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경의 핫 아메리카노 | 밀레니얼 세대 중년 여성과 [바비]

🗽 TMI.FM의 DJ 홍수경(Janis Hong) | 영화 잡지 기자로 일하며 한국 영화계의 대소사를 기록하다가 미국 뉴욕으로 이주, 각종 영화 및 팝 컬쳐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영어권 음악만 듣던 팝 덕후가 뒤늦게 미국에서 케이팝 팬으로 거듭났고, 최근에는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 게임] 등의 작품 덕에 한국과 미국의 접점에 집중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북미주재원으로도 활동 중.

네, [바비]입니다. 전세계 박스오피스 수익 10억 달러를 넘긴 [바비]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핫한 영화입니다. 바비를 아는 여러 세대가 함께 핑크 의상을 입고 마치 축제를 즐기듯 극장을 찾고 있습니다. [오펜하이머]와 함께 관객몰이를 하면서 미국 박스 오피스는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습니다. 미국 영화의 큰 트렌드 중 하나인 브랜드 IP 기반 영화가 어떻게 세대를 대표하는 영화가 되었는지 저의 과거와 현재 문화 경험을 반추하며 짚어 보았습니다. 한국에선 이미 식어버렸을 영화에 관한 긴 글 정독에, 미리 감사드립니다.

바비 랜드: 무한 긍정의 유아적 유토피아

'스테레오티피컬 바비'는 핑크 유토피아 바비랜드에서 한 점의 슬픔 순간도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바비랜드는 무엇이든 잘 하는 완벽한 바비들이 거주하는 공간이고 바비 외에 남성 인형인 켄의 무리와 켄의 친구 앨런이 함께 공존합니다. 어느 날, 긍정의 언어만이 생성하던 바비의 머리 속에 ‘죽음’과 ‘셀룰라이트’라는 단어가 끼어들더니, 정상적인 까치발 자세가 불가능해지고 불운이 계속됩니다. 자신의 삶을 정상으로 되돌리려면 인간 세계로 가서 주인을 찾아 원인을 밝혀내야 합니다.

바비 랜드는 컨셉과 아이디어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여성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라는 구호 아래 대통령, 의사, 엔지니어, 아티스트, 기자, 청소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바비가 평등하게 존재합니다. 여성이 노벨상과 퓰리처상을 휩쓸고, 밤마다 여자들만의 흥겨운 파티가 열립니다.

그러나 소비자에게 거의 주목을 못 받은 상품이거나 주인의 과격 행위로 망가진 바비는 ‘이상한 바비’가 되어 동떨어진 공간에 머무릅니다. 바비 때문에 존재 의미가 있는 남자 인형 켄의 꿈은 바비의 사랑을 받으며 한집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지만 아마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바비랜드는 바비와 엮인 모든 상품들로 구성된 공간이기도 합니다. 바비의 외모와 환경은 1950년대 미국이 선호하던 여성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복고적입니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세련된 복고 룩을 만들기 위해 자크 드미 감독의 [쉘부르의 우산]과 [로쉬포르의 숙녀들] 같은 뮤지컬의 파스텔 톤과 진 켈리 주연의 [파리의 아메리카인]을 진화 시킨 듯한 마을 소개 내레이션과 시퀀스를 보여줍니다. 고전 뮤지컬스러운 밝음과 화려함으로 넘치는 동시에 [스텝포드 와이프]나 [가위손]처럼 너무 정갈해서 이상한 서버브(suburb) 풍자의 뉘앙스도 녹아 있습니다. 미국 어린 아이들의 오랜 사랑을 받았던 루니툰스(Looney Tunes)스러운 익살스러운 만화 효과가 자연스러운 곳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바비는 20세기 페미니즘이 반영된 장난감으로 소개되죠. 아기 인형을 가지고 놀며 엄마 역할에만 만족했던 꼬마 여자 아이들이 어른 모습을 한 바비 인형의 등장으로 엄마가 아닌 장래희망을 꿈꾸게 되었고 ‘여성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여권신장에 일조했다고 주장하죠. 원형 바비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패러디하며 웅장하게 등장합니다. 바비랜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바비가 원하는 것을 제한 없이 누리는 세계입니다. 바비는 인형이므로 욕망이 없고, 대신 바비를 위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는 여성스러운 핑크빛 상품들이 가득한 소비주의 세계입니다.

이 컨셉에는 큰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비랜드는 바비를 주로 가지고 노는 취학 전 아동 대상의 공간입니다. 어른의 모습이지만 이들은 어른이 아닙니다. 바비는 특정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업무는 하지 않습니다. 와플과 우유를 먹고, 하루 종일 친구들과 놀면서 지냅니다. 때문에 바비와 켄은 아무리 사랑을 한다 해도 섹스는 커녕 키스조차 하기 힘듭니다. 무해하고 건전하기에 폭력은 장난과 유희로 중화됩니다. 교통사고가 나도 만화 영화의 한 장면 같고, 켄이 전쟁을 일으켜도 무기는 장난감이고 피 한 방울 나지 않죠. 바비와 켄 모두 어린이의 장난감입니다. [토이스토리]처럼 장난감의 로맨스와 액션은 어린이용 만화 같을 뿐입니다.

중년과 노년 여성, 그리고 가부장제

자신의 문제를 풀기 위해 인간 세계를 방문한 바비는 바비랜드와 다르게 진행되는 상황에 당황합니다. 80년대 TV 드라마에서 튀어나온 듯한 롤러 블레이드 복장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고, 멋대로 물건을 훔치는 바람에 경찰서에 끌려 갑니다. 남성은 바비에게 알 수 없는 외모 평가 농담을 하고 성기에 대해서도 궁금해합니다. 무엇보다 캘리포니아는 바비랜드의 거울이 아닙니다. 여자가 주도하는 바비랜드와 달리 현실에선 남자들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일개 직원이 최고층 직행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 한 기업의 대표를 만날 수 없는 수직적인 힘의 세계입니다.

바비에게 가장 큰 문화 충격은 자신을 사랑하리라 믿었던 10대 소녀의 반응입니다. 소녀 무리에서 제일 정치적인 의견이 강해 보이는 사샤는 바비의 미소에 알파 세대(2010년 이후 출생 세대)의 독설을 퍼붓습니다. 바비가 여성을 대표한다는 주장을 터무니 없어 하며 바비의 말을 조목조목 비판합니다.

영화 [바비]를 재미있게 만드는 점은 바비에 대한 오랜 비판과 부정적인 시선을 기꺼이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소녀의 90퍼센트 이상이 소유하고 있다는 이 인형은 60년대부터 어린 아이들에게 여성의 육체에 대한 선입견을 심어준다는 지탄을 받아왔습니다. 2000년대 들어 더 쿨한 인형이 등장해 경쟁이 벌어지고 킴 카다시안이나 비욘세 등 전통 미인상에서 벗어난 유색 여성이 인기 스타가 되면서 다양한 인종과 몸매의 바비가 등장합니다. 때문에 영화에서 원형 바비에 비해 다소 통통한 바비와 비-백인 바비가 주요 역할로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4년이 되어 디즈니의 '얼음 왕국'이 등장하면서 바비는 구식 인형으로 완전히 하락의 길을 걷게 되었죠. 수퍼마켓 장난감 코너에 여전히 바비 인형이 즐비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영화에 이런 현실을 반영한 소박한 반전이 벌어집니다. 바비의 실소유주는 사샤가 아니라 밀레니얼 세대 엄마인 글로리아입니다. “나는 지루한 일을 하는 지루한 엄마야”라고 말하는 글로리아는 어렸을 때 멋진 직업을 가진 우아한 바비를 가지고 놀았지만 바비처럼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비를 다시 꺼내 불완전한 바비 버전을 구상을 했고 그의 생각이 바비랜드의 바비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글로리아에게 바비는 여권신장에 대한 영감을 주는 요정이 아니라 실력주의(meritocracy)를 전파하는 홍보물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는 완벽한 바비를 매개 삼아 열등감을 느끼고 우울해 합니다. 바비로 대표되는 '잘난 여성'의 기준에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것 같죠. 영화 속 바비는 할머니 혹은 중년 여성과 계속 마주칩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여성에게 ‘불안(anxiety)’란 단어도 배우죠.

실리콘 밸리 붐을 지나면서 미국 주요 미디어에서 대대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한 흐름 중 하나는 실력주의입니다. 실력주의는 탁월한 사람이 특권을 점하고 세상을 지배하는 게 당연하다는 우월 의식을 생성했고 특정 직업에 대한 숭배 현상을 낳았습니다. 누군가 특별한 성취를 한다면 그는 마땅히 우월하다고 여겨지고, 그런 성취를 못하고 평범하게 사는 사람의 가치가 폄하되는 게 당연하다는 의식 때문에 평범한 이들의 불안과 우울이 더 심해졌죠. 남보다 돈을 못 벌면, 나는 열등한 인간일까요? 남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남성이 돈을 더 많이 벌고 이룬 것도 많으니 남성의 실력이 더 좋은 걸까요? 방과 후 아이를 픽업하러 오는 엄마들은 왜 이리 피곤해 보일까요?

그레타 거윅 감독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그의 출발이 보잘 것 없는 청춘을 고민하는 영화였기 때문일 겁니다. 노아 바움벡과 그레타 거윅이 함께 각본을 쓰고 그레타 거윅이 주연을 맡은 [프랜시스 하]는 20대 후반이 되면서 주변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는 가운데 돈도 없이 방황하는 브루클린 예술가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다룹니다.

그레타 거윅의 연출 데뷔작 [레이디 버드]는 대학 진학을 앞두고 어떻게든 부모와 동네로부터 벗어나려는 10대 소녀의 불만과 욕망을 천연덕스럽게 밀어 붙입니다. [작은아씨들] 또한 가족의 위기 속에서 각자의 자립을 준비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레이디 버드]와 [프랜시스 하]의 밀레니얼 세대는 이제 엄마가 되었고 X세대나 부머 세대 때와 그다지 달라진 게 없는 듯한 남성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 세상을 자신의 ‘버블’ 안에서 살던 바비만 몰랐을 뿐이죠.

켄덤: 취약한 남자들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백은 바비 뿐 아니라 켄을 이야기의 핵심으로 끌어들이면서 켄의 각성까지 도전합니다. 남성 중심의 인간 세상에서 남자라는 이유로 존중을 받은 켄은 가부장제에 반해 바비랜드의 켄을 규합해 남자가 이끄는 ‘켄덤’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그 와중에 좋아하지도 않는 말(horse)이 남자의 이미지라며 여기저기 장식을 합니다. 말은 남근과 정력을 상징하지만 어린이 인형이자 성기가 없는 켄은 이 컨셉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맥주, 근육 운동, 자동차, TV 리모콘, 시네필, 인디(록)음악으로 이뤄진 ‘듀드(dude)’ 컬처는 켄 사이에서 유행처럼 빠르게 번집니다. 그가 좋아하는 노래는 한껏 꾸민 듯한 남성적인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하는 후기 얼터너티브 록 곡인 매치박스 20의 히트곡 ‘Push’입니다. 지금 들으면 그 촌스러움에 몸을 비비꼬게 되는 곡인데 잘 모르는 관객은 그 뉘앙스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바비가 켄에게 세뇌된 바비를 구하는 전략은 ‘맨스플레인’을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여자가 으레 잘 모를 거라 생각하고 뻔한 지식을 마치 강의처럼 늘어놓는 행태죠. 밀레니얼 힙스터 문화 자장 안에 있었던 노아 바움백과 그레타 거윅은 가부장제 버전의 켄에 2000년대 힙스터스러움을 덧씌웁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등장한 백인 남성 중심 청춘 영화는 대개 자신의 취약성을 반영해 자조하는 코미디와 드라마가 많았는데요. 마치 이상한 남자 주인공을 내세우기 경쟁이라도 하는 분위기였다 할까요. 라이언 고슬링도 이 시절 섹스돌을 여자친구 삼은 [내게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세대적인 스노비즘을 풍자하기 위해 [대부]에 대해 설명하는 켄과 '스티븐 말크머스'에 대해 의견을 말하는 켄이 등장합니다.(스티븐 말크머스가 누군지 몰라도 상관이 없는 이유는 이 분들이 남이 알건 말건 자기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전시한다는 것이 포인트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스티븐 말크머스는 밴드 ‘페이브먼트’의 리더로 당시 힙스터 분들에게 거의 인디계 신급 존재였달까요)

켄의 캐릭터는 취약한데다 상처를 과장합니다. 아픈 감정을 드라마틱하게 강조하는 남성의 노래방 인기곡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켄의 과도한 ‘Just Ken’ 퍼포먼스가 코미디로 다가올 만도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록, 발라드, 댄스뮤직까지 온갖 장르를 섞어가며 한껏 과장하고 바비를 강아지처럼 바라보며 울어 버리죠. 말도 안 되는 언어조합인 ‘모조 도조 카사 하우스’를 만들고 [코브라 카이]와 LA 메탈 스타일을 섞은 듯한 외양으로 군림했던 켄의 쿠데타는 영리한 바비의 공격으로 바로 제압이 됩니다.

사실 켄도 특정한 롤 모델 없이 멋져 보이는 이미지에 자신을 억지로 꿰어 맞추려 했던 것입니다. 이미 바비가 겪고 있는 실존적 위기를 켄 또한 겪고 있는 거죠. 바비랜드이든 켄덤이든 더이상 그들에게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매트릭스일 뿐입니다. 'Just Ken’만큼 바비의 주제곡 "What was I made for"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엄마가 딸을 위해 선물하는 인형'이라는 것이 바비라는 상품의 본질입니다. 엄마가 바비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딸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이는 바비의 고민이자, 마텔 기업의 고민이고, 페미니즘의 이후 방향을 논하는 여자들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혹은 더 근본적으로, 자신이 믿고 있었던 자신의 능력이 현실에 맞지 않아 좌절을 겪을 때 어떻게 스스로 효용감을 되찾고 자긍심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보통 여성을 위로하는 미국식 코미디

그레타 거윅의 가장 큰 성취는 한 물 간 페미니즘 상품에 현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과제를 해냈다는 것입니다. [에어], [블랙베리], [테트리스] 등 여러 IP 기반 영화가 브랜드에 그럴 듯한 문화적 서사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세대를 초월해 대중적인 공감을 얻은 작품은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와 [바비] 뿐입니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인간이 바비를 욕망하는 게 아니라, 바비가 인간을 욕망하게 만듭니다. 바비와 인간의 세계를 분리하고 양쪽을 경험한 중년 엄마를 배치해 바비와 함께 성장한 엄마를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비와 관계된 모든 인간과 창조물은 각자의 세계와 난관이 있고, 모두 상업적 페미니즘과 전통적 가부장제 판타지에서 벗어나 자아 정립에 나서야 합니다.  

인간 세상에 도착했을 때 벤치에 홀로 앉아 있던 바비는 옆에 있던 할머니에게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인형과 인간 사이 선택을 제시하는 것은 회사 대표가 아니라 바비의 창조주 루스 핸들러입니다. 독일 마론 인형을 자신의 딸 바바라에게 선물로 사줬다가 그 수요를 감지하고 딸의 이름을 반영한 바비 인형을 발명한 분입니다.

결국 [바비]의 여정은 바비가 엄마와 연결되어 그 사랑을 느끼고 바바라로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마치 [호두까기 인형]이나 [피노키오] 결말처럼 말이죠. 그 변화의 과정에서 여러 여성들이 경험하는 ‘가면 증후군'을 성장통으로 활용했다는 데 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이상적인 여성이 아니라 평범한 여성이 된 바비는 하이힐을 벗은 후에도 까치발이 유지되지 않는 신체 변화를 수긍하고 산부인과 검진도 받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바비]가 이룬 다른 성취는 미국 풍자 코미디의 바통을 이어받는 동시에 새 감각을 섞어 미국식 코미디의 부흥을 시도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비]의 LA 장면은 [엘프]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엘프]는 산타 마을에서 살다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고 아빠를 찾으러 인간 세계로 나서는 엘프가 등장하는 코미디 영화입니다. [엘프]로 코미디언에서 영화 배우 전환으로 성공한 윌 페럴이 [바비]에서 출연도 하죠. 놀랍게도 이 영화는 당시 그저 그랬던 배우 존 파브로([아이언맨]의 감독)의 연출 성공작이기도 합니다.

인간 세상에서 겪는 문화 충격이 모두 풍자 코미디가 되는 [엘프]처럼 바비도 구름 꼭대기에서 살다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문화 체험을 하며 웃음을 자아냅니다. [엘프]에서 윌 페럴은 자신이 대체적으로 비호감인데도 불구하고 마땅히 호감을 얻는 존재인 듯 귀엽게 행동하는 간극을 활용한 코미디를 선보였습니다.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서 조지 W. 부시를 모사하며 뜬 그는 철없는 백인 남자의 비호감적인 면을 굉장히 잘 포착해서 그 요소를 자신의 캐릭터로 활용해온 배우입니다. [바비]는 이런 2000년대 미국의 괴짜 코미디 전통을 계승합니다.  

바비랜드의 이상형인 바비는 현실에서는 외모에 과몰입한 정신 나간 백인 여자로 보일 뿐이고 그가 완벽 하려고 노력할수록 그 모습은 가식적이고 무개념적으로 다가올 뿐입니다. 주제 면에서는 [트루먼 쇼]가 더 가까울 수 있고 해맑은 바비 캐릭터는 짐 캐리가 연기한 트루먼을 더 닮아 있기도 합니다. 영화는 켄과 알렌의 어리숙한 남성 묘사로 사이드 킥을 날립니다. 라이언 고슬링은 알파메일과 거리가 멀고, 마이클 세라는 [주노]나 [수퍼배드]의 소년이 어른이 된 듯합니다.

윌 페럴의 SNL 후배 케이트 매키넌은 늘 그렇듯 몸을 사리지 않는 괴짜 개그로 씬 스틸러 역할을 잘 해냅니다. 짐 캐리, 윌 패럴, 애덤 샌들러, 벤 스틸러, 스티브 캐럴, 세스 로건, 제이슨 서디키스의 코미디,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들, [행오버] 시리즈, 그리고 노아 바움백의 우디 앨런스러운 코미디에서 우리는 수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벌이는 소동극에 공감하며 웃어 왔습니다. 티나 페이와 에이미 풀러 같은 여자 코미디 배우들이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여자가 동시대 감성을 공유하며 웃음과 위로를 안기는 메이저 코미디 영화는 극히 드뭅니다.

슈퍼히어로와 각종 프랜차이즈가 득세하면서, 소멸하거나 혹은 매너리즘에 빠졌던 남성 중심 괴짜 코미디를 현대화하고 더불어 밀레니얼 독립 영화 세대의 시점을 대중 영화에 불어 넣어 근래 본 미국 영화 중 가장 독창적인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데 그레타 거윅 감독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여성을 위한 [매트릭스] 이야기는 하이힐과 버켄스탁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바비가 바비 랜드의 혁명 전사가 되어 현실의 여성을 각성 시키고 가부장제를 무너뜨리는 거대한 3부작 여성 대서사가 될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그레타 거윅 감독은 여성 캐릭터가 원하던 독립에 도달하면 그 이후는 열린 결말로 놔둡니다. 여자 주인공은 결국 다른 환경에서 자립을 하게 되고 그게 끝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누구도 정답을 모르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영화를 본 후 머릿 속에서는 "What was I made for"가 계속 맴돕니다. 켄이 ‘켄 이즈 미(Ken is Me!)’를 주장하기 위해 정체성을 다시 고민해야 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해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는 여성 모두가 자신의 본질에 대해 바비처럼 의문을 해봐야 할 쉼표 같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정기적인 산부인과 방문도 챙기면서 말이죠. 🗽DJ 홍수경 | FB

📻 Beastie Boys - No Sleep Till Brooklyn

[바비] 사운드트랙은 동시대의 찬란한 팝스타 이름으로 가득하지만 관객이 가장 공감을 표하는 곡은 빌리 아일리쉬의 ‘What I was made for’입니다. 며칠 전 롤라팔루자의 빌리 아일리쉬 공연에서 관중들이 기다렸다는 듯 떼창을 하더라고요. 아마 내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가장 유력한 주제가상 후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하는 곡은 케케묵은 곡입니다.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 Vol. 3]의 클라이맥스에 삽입되어 유튜브 비디오 역주행이 벌어진 비스티 보이즈의 "No Sleep Till Brooklyn"인데요. 비스트 보이즈 음악에 열광했던 세대로서 참 반갑습니다. 최근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나 [닌자 터틀: 뮤턴트 대소동] 같은 뉴욕 브루클린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도 꾸준히 등장하는 곡이라, 좀 신기합니다. 뉴욕을 제외하고 특정 동네를 대표하는 곡이 이렇게 주목을 받은 사례는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너무 강렬한 곡이라 영화 장면을 기억하는 데 있어 정말 큰 도움을 준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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