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ided by Zero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IT테크, 스타트업 그리고 자본시장에 대한 2차적 사고를 공유합니다.
디자인 협업 툴 피그마(Figma)는 작년 7월 화려하게 상장했습니다. 공모가 33달러로 시작한 주가가 첫날 115달러까지 치솟으며 250% 폭등했죠. 시가총액이 하루 만에 193억 달러에서 471억 달러로 뛰었습니다. 연 매출 10억 달러를 막 넘긴, 성장률 40%대에 흑자까지 내는 보기 드문 우량 스타트업이었거든요.
관련해서 당시 스노우플레이크의 잔향이 보인다고 글을 쓰기도 했었죠.
그 뒤 9개월 동안 주가는 고점에서 86%나 무너졌습니다. 이유는 하나, AI였죠. 텍스트만 넣으면 AI가 알아서 화면을 그리고 코드까지 짜주는 시대에 사람이 일일이 디자인하는 툴이 무슨 소용이냐는 겁니다. 피그마로 프로토타입 만드는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왔고요.
그런데 지난 얼마전 나온 1분기 실적이 이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매출 성장이 다시 가속됐거든요.

공포의 실체부터 보겠습니다. 예전엔 소프트웨어를 만들 때 기획자가 요구사항을 쓰고, 디자이너가 피그마에서 화면을 그리고, 개발자가 그걸 보고 코드로 옮기는 식이었습니다. 피그마는 이 중간에서 이게 정답이라고 알려주는 기준점 역할을 했죠.
그런데 v0, 러버블(Lovable) 같은 텍스트로 앱 만들기 도구가 등장하면서 이 과정이 통째로 건너뛰어졌습니다. 코딩도 디자인도 모르는 사람이 그냥 말로 시키면 작동하는 화면이 몇 초 만에 나오거든요. 이른바 바이브 코딩이죠.
여기에 올해 2월 구글이 무료 AI 디자인 툴 스티치(Stitch)를, 4월엔 앤트로픽이 클로드 디자인(Claude Design)을 내놓으며 공포를 키웠습니다. 특히 클로드 디자인은 기존 깃허브 코드나 피그마 파일을 분석해 그 브랜드에 딱 맞는 화면을 알아서 뽑아냈죠. 디자인 툴 자체가 필요 없어 보이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오히려 더 필요하다?
그럼 이런 AI 경쟁자들이 쏟아진 바로 그 시기에, 피그마는 어떻게 매출 성장을 오히려 가속했을까요?
핵심은 역설에 있습니다. AI가 코드 짜는 문턱을 0으로 낮추니, 전 세계에서 앱이 폭발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AI한테 그냥 "결제 화면 만들어줘"라고 시키면, 작동은 하지만 그 회사 고유의 디자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반적인 화면이 나옵니다. 회사마다 정해둔 버튼 모양도, 색깔도, 간격도 모르니까요. AI는 멋대로 버튼을 지어내고, 간격을 추측하고, 있지도 않은 변형을 환각으로 만들어냅니다. 작동은 하는데 체계적으로 엉망인 결과물이 나오는 거죠.
결국 깨달음은 이렇게 정리됐습니다.
AI는 디자인 작업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좋은 체계는 키워주고 허술한 시스템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거죠. AI가 코드를 짜기 전에 "우리 회사 버튼은 이렇게 생겼고, 색은 이거다"라고 알려줄 기준점이 반드시 필요해진 겁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통째로 들고 있는 곳이 피그마였죠. AI 코딩이 늘수록 피그마에 의존하는 개발자가 늘어나는 정반대의 그림이 펼쳐진 셈입니다.
그림판에서 인프라로
피그마는 여기서 기민하게 변신했습니다. 사람이 그림 그리는 캔버스에 머무는 대신,에 AI 에이전트가 코드를 짜기 전에 들여다보는 데이터베이스가 되기로 한 거죠.
방법은 세 가지였습니다. 먼저 모델 컨텍스트 프로토콜(MCP) 표준 규격으로 커서(Cursor), 클로드 코드 같은 AI 코딩 도구와 직접 연결했습니다. AI가 피그마에서 디자인 정보를 읽어가는 건 물론, 거꾸로 코드를 짜면 그게 피그마 화면에 자동으로 그려지는 양방향 연동까지 만들었죠. 여기에 피그마 스킬이라는 설명서를 붙여, AI가 그 회사의 규칙을 먼저 읽고 따르도록 강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코드 커넥트로 피그마의 디자인 요소를 실제 코드와 1:1로 묶어서 AI가 일반적인 코드가 아니라 그 회사가 실제로 쓰는 코드를 그대로 뽑아내게 했고요.
정리하면 AI 코딩 도구를 쓰는 개발자는 이제 피그마를 우회할 수가 없습니다. 결과물이 엉망이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피그마를 거쳐야 하니까요. 그림판이 AI 시대의 필수 미들웨어가 된 셈이죠.
숫자가 증명
그 결과가 1분기 실적입니다. 매출은 3억 3,340만 달러로 1년 전보다 46% 늘었는데, 더 중요한 건 성장률 자체가 계속 빨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38%에서 40%로, 다시 46%로 올라갔거든요. 보통 회사가 커지면 성장률은 떨어지는데, 피그마는 거꾸로 가고 있는 겁니다.
가장 눈에 띄는 지표는 순매출유지율(기존 고객이 1년 뒤 얼마나 더 쓰는지)이 139%까지 올라간 점입니다. 새 고객을 한 명도 안 받아도 기존 매출이 알아서 40% 가까이 늘어난다는 뜻이죠. 비결은 개발자입니다. 이제 피그마 사용자의 3분의 2가 디자이너가 아닙니다. AI 도구를 쓰는 개발자, 기획자, 분석가들이 줄줄이 자리를 사면서, 어떤 회사는 3만 5,000석을 한 번에 계약했고 또 다른 회사에선 디자이너보다 엔지니어가 더 많아졌죠. 디자이너 수에 묶여 있던 시장이, AI 덕에 27만이 아니라 수천만 명 규모로 뚫린 겁니다.
그래도 남는 것
물론 장밋빛만은 아닙니다. AI를 돌리는 데 드는 계산 비용 때문에 매출원가가 1년 새 253%나 뛰었고, 91%였던 매출총이익률이 79%로 내려앉았거든요. 게다가 "고객 디자인 파일을 무단으로 AI 학습에 썼다"는 집단소송도 걸려 있습니다. 무료인 구글 스티치는 1인 창업자나 작은 팀을 계속 끌어가고 있고요.
그럼에도 피그마가 보여준 건 확실해 보입니다. AI가 디자인 툴을 죽일 거라던 시장의 1차원적인 예측이 아직까지는 틀렸다는 거죠. AI가 코드를 쉽게 짜줄수록, 그 코드가 엉키지 않게 잡아줄 기준점은 오히려 더 귀해졌습니다. 피그마는 디자이너가 소프트웨어를 상상하는 도구를 넘어, AI가 실제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운영체제가 되어버린 셈이죠.
죽기는커녕, 가장 빠르게 가속하는 중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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