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 고도를 기다리며, 사뮈엘 베케트

끝없는 기다림 / 독후감

2021.08.14 | 조회 1.76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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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의 고전 읽기

변치 않는 가치를 지닌 고전 문학 이야기

 

‘고도를 기다리며’는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도 안날 정도로 아주 오래전부터 제목만 알고 있던 작품이었어요. 처음 들으면 고도가 무슨 뜻인지 궁금해지고 사람 이름이라는 걸 알게 되고는 그게 맥락상 자연스럽긴 해도 신기하게 느껴지는, 워낙 특별해서 한번 들으면 잊기 힘든 제목이죠. 앞뒤 상황 전혀 모른 채 ‘절대 오지 않는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리는 이야기’라는 정도만 막연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기다림’이라는 마음, 기다리는 태도, 혹은 어떤 것을 희망하는 절실한 마음 상태에 대한 이야기인가 짐작하곤 했습니다.

가끔 미술 전시나 디지털 아트 전시, 또는 영화감독 인터뷰 등에서 작가들이 문학작품을 언급하기도 해 귀가 솔깃해질 때가 있습니다. 올해 찾은 전시회들 중 두 곳에서나 ‘고도를 기다리며’가 영감이 되었다는 작품들을 만나게 되었고 막연하게나마 제가 짐작했던 이 작품에 대한 느낌과 예술가들이 끝내 뭔가를 포기하지 못한 채 기다리는 듯 작업했을 모습을 떠올리게 되니 괜히 마음이 울컥해지기도 했어요. 저 역시 작년과 올해, 개인적인 일로 또 코로나 상황까지 겹쳐 무언가를 마냥 기다리는 것처럼 지내던 시간이 많아 더더욱 마음이 동했던 듯합니다. 그 전시들을 통해 문학가들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창작자들에게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영감을 제공하는 이 작품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제 나름의 숙제가 생겼었고, 드디어 읽게 된 이 작품의 감상을 기록해봅니다.

 

독후감은 객관적으로 전체 줄거리를 요약한다거나 주제를 명시하지 않고 그저 제 감상을 남깁니다. 제가 특히 언급하고 싶은 특정 부분에 대해서만 기록하기 때문에, 작품의 전반적인 정보를 다 설명하지 않습니다.

 

 

작가 사뮈엘 베케트와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간략 소개는 ↓

 

 

 

 

1. 고도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고도가 누구인지, 그를 기다리는 두 명에게 고도는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디디와 고고의 대화 내용을 통해 그들이 일종의 ‘탄원자’ (p.27)로 고도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했고 언젠가 고도가 온다면 그 무엇을 해결을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해결은 아니더라도 조언이라도 들어볼 만한,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모든 기억이 모호하듯 고도의 존재도 안갯속에 있는 것처럼 불분명해요. 고고와 디디가 정말 그에게 뭘 부탁했었는지, 사실 요청할만한 어떤 분명한 것이 있기는 한 건지, 그리고 고도라는 이가 문제를 해결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인지,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게 없어요.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고도가 올 것’이라는 게 가장 불확실해요. 아무래도 그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고, 심지어 저는 그가 존재하긴 하는 걸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거든요. 하루가 끝나갈 때 오늘 고도가 못 온다는 소식을 전하는 아이가 매번 나타나는 것으로 겨우 고도의 존재를 믿게 되었어요. 이렇게 그들은 그럼 내일 고도가 온다고 하니 또 내일도 그 다음날도 그를 기다리며 하루를 어찌어찌 살아내게 됩니다.

우리가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삶에 조금이나마 이유를 부여해 주는 것들을 떠올려 봅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삶의 이유가 있냐고 질문을 해온다면 아마도 사랑이나 희망, 혹은 의무나 책임감 같은 각자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들을 살아가는 힘이나 이유인 것 같다고 답할 수도 있을 테죠. 하지만 사실 그 이유라고 말하는 것을 매 순간 가열차게 생각하고 바라보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평소에는 자주 잊고 지내고, 때로는 그 추상적인 가치들을 그저 핑계 삼아 오늘을 내일로, 또 그 다음날로 연장해내기도 하죠.

고도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뭘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건 사실 우리가 삶의 목표나 이유, 의미를 명확히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것과도 비슷하다 싶어요. 종종 의미 있는 삶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지내지만, 사실상 매 순간 중요한 가치를 생각하며 지내지는 못하고, 디디와 고고가 자꾸만 지금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걸 잊듯이 그렇게 종종 망각 속에서 지금의 한 시절을 보내곤 합니다.

그리고 한편 달리 생각해 보면, 어쩌면 고도는 거창한 삶의 이유나 가치 보다 그저 한오라기 실낱같은 희망일지도 모르겠고, 반대로 고단한 삶을 평안하게 만들 생의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언젠가 고도가 드디어 약속 장소에 나타난다면 흥미진진하고 신나는 새로운 삶의 한 장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때까지의 이야기가 종결되고 마는 건 아닐까 싶거든요.  

 

에스트라공      우린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니냔 말이다.

블라디미르      묶여 있다고?

에스트라공      그래. 묶-여-있단 말이야.

블라디미르      묶여 있다니 어떻게?

에스트라공      손발이 다.

블라디미르      도대체 묶긴 누가 묶고, 누구에게 묶여 있다는 거야?

에스트라공      네가 말하는 그 작자에게.

블라디미르      고도에게? 고도에게 묶여 있다고? 무슨 소리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사이) 아직은 안 그렇다.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p.30~31)


 
 


2. 기다림

이 책에서는 사실 이름만 나오는 고도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두 남자를 더 눈여겨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변함없이 늘 같은 곳에서 비슷한 시간을 보내지만 지난 일에 대해서는 계속 기억이 엇갈리고 자꾸만 자기들이 현재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까먹곤 합니다. 둘 중 한 명이 가겠다고 하면 다른 한 명이 지금 고도를 기다리는 중이니 가면 안 된다고 서로 알려주곤 하죠.

시간을 보내며 나누는 두 남자의 우스꽝스러운 대화나 농담, 핀잔, 유희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전반에 깔린 우울함은 사라지질 않습니다. 또 하루가 시작되고 배는 고프고 신발은 불편하고 끝없이 지루해요. 고고는 어디에선가 꼭 한 번씩 얻어맞고 오기도 합니다. 마치 하루의 일과에 포함되어 있다는 듯, 그렇게 흠씬 두들겨 맞고 나면 이렇게 오늘도 이미 하루가 지났다며 그날의 가장 큰일이 지나간 것처럼 말하기까지 하죠. 지루하고 지쳐 낮잠을 자기도 하고 지나가는 여행자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하루의 끝이 되면 또 오늘도 기다리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고 다시 잠을 청하러 가며 내일 또 이곳에서 만날 것을 서로 약속합니다.

하염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버텨보다가도 문득 한 번씩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걸까, 내 인생은 그저 이러다가 끝나는 건가 허무함과 불안이 파도처럼 몰려올 때가 있죠. 고고와 디디는 심지어 그냥 죽어볼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진짜로 죽을 마음은 없습니다. 극의 마지막에서 역시나 또 이런 생활이 내일도 계속되고 고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내일은 정말 삶을 끝낼 것이라 말하지만 고도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을 직감하듯, 그들은 결국 내일도 또 그 다음날도 잘 버텨내어 살아갈 것임을 짐작할 수 있어요.

괴롭고 무의미하고 허무한 하루하루를 언제까지 계속 살아야 할까요? 이 지난한 생을 스스로 끝내는 걸 용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고통스러운 걸 잘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는 게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잠들어있는 것처럼, 멍하니 습관처럼 또 하루를 살고 그렇게 버티면서 아무 생각 없이 지내기도 하고, 때때로 아무 생각 없는 척을 해보기도 합니다. 일단 당장 주어진 하루를 살다 보면 언젠가는 또 조금 좋은 날들이 오겠지, 어느 날은 조금 더 행복하겠지 생각해 보기도 하고, 지금의 괴로움이 언젠가는 잊히겠지, 시간이 결국 해결해 주겠지 기대해보기도 합니다.

 

남들이 괴로워하는 동안에 나는 자고 있었을까? 지금도 나는 자고 있는 걸까? 내일 잠에서 깨어나면 오늘 일을 어떻게 말하게 될지? 내 친구 에스트라공과 함께 이 자리에서 밤이 올 때까지 고도를 기다렸다고 말하게 될까?(…)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무서운 산고를 겪고 구덩이 밑에서는 일꾼이 꿈속에서처럼 곡괭이질을 하고. 사람들은 서서히 늙어가고 하늘은 우리의 외침으로 가득하구나.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습관은 우리의 귀를 틀어막지. (에스트라공을 바라본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겠지. 그리고 말하겠지. 저 친구는 잠들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자게 내버려 두자고. (사이) 이 이상은 버틸 수가 없구나. (사이) 내가 무슨 말을 지껄였지?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블라디미르의 대사 / 민음사 p.152)


 

 

 

3. 럭키 - 살아있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고통을 스스로 짊어진다는 것

기이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포조와 럭키, 이 작품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인물들이에요. 마치 짐승을 부리듯 포조는 럭키의 목에 긴 끈을 매고 짐을 들게 하고 여행을 다닙니다. 하지만 극을 한참 따라가다 보면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을 것만 같은 포조와 불쌍하게만 여겨지는 럭키에 대해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겉모습은 마치 포조가 럭키를 옭아매고 있는 것 같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어쩌면 그냥 둘이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죠.

고고와 디디만 있던 덩그러니 황량한 장소에 이 둘이 나타나며 분위기가 반전되고 온갖 흥미로운 장면들이 연출되는데, 그중에 특히 저는 1막의 후반부가 많이 인상적이었어요.

무거운 트렁크를 계속 들고 있고, 아무런 굴욕감도 느끼지 못하는 듯 멍하니 있는 럭키에게 포조가 재롱을 부리라는 듯 춤을 추게 하고, 뒤이어 ‘생각을 해보라’고 합니다.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듯 럭키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큰소리로 오랫동안 정신없이 뱉어내고 듣는 사람들은 점점 괴로워해요. 결국 그들이 다시 강제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게 하자 럭키는 거의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무거운 트렁크를 손에 쥐여주자 갑자기 정신이 드는 듯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멀쩡해져서 걸어가게 됩니다.

하루하루 버티기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또는 그저 평안을 위해서 대부분의 시간에 우리는 각성이나 생각을 하지 않고 그저 습관처럼 하루하루를 버티곤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깊은 생각을 해보는 때도 있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되기도 하죠. 분명 내 속엔 많은 것들이 있는데 정작 그것들을 다듬어보려 하면 자꾸만 뫼비우스 띠처럼 상념들이 제자리를 맴돌기만 하고 도통 어떻게 이걸 정리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지 않던가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참 내뱉은 럭키처럼 고민도 상념도 고뇌도 사실은 꾸준한 연습이 없다면 무의미한 잡념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어요.

비록 알 수 없는 말만 내뱉었지만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진해 거의 기절하다시피 한 럭키를 다시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게 한 것은 늘 손에 습관처럼 들려있는 트렁크였어요. 그 무거운 짐이 없었다면 그는 정말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허무하고 정체된 것만 같은 지루한 삶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이 생생히 느껴질 때 살아있음을 느끼곤 합니다. 실제 삶에서 그래서 때로 우리는 스스로 괴로움을 자처하기도 하죠. 힘든 일을 놔버리지 못하고, 보고 싶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놔버리길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힘든 일을 잊기 위해 일상의 괴로움을 기꺼이 감내하곤 해요. 너무 큰 슬픔과 괴로움이 닥쳤을 때 오히려 습관화된 작은 괴로움들로 엮인 일상이 우리를 버티게 해주기도 합니다. 

 

알겠소. 진작에 그렇게 말할 것이지. 왜 저놈이 제 몸을 편하게 하지 않느냐 이 말이지? 어디 그 까닭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럴 권리가 없는 걸까? 그건 아니지. 그렇다면 그러고 싶지 않은 걸까? 그게 맞는 말이오. 그렇다면 왜 싫은 걸까? 
여러분, 내가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지.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포조의 대사 / 민음사 p.47)
2011년 산울림 소극장에서의 공연
2011년 산울림 소극장에서의 공연

 

 

 

4. 글을 닫으며

고고와 디디가 버텨내는 하루하루가 우리 삶의 모습 한 부분을 축소해서 보여주는 것 같아 읽는 동안 꽤나 쓸쓸했고 마지막에는 많이 울컥했어요. 내 삶의 평화로운 시간을, 그리운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될 시간을, 지금의 문제가 해결이 될 언젠가를, 그리고 쉽지 않은 지금을 지나 스스로 기대했던 어떤 경지에 다다를 순간을 믿어보며 버텨내는 삶, 그런 우리의 모습이 마치 거울처럼 이 책에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 같아 아프기도 했어요. 그나마 디디와 고고처럼 서로 의지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황량한 광야에서도 얼마든지 버텨낼 수 있는 게 또 우리들의 습성이니 다시 한번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쓸쓸하고 아픈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후반부에 디디로부터 조금 위로를 받았기에 그 대사를 옮기며 마무리합니다.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가를 따져보는 거란 말이다. 우린 다행히도 그걸 알고 있거든.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아니면 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다. (사이) 우린 약속을 지키러 나온 거야. 그거면 된 거다. 물론 우린 성인군자가 아니지만 그래도 약속을 지키러 나온 거란 말이다. 이 정도라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뮈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블라디미르의 대사 / 민음사 p.134)

 

 


 

올해 꼭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결심하게 했던 전시와 미술 작품 하나를 공유합니다. 

 

박주연 개인전 <언어 깃털 Other Feathers>, 아뜰리에 에르메스, 2021.3.26~6.6

 
 
 
 
 
 

 

또 다른 전시는 파주에 위치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진행했던 2021 아티스트 프로젝트 컬렉션 (2021.2.17~4.28)이었어요. 우정수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사진을 남기지 못해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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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한결같은 빛을 발하는 고전 문학을 통해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어요.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작가의 작품, 너무 유명해서  마치 읽은 것 같지만 사실 들춰본 적도 없는 책, 어릴 때 아동용 요약본만 읽었던 책들, 그런 고전들 위주로 읽고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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