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실리콘벨리 기업들이 '스토리텔러'를 찾는 채용 공고가 부쩍 잦아졌다는 뉴스(기사)가 SNS에서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AI가 날고 긴다한 들 사람의 마음을 여는 취약성(Vulnerability)까지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제가 최근에 꽤 처절하게 실패하며 다시 확인한, '내러티브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제 콘텐츠의 흥행 공식은 언제나 '결핍'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만든 콘텐츠 중 반응이 좋았던 것들은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전부 제 결핍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첫 직장에서 말을 더듬어서 스피치를 공부했고, 리더십은 커녕 사회성이 부족해서 중간관리자의 역할에 대해 연구했으며, 게으른데 이상은 높고 욕심은 엄청나게 많아 루틴과 뇌과학을 팠습니다. 시청자들에게 비타민이 아닌 '페인 킬러(진통제)'가 되어 그들의 아픈 곳을 정확히 건드렸기에 통했던 것이죠. 극복한 결핍의 서사는 콘텐츠 시장에서 저만의 무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가장 최근 10만 조회를 넘긴 영상(링크)도 마찬가지였습니다(이 영상 덕분에 현재 유튜브 구독자가 14,107명이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 찍먹만 하다 20~30대를 흘려보내는 가능성 중독자, 바로 저 자신의 이야기였으니까요. 20~30대를 결과 없이 방황해본, 결핍을 직접 통과한 사람만 쓸 수 있는 스토리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저는 이 성공 공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참담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나만 즐거웠던 '170억 투자 유치한 창업가' 인터뷰
객관적으로 완벽한 출연자였습니다. 명문대, 컨설팅펌, 증권사를 거쳐 창업 10년 차에 170억 규모의 투자 유치를 끌어낸 엘리트. 시청자들이 "대단하다"고 느끼기에 충분한 서사였고, 저 또한 그분의 사업 철학과 협상 기술이 영업 기밀 수준으로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무려 티져까지 있는 인터뷰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이분의 인사이트가 한 편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죠.
인터뷰 콘텐츠가 대부분 그렇듯 영상의 길이도 길어 영상 하나에 편집에 평소의 3배인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쏟았습니다(영상 링크). 가내수공업으로 혼자 영상을 만드는 1인 유튜버에게는 무모한 기획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전업 유튜버가 아니라 외주 작업과 글쓰기 클래스까지 병행하고 있으니 ROI가 전혀 안 나오는 작업이었습니다. 저같은 1인 기업에게는 시간이란 자원은 정말 귀하디 귀하지만, 좋아하니까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조회수와 클릭률이 바닥을 치고 일주일 동안 썸네일과 제목을 몇번이나 바꿔보았지만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날 밤, 저는 편의점으로 갔습니다. 흡연자였던 20대 초반에 애용하던 필립모리스와 비슷한 맛의 담배를 제미나이에게 추천받았습니다. 껌껌한 바닥에 쪼그려 앉아 울면서 담배를 피웠습니다. 마침내 저의 실패를 인정했죠. 담배는 술도 마시지 않는 제가 가장 처절하게 힘들 때 마지막으로 찾는 도피처였거든요. 최근에 핀 것은 3년 전이었고요.
실패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며칠을 고민해서 들여다보니 저는 '공급자 시선'에 갇혀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면 다른 사람들도 좋아할 줄 착각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이 필요한데, 제가 인터뷰라는 장르를 워낙에 좋아하고 인터뷰이를 동경하다 보니 그런 오류를 범했습니다.
제 인터뷰에는 독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완벽한 프로필의 인터뷰이 안에는 사실 저와 같은 산만함과 자주 무너진 루틴, 시작은 잘하지만 마무리는 못하는 고통이 존재했습니다. 그분이 저를 찾아온 이유도 "나와 비슷한 사람이 이미 해내고 있으니 나도 할 수 있겠다(티저 영상 링크)"는 동질감 때문이었죠. 저는 그 결핍을 꺼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170억'이라는 화려한 숫자에 눈이 멀어 제가 좋아하고 그분이 잘하는 것만 전달하려고 했죠.
시청자들은 그 영상을 보며 "와, 대단하다"고 생각했을지언정,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어"라는 몰입은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동경과 공감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구 대표'의 감각으로 묻는다는 것
지난 해 겨울부터 지식 큐레이터 전병근 님이 주최하시는 독서 모임 '오리진'에 참여하고 있는데요. 저는 이곳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었습니다. 사과, 감, 딸기를 정갈하게 깎은 과일 접시를 직접 내어주시는 호스트의 태도(심지어 호스트가 직접 모임 장소에 도착해 미리 깎아놓고 플레이팅), 그 어떤 이너서클도 존재하지 않는 수평적인 분위기. 그곳에서 저는 외부인이 아닌 '우리'라는 느낌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제가 인터뷰에서 시청자에게 느끼게 했어야 할 감각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다른 세계 사람이야"가 아니라 "나랑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같은 사람이네"라는 동질감 말입니다. 전병근 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가슴에 길게 남았습니다. 뒷풀이에 운이 좋게 딱 세 사람만 가게 된 기회에 인터뷰어의 태도에 대해 여쭈어 보았습니다(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인터뷰어 중에 한 명입니다 - 링크).
"인터뷰어는 '지구 대표'로 궁금한 것을 묻는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길고 자세히 그리고 진심을 담아 병근님은 인터뷰어의 태도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저 한 문장입니다. 사적인 호기심을 지구의 보편적인 궁금함으로 치환하는 것. 그것이 내러티브가 보편적일 때 나오는 힘인 것 같습니다. 저는 인터뷰를 할 때 저 자신의 호기심에만 집중하고 범용적으로 다루지 못했지요. 타인의 서사를 내 삶에 적용하는 '오픈소스'처럼 인터뷰를 다루되, '지구 대표'의 감각을 잃는 순간 아무리 좋은 인터뷰이도 힘을 잃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콘텐츠를 만들고 계신다면, 혹시 너무 완벽해 보이려다 독자와의 연결 고리를 스스로 끊고 계시지는 않나요? 저의 뼈아픈 경험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취약성을 드러낼 당신의 용기를 응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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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laland0222
경험에서 우러나온 인사이트가 너무 좋은 글이에요ㅠㅠ 내 실패가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만들고, 그게 또 누군가의 결핍에 도움이 되는 작가님의 서사는 모든 걸 다 할 것같은 AI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
생각스테이
라라랜드님, 안녕하세요! 우왓, 댓글 너무나 감사합니다.☺️ 실패가 저의 무기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이 기쁘더라고요. 남은 것은 더 빨리 실패하는 것일 뿐! 하핫. 라라랜드님 글도 응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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