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호 전시, 6개 도시의 집, 이식(移植)이라는 삶의 여정

2026.09.01 | 조회 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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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편지

2026.09.1 vol.35 | view more | SUBSCRIBE

  CRSH : 이야기  

 

안녕하세요, 작가 정재경입니다. 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9월의 화요일입니다. 서도호 작가의 전시를 보며 '이런 자료를 모두 가지고 계시다고!' 하는 순간이 많았습니다. 유년기 작품들이 촘촘하게 등장하는 걸 보며, 작품의 소재인 오간자처럼 밀도가 높은 아카이빙을 느꼈습니다. 
떠나온 삶의 흔적을 촘촘히 기억하고 보존하는 뿌리가 있었기에, 그는 세계를 오가며 자신만의 집을 새로 옮겨 심을 수 있었을 겁니다. 오늘은 그 집과 이식(移植)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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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도시를 이주하며 살아온 서도호 작가

 

지난 8월 2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설치미술가 서도호의 대규모 회고전이 개막했습니다. 30여 년간 이어온 그의 여정을 압축해 보여주는 이번 전시의 중심에는 '둥지/들'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반투명한 오간자 천으로 자신이 실제로 살았던 여섯 개 도시의 집을 정교하게 재현해, 하나의 거대한 공간으로 이어 붙인 작업입니다.

작가는 서울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미국 RISD와 예일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고, 런던, 호셤, 뉴욕, 베를린, 프로비던스 등 여섯 개의 도시를 오가며 살아왔습니다. 그에게 집은 한 번도 고정된 장소였던 적이 없습니다. 서도호는 자신을 '집 짓는 미술가'라 부르지만, 정확히는 '집을 옮기는 미술가'에 가깝습니다.

건축가, 생물학자, 물리학자, 산업 디자이너까지 끌어들여 태평양의 조류와 바람을 버틸 수 있는 집을 진지하게 연구했던 프로젝트, <퍼펙트 홈(A Perfect Home)> 역시 흥미롭습니다. 그에게 집은 정착의 증거가 아니라, 끊임없이 이동하면서도 놓지 않으려는 기억의 형태였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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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자라면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식물의 분갈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화분 속 식물은 어느 순간 뿌리가 배수공 밖으로 삐져나오고, 물을 줄 때마다 이미 너무 자라버린 몸을 좁은 화분 안에 구겨 넣은 채 자리를 옮겨 달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 신호를 알아챈 식집사는 식물을 꺼내 뿌리를 정돈하고, 더 넓은 화분으로 옮겨 심습니다. 이 과정에서 식물은 반드시 '몸살'을 앓습니다. 뿌리의 잔털이 상하고, 새로운 흙과 화분에 적응하는 동안 잎이 시들거나 성장이 멈추기도 합니다. 그래서 분갈이 직후에는 강한 직사광선을 피해 반그늘에 두고, 물도 처음에는 흠뻑, 이후에는 서서히 줄여가며 뿌리가 새 환경에 스스로 자리 잡을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서도호의 작품 속 반투명한 집들도 어쩌면 이 몸살의 흔적이 아닐까요. 오간자 천이라는 재료 자체가 상징적입니다. 벽돌이나 콘크리트처럼 견고하지 않고, 빛이 그대로 투과되는 얇은 천으로 지어진 집. 그는 완전히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지도, 떠나온 곳을 완전히 지우지도 못한 상태를 그대로 형상화합니다.

이주한 사람의 정체성이 원래 살던 집의 형태를 고스란히 지닌 채 새로운 공간 위에 겹쳐진다는 것, 옮겨 심어진 식물 역시 분갈이할 때마다 흙에서 취한 영양소로 자라나고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 닮아 있습니다.

 

잔뿌리와 섬세한 디테일 

 

식물학적으로 보면 분갈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큰 뿌리가 아니라 잔뿌리를 살리는 일입니다. 굵은 뿌리는 얼핏 식물을 지탱하는 핵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물과 양분을 흡수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눈에 잘 띄지 않는 잔뿌리들입니다. 여러 번 이식 후 살아남는 나무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생명력이 매우 강해집니다. 그런 나무는 가치도 높게 평가받습니다.

서도호의 작업에서도 가장 힘이 실리는 부분은 거대한 집의 외형이 아니라, 문손잡이나 스위치, 계량기처럼 사소하고 자잘한 디테일들입니다. 그는 이 작은 요소들을 실제 크기 그대로, 천이라는 연약한 재료로 하나하나 복원합니다. 그 잔뿌리 같은 디테일들이야말로 한 사람이 특정한 공간에서 실제로 살아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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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인문학자의 시선에서 이 두 이야기를 나란히 놓으면, '이식'이라는 행위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떠오릅니다. 이식은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이전 존재의 흔적을 안은 채 새로운 조건에 적응해가는 과정입니다. 몸살을 앓는다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그만큼 이전 환경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서도호가 30여 년에 걸쳐 여섯 개 도시의 집을 하나씩 복원해온 것도, 결국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곳에 잔뿌리를 내리며 살아왔는지를 스스로 확인하는 작업이었을지 모릅니다.

여섯 번의 도시 이동을 통해 물리적 변화도 있었고, 그의 예술적 토대도 '이식'을 거쳤습니다. 서도호는 한국화의 거장 산정 서세옥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동양화과에서 수묵화를 먼저 배운 뒤 해외 유학을 거치며 조각과 설치로 매체를 옮겼습니다. 붓과 먹으로 시작한 손이 실과 바늘, 건축 모형으로 옮겨가는 과정 역시 식물이 씨앗에서 싹을 틔우고 전혀 다른 형태의 잎과 줄기로 자라나는 변태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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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의 시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화분에서 저 화분으로 옮겨 다니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크고 작은 몸살을 겪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몸살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새 흙에 적응할 시간을 스스로에게 충분히 허락하는 일일 겁니다. 반그늘에서 일주일, 그리고 서서히 늘려가는 햇빛. 우리의 마음에도 그런 완충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내년 2월까지 이어지는 이 전시를 직접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반투명한 천 사이로 비치는 빛을 보며, 여러분이 지나온 화분들을 한번 떠올려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 초록편지에서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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