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의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 보니, 결국 비전에 한계가 생기더라고요.”

회사를 운영하다 보면 늘 계약서가 따라붙습니다. 고객사와 맺은 계약, 협력사와 맺은 계약, 사무실 임대차부터 근로계약까지요. 그런데 그 계약들이 언제 끝나고 어떤 조건이 걸려 있는지는 대개 한곳에 모여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메일함에, 공유 드라이브 어딘가에, 담당자의 기억 속에요. 그러다 자동으로 갱신되고 나서야 알게 되거나, 정작 필요할 때 원본을 못 찾는 일이 생깁니다.
해외에서는 이 문제를 푸는 CLM*이 이미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런데 2023년 국내에는 같은 걸 하는 회사가 하나도 없었어요. 래티스(Lattice)는 그 시장에 처음 뛰어들어 계약관리 솔루션 프릭스(Prix)를 내놓았고, 지금 프릭스로 관리되는 계약은 누적 25만 건, 고객사는 150곳을 넘겼습니다. 여기에 조선 현장의 문서를 다루는 야드그리드(Yardgrid)와 지식관리 솔루션 볼트(Vault)까지 더해 대기업 구축 프로젝트를 연이어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걸 해내는 팀의 팀원은 열 명뿐입니다.
래티스를 공동창업한 이재하 부대표는 창업이 하고 싶어 경영학과에 갔고, 만들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개발자가 됐습니다. 그런데 왜 창업하고 싶냐는 질문에는 오랫동안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고 답해왔어요. 다니던 회사를 나와 시작한 첫 창업팀을 두 달 만에 해체하고 나서야, 그 즐거움이 어디에서 오는 건지 따져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래티스는 그 답을 찾은 후 창업한 회사입니다. 이후 3년 동안 그는 계약관리 제품을 만들었고, 조선소에 들어갔고, 조직의 중간관리자 직급을 모두 없애는 선택을 했습니다. 오늘은 래티스 이재하 부대표의 Day 0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CLM(Contract Lifecycle Management): 계약의 작성부터 검토, 체결, 보관, 만료까지를 한곳에서 관리하는 솔루션.
오늘의 인사이트 요약
1. 첫 창업, 그리고 세 가지 즐거움
2. 서로 다른 강점을 지닌 공동창업자
3. 저마다 다른 성장의 방향
4. 조선소로 간 SaaS 회사
1. 첫 창업, 그리고 세 가지 즐거움
Q. 지금 회사에서 직책도 CTO이시고 커리어도 개발자로 쌓아오셨는데, 대학 전공은 경영학이셨다고요?
그때도 막연하게 창업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경영학과를 갔는데, 막상 학교에서 배우는 경영학은 창업이랑 거리가 좀 있더라고요. 대기업에서 과장, 차장쯤 됐을 때 성과를 발휘할 만한 걸 많이 배우는 것 같았어요. 수업 자체는 재미있었는데 저는 좀 더 창업스러운 활동을 해보고 싶어서 창업 동아리도 하고 사이드 프로젝트도 했죠.
그런데 그때는 ‘로우코드’(low-code) 툴*이라고 나온 게 워드프레스 같은 것밖에 없었거든요. 만들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는데 머릿속에 만들고 싶은 건 너무 많은 거예요. 그게 답답해서 개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저한테 개발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어요. 개발 그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결국 제가 어떤 가치를 만들지 직접 정하고 설계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로우코드 툴: 코드를 거의 쓰지 않고 화면에서 요소를 끌어다 놓는 방식으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도구.
Q. 그렇게 개발자로서 첫 직장인 ‘코드잇’에서 4년을 일하셨어요. 그 시절을 돌이켜본다면 어떠셨어요?
제가 입사했을 때가 인원이 열 명쯤 되던 시절이었고 투자도 하나도 안 받았을 때였는데, 그 뒤로 시리즈 A, B를 받을 때까지 같이 있으면서 고속 성장하는 스타트업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원래는 병역특례로만 함께하다가 나와서 창업하려고 했는데, 회사도 너무 좋고 배우는 것도 너무 많아서 여기서 좀 더 배워야겠다 싶어 이후로 2년 가까이 더 있었어요.
나중에는 회사에서 많은 걸 믿고 맡겨주셔서 파격적인 조건과 직책까지 제안해주시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좋은 회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창업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마음에 계속 있었던 것 같아요.
Q. 그 무렵에 사이드 프로젝트로 진행하던 하이드*라는 서비스가 마침 잘 됐던 거군요?
예비창업패키지도 선정되고, 유저도 1만 명 가까이 모인 데다 심지어 리텐션도 60~70%씩 나왔어요.
그러니까 어느 순간 제가 옛날만큼 회사 일에 집중을 못 하겠더라고요. 전에는 회사에서 맡은 일을 끝내고도 더 개선할 게 없을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할 일만 딱 끝내면 하이드와 관련된 생각을 더하게 되는 거예요. 회사에도 미안하고, 사이드 프로젝트 서비스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도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았어요.
그래서 어차피 언젠가는 창업하게 될 거, 시간이 지날수록 더 포기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퇴사하고 본격적으로 하이드에 집중하게 됐습니다.
*하이드(HYDE): 이재하 부대표가 회사에 다니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제작한 앱. 링크드인이나 리멤버가 본업을 다룬다면, 하이드는 취미나 관심사 같은 ‘부캐’를 기록하고 관리하는 서비스로 기획했다. 본캐가 지킬(Jekyll)이라면 부캐는 하이드(Hyde)라는 뜻에서 이름을 지었다.

Q. 그렇게 시작한 첫 창업은 어떻게 되셨나요?
퇴사할 때는 근거 없는 자신감 같은 게 차 있는 상태였어요. 나 정도면 기획도 해봤고, 개발도 해봤고, 성과도 내봤으니, 진짜 똑똑하고 열심히 할 수 있는 동료들만 모으면 잘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원래 알고 지내던 대학교 후배들 셋을 모아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니 제가 옛날만큼 잘 해내지 못하더라고요. 혼자 할 때는 기획도 제대로 하고 개발도 해서 딱딱딱 나아갔는데, 창업을 하니까 누가 이 말을 하면 이게 맞는 것 같고, 저 말을 하면 저게 맞는 것 같고. 자꾸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시간은 가는데 발전하는 게 별로 없었어요.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창업의 비전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전까지 누가 ‘왜 창업하고 싶냐’고 하면 저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고 답했거든요. 그런데 즐거움의 이유가 뚜렷하지 않다 보니 결국 비전에 한계가 생기더라고요. 그 상태로 다른 분들과 계속 함께하는 게 오히려 더 미안한 행동인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두 달 만에 팀을 해체했습니다.
Q. 세 분께 그만두자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어떻게 보면 제가 결혼하자고 데려와 놓고 결혼할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그런 사람이 세 명인 거잖아요. 이 사람들은 저를 믿고 왔는데.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지금 모인 사람들이 좋은데 이 사람들이랑 다른 걸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괜히 나 때문에 제대로 못하는 건 아닌가. 그런데 결국 이런 생각을 하는 건 결정만 늦출 뿐이더라고요. 창업이 쉽지 않다는 건 각오하고 시작했으니, 나중에 더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제대로 된 결단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Q. 팀을 정리하면서 자아성찰의 시간이 길었을 것 같아요. 그때는 어떤 생각을 많이 하셨어요?
다시는 이런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겠다 싶었어요. 그리고 내가 왜 창업을 재미있어하는지 그 방향성을 명확히 잡고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일할 때 느낄 수 있는 재미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 것 같아요. ‘개인적인 즐거움’, ‘조직적인 즐거움’, ‘사회적인 즐거움’. 개인적인 즐거움은 흔히 말하는 돈과 명예를 얻으면서 느끼는 거고, 조직적인 즐거움은 어떤 제품이나 조직을 만들고 키워나가는 데서 오는 소속감이나 성취감이고, 사회적인 즐거움은 사회에 큰 임팩트를 만들었을 때 오는 즐거움이에요.
세 가지 재미를 동시에 다 누리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아직 그런 사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는 어디에서 즐거움을 가장 많이 느꼈는지를 돌이켜봤어요. 돈은 당연히 많으면 좋겠지만 특정 금액을 넘어가면 제 인생이 그렇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고,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을 하면 좋겠지만 당장 제가 그렇게까지 소셜(social)한 사람도 아닌 것 같았고요.
그러면서 제가 왜 초기 스타트업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즐겁게 일할 수 있었는지 돌이켜보니, 좋은 사람들과 좋은 제품을 같이 만들고 키워나가는 데서 오는 소속감과 성취감이 컸더라고요. ‘아, 나는 조직적인 즐거움을 먼저 추구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하이드는 애초에 저한테 맞는 아이템이 아니었어요. 개인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매출이 나오는 ‘커머스’ 같은 서비스가 더 맞을 수 있고, 사회적인 걸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돈이 안 벌리더라도 그 목표를 믿고 기다릴 수 있는 ‘SNS’ 같은 아이템이 맞았을 거예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하이드와 같은 서비스를 만들고 있었으니 방향을 못 잡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 조직적인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분야가 뭘까 고민해보니 B2B 사업이 잘 맞겠더라고요. 기업 고객은 모시기 어렵지만 한 번 모시면 잘 이탈하지 않고, 그분들을 기반으로 더 큰 성장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2. 서로 다른 강점을 지닌 공동창업자
Q. B2B로 방향을 정하셨지만 이번엔 혼자 창업을 시작하진 않으셨어요. 지금의 공동창업자인 강상원 대표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스프링캠프에서 예비 창업가들한테 라운지를 무료로 제공해줬거든요. 거기서 자아성찰을 하면서 다음 스텝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 라운지 쓰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슬랙방이 있었는데, 거기에 자기소개를 올렸더니 상원님이 그걸 보고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엔 사실 좀 경계했어요. 스타트업 업계에 전문직 분들 중에는 본업이 워낙 탄탄하시다 보니 스타트업을 사이드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간혹 계시거든요. 이분도 ‘혹시 그런 분일까’ 싶었죠.
그런데 막상 말씀을 나눠보니 저보다 똑똑하시면서도, 훨씬 겸손하고 열정이 있다고 느껴지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제품에 대한 자신감은 있었지만 비즈니스 쪽은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분이랑 함께하면 내가 대표가 아니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창업의 방향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같이 창업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Q. 공동창업자를 선택하는 좋은 기준 같은 게 있으실까요?
그때는 기준이라는 게 없었는데 지금은 좀 더 명확해진 것 같아요. 열정의 레벨이 비슷한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나는 100만큼 하는데 같이 하는 사람이 50만큼 하고 있으면 아쉬움이 생기잖아요. 연애를 하는데 ‘이 사람은 나만큼 나를 안 사랑해주나’ 하고 느끼면 오해가 쌓이는 것처럼요(웃음). 그다음이 서로의 강점이 얼마나 보완적인가인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저는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한 운이 유독 좋았던 것 같아요. 지금의 아내도 스무 살 때 대학에서 처음 만났고요. 원래 잘 맞는 사람 찾기가 힘들잖아요. VC들도 보통 원래 알던 사이끼리 창업하는 걸 좋아하는데, 저는 모르던 사이로 만났는데도 너무 잘 맞아서 지금까지 상원님께 많이 배우면서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Q. 그렇게 함께 창업하기로 하고 나서 아이템을 정하셨죠. ‘계약관리’라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온 건가요?
각자 생각하는 아이템도 뽑아보고 아이데이션도 하면서 여러 후보를 올려놨는데, 지금 이 시점에서 각자의 강점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게 뭔가로 보니 ‘계약관리’가 가장 핏이 맞더라고요. 계약이라는 도메인은 상원님에게 잘 맞고, SaaS 형태의 IT 제품을 기획하는 건 제 강점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아이템을 떠올리게 된 구체적인 배경도 있었어요. 상원님이 법무법인을 창업했을 때 계약관리가 어려웠던 실질적인 니즈가 있었고, 해외에서는 이미 CLM 산업이 떠오르고 있었거든요. 실존하는 니즈와 해외 레퍼런스가 모두 있었으니 한번 시도해볼 만하겠다고 봤어요.
다만 국내에는 이걸 하는 회사가 하나도 없던 시절이라, 가능성은 믿었지만 실제로 얼마나 수요가 있을지에 대한 자신감은 명확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바로 제품을 만들기보다 랜딩페이지부터 만들어서 수요를 검증해보기로 했습니다.
Q. 그렇게 나오게 된 서비스가 프릭스(Prix)군요?
생각보다 랜딩페이지의 성과가 좋았어요. 여러 기업에서 사전등록을 해주셨고, 그 기업들과 전부 인터뷰를 해보니 실제로 많은 기업들에서 계약관리에 대한 수요가 있다는 게 확인됐습니다. 그제야 저도 이 아이템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어지더라고요.
그렇게 기획부터 디자인, 개발까지 5주 만에 프릭스의 MVP를 만들어서 내놓게 되었습니다. 그 5주는 진짜 무아지경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요즘에는 AI로 단기간에 제품을 뚝딱 만들어내지만, 그때는 제품 개발에 AI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던 시절이었거든요. 5주 만에 이만한 서비스를 만들어봤으니 더 이상 못할 게 없다는 자신감도 가질 수 있던 시간이었어요.
제가 MVP를 만드는 5주 동안 상원님은 랜딩페이지 하나만 가지고 영업을 다니셨어요. 그렇게 클로즈 베타로 서비스를 이용할 고객사를 25개나 모아 오셨어요. 저와 상원님이 지닌 강점으로 만들어낸 결과였죠.

Q. 클로즈 베타는 무료로 시작하셨죠. 첫 매출은 언제부터 나기 시작하셨나요?
한동안 무료 베타로 운영하다가 10월부터 유료화를 조금씩 시작했어요. 창업한 게 4월이었으니 6개월 동안은 매출이 한 푼도 없었고, 그 뒤로 조금씩 늘려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시드 투자는 7, 8월쯤 받았는데, 사실 투자를 받으면 엄청 감격스러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긴장이 되더라고요.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싶었거든요. 기쁘고 다행이라는 마음보다 본격적으로 제대로 시작된다는 긴장감이 더 컸어요. Pre A 라운드 투자를 받을 때까지는 저희 둘 다 거의 무급이었고, 각자의 아내가 생활을 책임지는 현실이었습니다. 사실 처음 창업할 때 아내가 ‘1년 동안 돈 못 벌어오면 다시 돌아오라’고 했거든요(웃음).
제가 힘든 걸 잘 못 느끼는 편이라 조금만 지나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이게 진짜 될까, 첫 팀은 이미 해체했는데 이번에도 또 실패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은 많이 들었었어요. 다행히 그런 불안정한 시기를 이겨내고 나니 지금은 아무리 바빠도 하나도 힘들지 않더라고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때가 가장 힘든 것 같습니다.
3. 저마다 다른 성장의 방향
Q. 회사가 커지면서 조직도 만들어가셨을 텐데요. 부대표라는 자리는 어떻게 정의하고 계세요?
결국 부대표는 대표의 분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표라는 말 자체가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잖아요. 저는 그 책임이 제일 중요하다고 보고요. 대표를 대신하거나 대표의 분신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저도 상원님과 똑같이, 최소한 그 이상으로 회사를 대표하고 회사를 대신해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Q. 그 책임을 실제로 맡아보니 어떠셨어요?
제가 매니저 경험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대표 역할은 물론이고 매니저 역할도 처음 겪는 게 많았어요. 어떤 분을 채용해야 하는지, 채용이 됐을 때 그분과 같이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시기에 어떤 일을 드리는 게 좋은지. 모르는 게 많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씩 맞춰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중에 제가 잘못 알고 있던 게 있어요. 채용한 분이 일을 잘하게 되면 다음 단계로 다들 매니저가 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우리나라에서 승진이라고 하면 보통 매니저가 되는 걸 뜻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매니저가 되고 싶은 분도 있지만 아닌 분도 있고, 결국 사람마다 원하는 성장 방향이 다르더라고요. 그 사실을 몰랐던 게 가장 큰 시행착오였습니다.
실제로 팀에 매니저 직책을 만든 게 항상 잘 돌아가지는 않았어요. 매니저를 맡으신 분이 부족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회사가 매니저를 필요로 하는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제가 그 자리에 무엇을 기대하는지도 명확하지 않았고요. 당사자가 그 방향을 원하는지, 회사에 그 자리가 필요한지, 역할이 분명한지. 이 세 가지가 다 맞아야 하는 건데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Q. 지금 래티스에는 중간관리자가 없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그런 구조가 된 건가요?
예전에는 제품 하나를 만들려면 어쩔 수 없이 분업을 해야 했거든요. 기획, 디자인, 개발처럼 필요한 스킬이 다 다르니까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야 하나의 결과물이 나왔어요. 그러면 그 사이에서 소통을 주도하는 PM이 반드시 필요하고, 사람이 여럿 모이니 중간 관리자가 필요한 구조가 만들어지죠.
그런데 이제 AI의 등장으로 그러한 구조가 싹 바뀌게 된 것 같아요. 하나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 협업이 필수적이지 않게 되고, 소수가 더 많은 일을 하게 되면서 매니저라는 역할도 상대적으로 덜 필요해지더라고요. 예전에는 ‘피라미드 구조’를 체계적으로 만드는 게 중요했다면, 요새는 마치 ‘길드 체제’처럼 각자 자기 몫을 온전히 해내는 전문가들의 조합을 잘 만들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원래 PM과 개발자로 나뉘어 있던 구조를 해체하고, 지금은 한 분이 프로젝트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전담하는 구조로 바꿨어요. 기획자 출신이든 디자이너 출신이든 상관없다고 보는데, 결국 엔지니어링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팀원이 열 명 정도인데 중간 관리자 없이 저랑 상원님을 포함한 C레벨만 매니징하고, 나머지는 전부 똑같은 레벨로 일하고 있어요.
Q. 그렇게 모인 분들이 떠날 때도 있을 텐데요. 멤버들이 떠날 때는 어떤 마음이세요?
우리 회사가 항상 정답은 아니잖아요. 우리가 일할 자리를 마련해줬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와서 열심히 해주셨으면 감사하고, 나가고 싶으면 우리가 더 주지 못한 가치를 찾아서 가는 거니까요.
만남과 헤어짐은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 같고, 있었던 기간에 최선을 다하고 지나갔을 때 또 웃으면서 만날 수 있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먼저 나가신 초기 멤버분들이랑 모여서 술 한잔하고 있어요.
Q. 그럼 앞으로 함께 일할 분은 어떤 기준으로 찾으세요?
지금 계신 분들 같은 분들이 더 들어온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인데, 이 분들의 공통점을 꼽아보자면 욕심 있는 분들인 것 같아요. 자기 가치를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분들이요. 그래서 저희는 창업에 관심 있거나 나중에 창업하고 싶어 하는 분들을 진짜 좋아합니다.
창업할 사람은 와서 빨리 배우고 나가는 거 아니냐고들 하시는데, 저는 가늘고 길게 10년 가는 사람보다 진짜 빡세게 1, 2년 하는 사람이 회사에서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2년 동안 배우기만 한 게 아니라 그분들도 기여를 하고 나가는 거고요. 그런 분들이 나가고 싶다고 하면 저희도 그분들에게 그만큼 다음 가치를 주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좋은 분인데 창업하겠다고 나간다고 하면 저희가 투자를 할 수도 있고요.

4. 조선소로 간 SaaS 회사
Q. 래티스는 계약관리 SaaS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조선소에도 들어가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 됐나요?
계약서를 관리한다는 것 자체가 결국 문서를 토대로 관리하는 거잖아요. 현대의 많은 기업이 다 문서로 일하는데, 특히 조선업은 배 한 척을 만들 때 어마어마한 양의 문서를 씁니다. 설계 도면부터 각종 승인 서류까지 쌓이는데, 필요한 문서를 제때 못 찾으면 현장이 멈춰버리거든요. 그걸 관리하는 게 엄청난 가치라서, 저희가 하던 일과 뿌리가 같다고 봤어요.
Q. 그렇다고 해도 SaaS 회사가 구축 프로젝트까지 맡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처음 한화오션을 통해 서비스 구축 프로젝트 요청이 왔을 때는 회사에서 프릭스만 운영하던 시절이고 회사 규모도 지금보다 작았어요. 저희가 쓸 수 있는 사람과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그걸 아예 새로운 분야에 쓰는 게 맞는가, 고민을 진짜 많이 했습니다. 스타트업이면 서비스 하나에만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죠. 결국 저희는 새로운 기회를 마다하지 않는 분위기여서 여기에도 충분히 좋은 기회가 있겠다고 보고 결정했는데, 결정하고 나서도 비슷한 고민을 진짜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걸로 생겨난 기회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저희가 만들어둔 솔루션을 그대로 쓰기가 어렵거든요. 보안 때문에 외부 서비스를 못 쓰기도 하고, 이미 쓰고 있는 시스템과 연결해야 하기도 하고요. 그러면 맞춤형으로 만들어드리거나 아예 구축해드려야 하는데, 대기업 프로젝트를 해보고 나니 어떤 기업에 어떤 형태로 제공하는 게 좋을지 감이 생겼습니다. 같은 고객을 만나도 SaaS로 드릴지, 맞춤으로 제작해드릴지 고를 수 있게 된 거죠. 지금 돌이켜보면 제품 측면에서도 가장 잘한 결정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제조업 쪽에서도 같은 일을 해보려고 하고 있어요. 공장이 돌아가는 과정에도 문서와 데이터가 쌓이니까요.

Q. 그렇다면 지금의 래티스는 어떤 회사라고 정의하고 계세요?
이제는 두 사업을 통합해서 저희 회사를 엔터프라이즈 AX 회사라고 정의하고 있어요. 기업이 일하는 방식 자체를 AI로 다시 짜드리는 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PMF라는 것도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아요. 초기에 PMF를 찾았다 하더라도, 서비스의 니즈가 확장될수록 그다음 PMF를 찾아가야 하고, 시장이 바뀌면 또 새로운 걸 찾아야 하고요. 결국 사업과 제품이 다 살아 있는 유기체 같아서, 항상 맞는 공간과 먹이를 줘야 하는 상황인 것 같아요.
Q. 말씀하신 사업의 방향이 SI*와 유사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차이점이 있을까요?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SI가 좋은 가치를 주었음에도 상대적으로 각광을 받지 못했던 이유는 ‘확장성’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특정 고객이나 특정 기업에게 중요한 가치를 주더라도, 그 가치를 주기 위해서는 항상 특정한 사람의 공수가 많이 들어갔거든요. 한 회사에 만들어드린 걸 다른 회사에 그대로 쓸 수가 없으니, 고객이 늘어나는 만큼 사람도 늘어나야 했고요.
그런데 이제는 AI 시대가 되면서 그 두 가지가 다 열려 있는 시대가 된 것 같아요. 가치 측면에서는 기존에 디지털화로 할 수 있는 효율화가 100 정도였다면, 이제 그 디지털에 AI를 얹어서 할 수 있는 게 300, 500으로 늘어나고 있어요. 그만큼 늘어났기 때문에 이걸 하고 싶어 하는 기업들의 니즈도 많아지고요.
수행하는 입장에서도 옛날에는 똑같은 걸 하더라도 똑같이 사람의 공수가 들었는데, 이제는 내부적으로 AI로 효율화하고 제공하는 방식에서도 개선하거나 시스템화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졌어요. 반복되는 작업을 AI가 대신하기도 하고, 한 번 만든 걸 다른 고객에게 다시 쓸 수 있게 정리해둘 수도 있고요. 저희가 하는 일이 예전의 SI와 다른 지점이 거기라고 봅니다. 저는 이게 진짜 그다음 PMF라고 생각하고, 저희도 한화오션이나 대기업들과 프로젝트를 해보면서 어느 정도 PMF를 찾게 된 것 같습니다.
*SI(System Integration): 고객사가 필요로 하는 시스템을 그 회사에 맞춰 직접 구축해주는 사업. 정해진 제품을 여러 고객에게 파는 SaaS와는 반대편에 있는 방식이다.
Q. 요즘은 AI 때문에 SaaS가 위협받는다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그러한 시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저도 그런 얘기를 진짜 많이 듣는데, 사실 크게 공감되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타격을 받는 SaaS도 많을 것 같아요. 간단한 유틸리티성 서비스는 AI가 바로 해줄 수 있는 게 많으니까요.
그런데 옛날에도 SI가 있었고 다 직접 만들 수 있었는데, 직접 만드는 것보다 사서 쓰는 게 낫다고 판단했으니 SaaS를 이용한거죠. 제품뿐 아니라 모든 서비스가 다 그렇게 상대적 우위에 따라, 비교에 따라 만들어졌어요. AI를 통해서 이걸 할 수 있지 않냐고들 하지만, AI를 가진 사람들은 그걸로 원래 하던 걸 더 잘하게 되고요. 결국 상대적 우위를 가진 기업이 집중할 수 있는 부분이 공고해진 건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수혜를 받는 회사나 서비스의 개수 자체는 확실히 줄겠지만, 거기서 할 수 있는 건 오히려 많아지는 것 같아요. 어떤 SaaS에게는 기회가 되고 어떤 SaaS는 힘들어지겠죠. 힘들어지는 쪽이 좀 더 많을 거고요. 저희는 유틸리티성보다 기업들이 실제로 일하는 과정에 깊이 맞닿아 있는 서비스라, AI를 통한 장점이 더 큰 상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Q. 그럼 5년 뒤에는 래티스는 어떤 상태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후회를 안 하는 성격인 만큼 눈앞에 있는 걸 하자는 편이라, 5년 뒤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해보지는 못했는데요. 저희가 처음부터 목표로 한 건 국내 최고의 사업형 지주회사예요. 하나의 서비스만 하기보다 좋은 서비스를 여러 가지 운영하거나 여러 회사를 같이 운영하면서 더 큰 레벨의 가치를 주는 회사요. 5년 뒤에 진짜 지주회사가 돼서, 다른 스타트업들이 저희에게 회사를 팔고 싶거나 저희랑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Q. 래티스의 Day 0로 돌아간다면, 그때의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세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할 것 같아요. 하던 대로 하라고요. 진짜로 후회하는 게 없거든요. 결과가 좋지 않았을 수는 있어도 결국 그게 다 역량과 기회로 전환이 되는 것 같아서요. 지금까지 온 것도 너무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충분히 만족하고 있고,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상황이라서요. 하던 대로 해서 이렇게 될 수 있다면 그게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Q. 이제 막 Day 0에 선 창업자들에게는 어떤 말을 해주시겠어요?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사업은 장기적인 건데 하다 보면 남들에게 눈이 갈 수밖에 없거든요. 여기는 몇 개월 만에 투자를 얼마 받았다더라, 여기는 몇 년 만에 회사를 팔았다더라. 그런 말을 들으면 위기감도 생기고 조급해지죠.
그런데 누가 사업을 5년 만에 성공했다고 하면 엄청 빨리 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저 자신한테는 1년도 안 주고 가혹하게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일희일비할 필요 없이 그냥 목표를 향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다 보면 뭐라도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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