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rnertable : 무거운 쇼핑백들

🎼  Luiz Bonfa 「Manhã de Carnaval」, 2005

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잘 지내셨나요?

저는 폭풍 같은 주말을 보냈습니다. 갑자기 이사가 결정되었거든요. 저는 동거인의 직장에서 시혜한 사택에 거주하고 있는데요. 인사이동과 함께 갑자기 살 곳을 옮기게 되었어요. 그렇게 (하필) 손 없는 날 새벽에 이사가 결정되었습니다. 무속 신앙마저 도와주지 않아서 업체 예약이 쉽지 않았고, 입주 청소를 부르는 건 일정상 사치였어요. 저와 동거인은 주말 내내 청소부가 되어 수많은 사람이 애정 없이 거쳐 간 오랜 집을 쓸고 닦느라 그만 녹초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책을 옮기는 건 정말 끔찍했습니다. 책방 문을 닫으며 직접 책을 다 포장했고, 부산으로 내려와서 책을 다 풀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같은 과정을 주말 내 마치면서 정말이지 물건과 짐에 질렸어요.

갑작스러운 이사에 화가 나서 (할 수 없이) 오랜만에 로또와 즉석 복권을 샀습니다. 즉석 복권은 주인아저씨 곁에서 긁었는데요. 저도 모르게 ‘5억!’하고 소리를 냈고, 아저씨가 그 소리를 듣자 ‘제발 돼라!’라며 기운을 넣어주시더라고요. (물론, 낙첨이었습니다…) 로또는 아직 결과를 알 수 없으니까. 토요일 밤까지 힘을 내어 지내보려고 해요.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생길 거라고 반자동적으로 생각하는 건 저뿐, 아니겠지요?

구독자 님께도 액땜이라고 할 만한 새해의 일이 있었나요?
그래서 복권을 사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저는 한 주 이렇게 살았습니다.

🏋️‍♀️ 2월 셋째 주의 일: 수동 스캔과 수동 파쇄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통해 여러 번 사람들에게 물었어요. 오래 써 온 다이어리와 각종 노트를 버릴까 말까 고민 중이라고요. 대체로 절반 이상은 언제나 ‘간직한다’를 선택하시더군요. 그래서 꾸역꾸역, 일기장 상자를 들고 다녔는데. 이번 이사를 앞두고는 너무 많은 자리를 차지하는 그 종이 무덤에서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Lens 앱으로 2006년부터 써온 모든 기록을 스캔했고요. 스캔을 마치고는 손으로 한 장 한 장 찢으며 수동 파쇄를 했습니다. 조악한 다이소 세절기 같은 건 사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괜찮다는 물건을 굳이 찾아 또 집에 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손으로 찢을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래도 한 상자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나니 후련한 마음이 듭니다. 게다가 스캔과 파쇄를 거치면서 잊고 있던 이벤트나 장면들, 사람들도 기록 속에서 많이 만났어요. 깨알같이 쓴 낡은 종이를 굳이 꺼내고 넘기며 읽을 일이 별로 없었거든요. 개인적인 일기나 기록은 모두 손으로 쓰는 편이라, 이번의 처분(?)을 계기로 매년 초에는 지난해의 기록을 스캔하며 정독하고, 바로 파쇄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에요. (2010년의 어느 날에는 단둘이 점심을 먹은 사람의 이름이 있던데. 세상에, 얼굴도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구독자 님도 평소에 기록을 많이 하시나요?

기록은 어떻게 관리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모든 기록을 디지털로 전환해볼까, 싶다가도. 아직까지는 문방구가 너무 좋아서요. 당분간은 핸드라이팅-인간으로 살 것 같은데 말이죠. 기록 보관과 관리와 관련한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시다면 댓글이나 답신으로 공유해주셔도 좋겠습니다.

☕ 2월 셋째 주의 장소 : NTM부산

요즘 저의 동거인은 술 공부에 여념이 없습니다. 장단을 맞추다보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알코올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데요. 무리하지 않고 적당량의 술과 음식을 즐기기 위해, 페어링이 가능한 레스토랑을 때때로 찾습니다. 무시무시하다는 예약을 무사히 해내고, 이번 주의 평일엔 범일동의 한 오마카세, NTM부산에 방문했습니다.

종종 한 F&B 매거진의 원고를 씁니다. 외주를 맡아 작업할 때면 맛있는 냄새가 나는 매장에 방문해서, 먹고 마시는 손님을 관찰하고, 그 공간을 꾸린 대표님이나 매니저 님과 오랜 대화를 나누어요. 오가는 말에 따라 공간이 다르게 다가오곤 합니다. 이 일을 하고 난 후부터는 좀 더 세심하게 매장의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오마카세에 갈 때면 늘 짧은 스몰토크를 기대하며 출발합니다. 계속 말을 거는 셰프는 아무래도 부담스럽지만, 메뉴명을 읊어주는 것 이상의 이야기가 아주 조금만 오가더라도 그곳에 대한 기억이 달라지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여섯 명뿐인 손님 가운데 페어링을 요청한 건 저희밖에 없어서 와인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집에서 쓰신다는 와인 셀러도 추천받았습니다.

결국 특별히 맛있거나 맛없던 음식이나, 조도나, 소음의 정도만 어렴풋이 기억에 남는 매일의 외식 경험 가운데, 끝내 오래오래 살아남는 건 짧은 대화가 전부인 것 같습니다.

가게를 꾸렸던 사람이니, 저도 자연스럽게 책방에서의 시간을 떠올려봅니다.
종종 처음 보는 손님에게 기억에 남을만한 말을 건넸던가, 하고요.

📚 2월 셋째 주의 책 : 루시아 벌린 『내 인생은 열린 책』 웅진지식하우스, 2020

매달 사람들과 모여서 책을 함께 읽습니다.＊ 얼굴 맞대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전부 꺼내던 책방에서의 독서 모임과 같은 모양은 아니지만요. 카카오톡 방에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한 달 단위로 모여서 약속한 만큼의 분량을 읽고 인증하는 형태입니다.

책방 문을 닫고 나서는 독서가 내 마음대로 잘 안 되었거든요. 패턴이나 리듬 같은 걸 한번 잃고 나면 되찾기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부산에서의 생활에 안정을 찾고 나서는 이렇게 카카오톡에서 만나 읽는 방식으로 책을 읽는 일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가장 쉽게 택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기'라는 걸 이제는 잘 압니다.

2월에 함께 읽은 책은 루시아 벌린의 『내 인생은 열린 책』. 홀로 아들 넷을 키우며 세 번의 이혼과 알코올중독, 끊임없는 이사와 수많은 직업(교사, 전화 교환수, 병동 사무원, 청소부, 간호 보조...)을 거친 경험을 담은 루시아 벌린의 글은 이전에 『청소부 매뉴얼』을 통해 만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정말 좋아서 또 다른 소설집 『내 인생은 열린 책』과 자전 에세이 『웰컴 홈』까지 사두고 미처 읽지 못한 상태였거든요. 반갑게도 2월의 책으로 만나서 하루에 한 편 꼭꼭 씹어 읽었습니다.

두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단편도 섞여, 총 22편의 소설이 담긴 책인데요. 조금만 설명해도 스포일러가 될까 봐, 이야기를 늘어놓기는 어렵지만. 필사하며 좋아 견딜 수 없었던 단락을 나눠볼게요. 어서 3월에는 『웰컴 홈』을 읽고 싶어요.

＊ 3월의 책은 정미경의 『나의 피투성이 연인』과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인데요. 함께 읽고 싶은 분들은 코너스툴 인스타그램으로 DM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고된 한 주였습니다.

모든 걸 미뤄두고 집과 싸우다 보니 시간이 다 흘러버렸지요.

일주일 내내 집을 미워하면서 살았는데요. 루시아 벌린은 자신의 글을 ‘집으로 가는 글쓰기’였다고 말했다고 해요. 그런데 루시아 벌린의 소설을 번역한 공진호 번역가는 “루시아 벌린에게는 어쩌면 아예 집이란 없었던 것” 같다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대신 루시아로부터 ‘집’에 관한 하나의 단서를 발견해요.

루시아 벌린의 글이 하나의 장소가 된 것처럼, 제게는 오늘의 편지가 이번 주의 집이 되어주리라 믿어요. 짐을 싸고, 옮기고, 떠나보내고, 다시 자리하게 된 시간이 담긴 복수의 ‘집들’이 이 하얀 화면에 남아있으니까요.

구독자 님은 어떤 한 주를 보내셨나요?
셋째 주의 ‘집’은 평안하셨는지요.
아니었다면, 
부디 넷째 주의 집은 평안하시기를!

2022.02.23.
부산에서, 성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