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4 vol.31 | view more | SUBSCRIBE
CRSH : 이야기
이사 오던 다음 해의 일입니다. 마당 한 구석에 있는 나무는 수피가 다 벗겨져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쓰였습니다. 시들어가는 생명에게는 눈길이 한 번 더 머무는 것이 인지상정이니까요. 봄이 지나가는데도 그 나무에서는 잎이 몇 장 나지 않았습니다.
얘는 생명이 꺼져가나 보다… 생각할 즈음, 배배 마른 것처럼 보였던 나무에서 선명한 마젠타 색상의 꽃이 나타났습니다. “나, 살아 있어!”라고 외치는 듯했습니다. 그 색이 어찌나 뜨겁던지, 여름 햇빛에 후끈 달아오른 마당에 수돗물을 양동이로 뿌린 것처럼 눈꺼풀이 식는 것 같았습니다.

배롱나무=나무 백일홍
나중에 알게 된 그 나무의 이름은 배롱나무였습니다. 배롱나무의 수피는 원래 매끈하고, 한여름부터 초가을까지 꽃을 틔웁니다. 배롱나무는 한 번 꽃을 피우면 백 일 내내 꽃을 열고, 지고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나무 백일홍’이라고도 불립니다.
요즈음 길에서 만나는 꽃 중 진분홍색 꽃이 있다면 바로 이 배롱나무입니다. 이 흰색 꽃의 배롱나무도 있어요. 향기가 참 좋으니 꼭 맡아보세요. 꽃에 벌이 있지 않은지 확인하셔야 합니다. 향기가 좋은 곳에는 늘 곤충이 먼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세요.
오늘은 배롱나무 이야기를 들려 드릴게요.

지나친 사랑
주택의 정원이란 땅의 깊이가 얕아 그곳에 살고 있는 미생물과 미확인 생명체의 종류가 적습니다. 건강한 흙엔 생명체가 많이 삽니다. 수많은 생명체가 대사 과정에서 내뿜는 유기화합물이 땅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흙이 건강할 땐 흙도 숨을 쉬기 때문에 보송보송 폭신폭신해요. 깊은 산속 흙은 밟아도 구름처럼 부드러운 게 그 이유입니다. 그런 흙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튼튼합니다.
도심지의 땅에서는 흙이 건강하기 어렵고, 하는 수 없이 봄이 되면 정원에 거름을 뿌려줍니다. 주문한 거름은 계분을 발효하고 소독한 거름이었습니다. 특유의 악취는 많이 제거되었으나 그래도 그 원료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초록 부대에 담긴 유기농 비료였습니다.
너무 넉넉하게 주문했는지 한 포대가 남았고, 저는 그 계분 거름을 배롱나무 위에 가득 부어 주었습니다. 양분이 이렇게 많으면 얼마나 풍성한 꽃을 피워줄까 기대하면서요.
배롱나무의 넉넉함
그러나, 그해 여름, 배롱나무는 꽃을 거의 피우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계분 한 봉지를 가득 부어 준 것은 권장 용량보다 너무 농도가 짙었습니다. 농도가 높은 비료를 만나면 식물 외부의 농도가 식물 내부의 농도보다 높으므로, 삼투압 현상 때문에 식물이 지닌 수액이 외부로 배출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물도 부족하고, 마음껏 뻗어갈 수도 없는 얕은 땅에 심어 놓고 비료를 잔뜩 주었으니, 독이 된 것입니다.
배롱나무가 다시 꽃을 풍성하게 보여주기까지는 세 번의 여름이 필요했습니다. 도시농업관리사 국가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에서 저의 실수를 깨닫고 나무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모릅니다. 제겐 실수였으나, 배롱나무에게는 그야말로 생존을 건 사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잘못했다고 배롱나무에게 사과를 많이 했습니다.

선비의 나무
배롱나무는 자라면서 나무의 껍질, 즉 수피가 벗겨져 매끈한 속살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예로부터 이 특성을 '언행일치'와 '겉과 속이 같은 청렴함'으로 해석해 선비들이 좋아하던 나무입니다. 끊임없이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학문에 정진하는 태도에 비유해 서원에 널리 심기도 했습니다.
성삼문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 〈백일홍〉이 있습니다. "지난 저녁 꽃 한 송이 떨어지고, 오늘 아침에 한 송이 피어서, 서로 일백 일을 바라보니, 너를 대하여 좋게 한잔하리라(昨夕一花衰 今朝一花開 相看一百日 對爾好銜杯)"입니다.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을 배롱나무의 개화 방식에 빗댄 시로, ‘한잔 하리라!’에 방점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관대하게
배롱나무 꽃잎은 얇고, 쉽게 떨어집니다. 그래서 더 자주 새로 피는지도 모릅니다. 강한 꽃이 아니라, 자주 다시 피는 꽃. 이 나무의 생존 전략은 '한 번의 완벽함'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소박함'입니다. 우리는 종종 '한 번의 큰 노력'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합니다. 완벽한 하루, 완벽한 계획, 완벽한 회복. 배롱나무는 저의 엄청난 실수도 관대하게 이겨내고 매일 지고 매일 새로 핍니다.
너무 뜨겁고 습해 서 있기조차 힘든 8월 첫째주입니다. 당연히 무기력하고 지칠 수 있어요. 오늘 하루치의 작은 개화만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오늘 필 꽃 한 송이면 충분합니다. 그 하루가 쌓이면, 어느새 우리도 배롱나무처럼 여름을 통과하고 있을 겁니다. 배롱나무를 보며 성삼문처럼 “한 잔 하리라!”며 작은 사치도 누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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