하기도 했어요.

이 작품은 가족들의 길고 긴 고통스러운 하루를 보여주며 각각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나름의 속 사정과 슬픔을 헤아립니다. 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오히려 유진의 마음을 더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묻어두었던 과거를 결국 돌아보며 아픔과 애증, 원망 등 복합적인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드러내어 지극히 작가다운 방식으로 오래 묵혀둔 한 페이지를 넘기려 한 것이 그 자신의 바람이었다면, 그렇게 이 작품이 그에게는 일종의 처절한 자서전과 같은 의미였다면, 그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게 커다란 슬픔 속에서 지냈을지를 살피는 것이 어쩌면 이 작품을 대하는 독자의 역할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작가가 끝내 용기 내어 다시 들춰보고 결국 정리해낸 자기 자신의 삶의 근원이자 커다란 상처에 대해 제 나름 느낀 것들을 좀 더 적어봅니다.

 

 

독후감은 객관적으로 전체 줄거리를 요약한다거나 주제를 명시하지 않고 그저 제 감상을 남깁니다. 제가 특히 언급하고 싶은 특정 부분에 대해서만 기록하기 때문에, 작품의 전반적인 정보를 다 설명하지 않습니다.

 

작가 유진 오닐과 밤으로의 긴 여로에 대한 간략 소개는 ↓

 

유진 오닐이 말년에 긴 시간을 은둔했던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타오 하우스. 밤으로의 긴 여로를 집필한 장소이기도 하며 현재는 유진 오닐 재단 건물이자 박물관으로 사용 중
유진 오닐이 말년에 긴 시간을 은둔했던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타오 하우스. 밤으로의 긴 여로를 집필한 장소이기도 하며 현재는 유진 오닐 재단 건물이자 박물관으로 사용 중

 

1. 길고 긴 하루들로 이어진 일상

숨 막힐 듯 갑갑하고 고통스러운 하루를 보내는 티론 가족의 모습을 보며 정서적으로 너무 강렬하게 압도되어 많지 않은 분량임에도 한 번에 다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후반부에서는 이미 저도 극에 나오는 티론이나 제이미, 에드몬드만큼 지칠 때로 지쳐 글을 그저 눈으로 훑듯 끝내버렸습니다. 하지만 그 상태로 그냥 지나쳐 버리기에는 너무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고, 극 중에 등장하는 막내 에드몬드가 작가의 모습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구두쇠 티론의 캐릭터는 제 머릿속에 몇 날 며칠 들러붙어 떨쳐낼 수가 없었어요. 처음 읽었을 때는 이 가정의 모든 불행은 티론 때문이라고 단정 지었고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 괜히 저까지 괴로웠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생전에 절대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했고, 좀 더 정확하게는 ‘자신의 사후 25년간 출판하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즉 작가는 이 작품을 결코 무대에 올릴 생각이 없었다고 하는 의견이 있는데 저도 그 견해에 동의하는 쪽이에요. 사후 25년이라는 것은 그저 자신이 잊힐법한 시간으로 정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 기간 동안 자신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지고 이 작품도 잊힌다면 오히려 역사 속에 그냥 묻어둬도 좋겠다 싶었겠죠. 긴 세월 후 여전히 누군가가 자기를 기억하고 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겠다고 한다면 그제야 책을 펴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여긴 게 아닐까요. 아마도 그가 상상한 것은 수십 년 후 이 책이 출간된다 하더라도 기껏해야 잔잔하게 화제가 되는 정도였나 봅니다. 그렇게 자기가 죽은 뒤 25년이 지나고서도 만약 출판이 된다면, 이미 이 작품을 무대에까지 올리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었을 것도 같아요. 이렇게 생각해 보니, 그는 끝까지 위대한 작가로서의 운명을 실감하지 못한 듯하네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이 희곡을 무대에 극으로 올리는 것은 그의 바람이나 의도가 전혀 아니었겠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나니 유난히도 지문을 세세하고 섬세하게 쓴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지문들이 사실상 극연출을 위한 지침이라고 보기에는 막연한 표현들과 소설에 가까운 서술이 많았거든요. 오닐이 다루는 장르가 희곡이었기 때문에 그 틀 안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낸 것일 뿐, 그가 주로 산문이나 소설을 쓰는 작가였다면 그런 형식의 글을 썼을 것이고 미술가나 음악가였다면 그에 맞는 모습으로 이야기를 풀어냈겠죠. 그래서 이 작품만큼은 희곡임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무대 위 극을 보지 않고 글로만 읽어도 이미 충분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

이런 생각에 다다르고 나니 다시 읽을 때에는 아무래도 많은 정보가 담긴 지문과 막내 에드몬드의 모습에 좀 더 시선이 많이 갔고, 처음 읽을 때 강렬하게 느낀 구두쇠 티론에 대한 미움 때문에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메리의 모습과 작가 유진 오닐이 실제로 견뎌내었을 어린 시절 일상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단점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언제나 가장 큰 단점만이 눈에 띄고 그래서 그 엄청난 단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자잘한 단점들을 아예 가려버리기도 합니다. 눈에 크게 띄는 신체적인 결함이 있다면 마치 그 부분만 제하면 다른 건 완벽한 사람이라고 쉽게 치부해버리는 것처럼요. 살다 보면 언제나 걱정거리는 여러 가지 있지만 보통은 가장 시급하거나 가장 큰 괴로움에 집중하게 되죠. 처참하고 불행한 가정생활에서 유진 또한 어느 기간 동안은 그랬을 듯해요. 모르핀에 중독된 어머니의 존재감이 너무 컸기에 아버지가 술을 많이 마시는 것도, 형이 늘 밖으로 나돌며 제대로 된 일을 구하지도 못하고 마음을 잡지 못하는 것 모두 오히려 큰 신경을 안 쓸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아니면 그저 다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죠. 순회공연을 다니는 배우 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이, 우리 식으로 치자면 작은 여관방 같은 호텔 방을 전전하며 살았고, 작가의 어머니 엘라는 호텔방 살이를 하며 아들 둘을 키웠어요. 그리고 유진은 작은 호텔 방 안에서 모르핀 중독이 된 어머니의 모습을 견디며 일상을 보내야 했습니다. 소박한 여름 별장이 하나 있긴 했지만 거기에서 지낼 때도 생활이 크게 다르진 않았을 거예요. 어차피 일 년에 겨우 한번 다녀가는 곳인데다 정착해서 사는 곳이 아니니 제대로 된 친구나 이웃을 만들 수 없었겠죠.

책에 묘사된 메리를 보며 항상 어디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끊임없이 과거를 되씹고 아버지를 비난하고 자신의 사랑을 끝없이 이야기했을 오닐의 어머니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작가가 좀 더 자라 형과 밖에 나가서 사창가를 다니고 술을 마시며 늘 반쯤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지내며 끈끈한 형제애로 벼터내도 집에 올 때쯤이면 언제나 지금은 엄마가 주무시고 있을까, 아빠랑 또 싸우는 건 아닐까 아빠가 혹시 술 마시고 안 들어 온건 아닐까, 그래서 엄마가 더 외로워 혼자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습관처럼 생각하곤 했겠죠. 매일매일을 얼마나 긴장과 불안감 속에서 살았을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치매 환자가 아무 말이나 하듯 약에 취한 어머니가 무의미하게 내뱉곤 했을 말들을 그냥 듣고 있을 수만은 없어 때때로 서로 말대꾸를 하기도 하고 온 가족이 서슴없이 상처를 주는 시간들도 아주 많았겠죠. 그리고 그런 대화 중에 오닐이 태어나면서 겪은 산후통을 치료하려다 엄마가 모르핀에 중독되었다는 것도, 그래서 자신이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을 뻔했다는 말도 분명 들은 적이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난과 나쁜 말의 함정은 언제나 좋은 말보다 강렬하고 생명력이 길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결코 진실이 아닌 걸 알아도 상처를 받게 되면 그 말은 진실 여부에 상관없이 비수가 되어 영원히 마음속에 꽂히게 됩니다.

 

 

메리  (…)유진을 두고 떠난 걸로 난 다시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는 여자란 걸 증명한 셈이니 다시 아이를 가지면 천벌을 받게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에드먼드를 낳지 말았어야 했어요.
티론(불안하게 앞 응접실을 흘낏 보면서) 메리! 말조심해요. 그 애가 들으면 당신이 자기를 원하지 않았던 걸로 오해하겠어. 그러잖아도 몸도 안 좋은 앤데……
메리(격하게) 말도 안 돼요! 난 그 애를 원했어요! 이 세상 무엇보다도! 당신은 몰라요! 그 애가 불쌍에서 한 소리였다고요. 그 앤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어요.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고. 건강하게 살지도 못할 거예요. 그 앤 너무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게 태어났어요. 내 잘못으로.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p.103)

 

 

어느 순간 어머니의 모르핀 중독은 결국 아버지와, 그리고 자신들의 불안정한 떠돌이 삶의 형태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아버지의 무지하면서도 지독하게 돈을 아끼는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기도 했을 테죠. 얼마나 많은 나날을 가족 간의 싸움과 우울함, 자기혐오, 무력감, 가족에 대한 미움과 증오, 애증으로 보냈을까요. 가끔은 너무 힘들어 어머니에게 속을 털어놓고 속상함을 이야기해 봤자 극 속의 메리처럼 단박에 피해자의 입장을 취하며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말들을 되돌려 받을 뿐이었을 거예요.

이 책에 묘사된 길고 긴 하루는, 끝내 평안한 잠을 청하는 밤에 이르지 못한 채 '밤으로의 긴 여로' 중간에서 끝납니다. 유진 오닐이 청소년기까지 계속 되어온 일상이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면 그가 한때 알코올 중독에 빠졌던 것보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작가가 된 것이 더 놀랍게 느껴질 정도예요.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우울하고 슬픈 이들의 고뇌를 글로 표현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해방구이자 위로의 수단이었기를 바라봅니다.

 

 

전 안갯속에 있고 싶었어요. 정원을 반만 내려가도 이 집은 보이지 않죠. 여기에 집에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죠. 이 동네 다른 집들도요. 지척을 구분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았죠.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들렸어요.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하던 거였죠. 진실은 진실이 아니고 인생은 스스로에게서 숨을 수 있는, 그런 다른 세상에 저 홀로 있는 거요. (…) 안개와 바다가 마치 하나인 것 같았죠. 그래서 바다 밑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오래전에 익사한 것처럼. 전 안개의 일부가 된 유령이고 안개는 바다의 유령인 것처럼. 유령 속의 유령이 되어 있으니 끝내주게 마음이 편안하더라고요.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p.160)

 

 

 

2. 같은 언어로 이야기한다는 것

아무것도 모른 채 태어나 온전한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꽤 긴 시간을 부모님의 보살핌과 영향력 아래에서, 형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지내면서도 어느 순간 성인이 되어 돌아보면 가족들과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나의 관심사, 나의 유머, 나의 가장 큰 애착은 가족보다는 오히려 친구들과 더 긴밀하게 나눌 수 있죠. 때때로 가장 가까운 가족들 사이에서 내가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에 한없이 외로운 감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이가 들어 독립한 뒤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들도 많아지죠.

친구나 지인들과도 마찬가지의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오랜 기간을 알고 지냈지만 여전히 결정적인 어떤 부분을 서로 공감하지 못하고, 어떤 이와는 오늘 처음 만났지만 같은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갑자기 많은 부분을 나눌 수 있게 되기도 하죠.

이 책에서 서로에게 신랄하게 비난을 퍼붓는 네 가족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느꼈어요. 사창가를 들락거리고 술에 빠져 사는 형 제이미조차도 시를 읽고 문학을 가까이하며 동생 에드몬드에게 시인들을 알려주기도 하고, 아버지 티론은 아이들의 문학 취향을 이해하지 못하며 비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 셰익스피어를 떠올립니다. 이렇게 그들은 문학으로 소통하며 싸울 수 있는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사이였죠. 그래서 그토록 고통스럽고 괴로운 와중에도 많은 평화로운 가정에서 때때로 느끼곤 하는 단절감이나 고독함은 없었겠다는 생각도 들어 이상하게도 조금은 부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어요. 실제로 유진 오닐이 극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쓴 글들을 아버지에게 보여주며 평가와 조언을 얻기도 했었고 아버지 주변 극비평가들의 조언으로 하버드에서 강좌를 듣게 되기도 했어요. 그가 방황을 끝내고 자신의 일을 찾아내자 그때부터는 아버지와 취향이 맞던 안 맞던 같은 업계에 몸담으며 좀 더 정서적으로 공감대를 많이 형성할 수 있었겠죠. 그토록 불행한 모습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얻을 수 없는 가족과의 정서적인 교감과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세계의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는 행운이 주어졌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 행운 때문에 결국 가족 모두 서로 간의 사랑을 의심 없이 확신할 수 있던 것 아닐까요?

 

 

티론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반감이 생겨) 넌 시인 기질이 있지만 너무 병적이야! (억지 미소를 지으며) 빌어먹을 염세주의. 그러잖아도 우울한데. (한숨지어며) 그깟 삼류 나부랭이는 집어치우고 셰익스피어나 생각해. 셰익스피어 속에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명언은 거기 다 있지. (낭랑한 음성으로 인용한다.) “우리는 꿈같은 존재. 우리의 짧은 인생은 잠으로 완성되나니.”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p.160)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 조금 더 말하자면, 이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기에 적당한 거리감과 불통 역시 소중할 때가 있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긴 설명 없이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이해받는다는 느낌과 동시에 마찬가지로 저 사람의 깊은 속을 이미 짐작할 수 있고 나 또한 드러내지 않은 속을 이미 다 들킨다는 불편함을 안겨주기도 하니까요. 내 영혼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내가 평화롭지 못할 때 내 속을 가차 없이 들키는 것은 상당히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만약 둘 사이의 관계가 온전치 못할 때는 서로를 많은 설명 없이 들여다볼 수 있기에 배로 더 고통스럽기도 할 거예요.

극 중의 에드몬드와 어머니 메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서로 성향까지 닮아 서로의 내면을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어요. 아들의 불행을 아는 어머니는 슬퍼했고 현실의 삶을 더 이상 제정신으로 살 수 없어 약을 끊지 못하는 어머니의 괴로움을 아는 아들 역시 힘들어했어요.

조금은 멀리 있고 서로에게 무지한 것이 더 안정감을 줄 때도 있다는 걸 깨닫고 난 뒤부터는 가까운 사람들과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그 또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언제나 온전히 좋기만 한 것도, 나쁘기만 한 것도 없는 법이죠.

 

 

3. 티론과 에드몬드

이 책에서 창작이 많이 들어간 부분은 아마도 아버지와 마주 앉아 속 얘기를 하는 4막의 장면들이 아닐까 싶어요. 때때로 나누었던 대화에 대한 기억들을 바탕으로 노년에 이른 작가가 이제서야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장시간에 걸친 화해의 대화를 넣은 게 아닐까 생각해 봤어요. 제가 유진이었다면, 어머니에 대한 동정심을 글로 남길 때는 마음이 아리는 정도였겠으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아버지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돌려 문장을 만들어 나갈 때는 정말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 같아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하소연 그리고 아버지의 입으로 말하는, 아들이 상상해볼법 한 그의 속내와 후회들. 정제된 문장으로 둘이 서로 마음 속 이야기를 꺼내고 이해하는 장시간의 대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커다란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으로 얽힌다는 것은 의지와 상관이 없고 엄청난 미움을 느낀다고 해도 대체적으로는 스스로 깨닫지 못할 만큼 사랑하곤 합니다. 그 사랑에 대해 의심하고 당황스러울 만큼 혼란스러운 감정이기도 하죠. 기대와 바램이 크기 때문에 서운함과 실망도 크고 그런 감정들이 미움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가족에게서 정서적으로 벗어나고 싶어 안간힘을 쓰기도 해요. 내가 미워하는 마음조차 사실은 가족에게 얽혀있다는 반증이기에 인생의 초반 일이십 년을 평생 떠올리며 그 기억에서 완전히 독립할 방법을 찾거나 혹은 그 상처와 함께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찾고자 각자만의 방식으로 애를 쓰곤 하죠. 그리고 많은 경우 두 시도 모두 성공하지 못하곤 합니다.

과연 우리는 유진 오닐처럼 용감하게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요.

가정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운명에 처한 분들은 그 행운을 꼭 한껏 즐기시기를, 그리고 그렇지 못한 분들은 부디 유진 오닐을 통해 조금이 나마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전 인간으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요. 갈매기나 물고기였더라면 훨씬 좋았을 거예요. 인간이 되는 바람에 항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고, 진정으로 누구를 원하지도, 누가 진정으로 원하는 대상이 되지도 못하고, 어디 속하지도 못하고, 늘 조금은 죽음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 거죠!

유진 오닐, 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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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한결같은 빛을 발하는 고전 문학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어요.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작가의 작품, 너무 유명해서  마치 읽은 것 같지만 사실 들춰본 적도 없는 책, 어릴 때 아동용 요약본만 읽었던 책들, 그런 고전들 위주로 읽고 소개합니다.  

 

한달에 두세편의 작품을 소개하며, 한 작품당 두편의 뉴스레터가 발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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