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경의 핫아메리카노 | 미국의 20대가 '스페셜티 무비'를 찾는 이유

TMI.FM의 DJ 홍수경(Janis Hong) | 영화 잡지 기자로 일하며 한국 영화계의 대소사를 기록하다가 미국 뉴욕으로 이주, 그곳에서도 각종 영화 및 팝컬쳐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영어권 음악만 듣던 팝 덕후가 뒤늦게 미국에서 케이팝 팬으로 거듭났고, 최근에는 [기생충] [미나리] [오징어 게임] 등의 작품 덕에 한국과 미국의 접점에 집중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북미주재원으로 활동 중.

뉴욕 예술영화관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노인 관객들의 비율이었습니다. ‘미국 영화 망하는 거 아니냐’라며 괜한 걱정을 할만큼 관객이 적었는데, 그 대부분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관객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어요. 영화를 즐길 시간적 여유와 노인 할인 혜택으로 저렴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는 분들이었죠. 

20대 시절부터 한국에서 작은 극장들을 들락거리며 또래들과 영화 얘기하느라 정신없던 사람으로서는 꽤 당황스러운 풍경이었어요. 물론 지난 몇 년간 영화제를 다니면서 노년 기자나 평론가가 다수인 걸 목격하며 이제는 영화가 그리 젊은 매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만요. 아, 이런 얘기를 꺼내면 평행 우주에서 갑자기 날아온 20세기 옛날 사람 취급을 받을 것 같네요.

어쨌거나 미국에서는 소위 ‘스페셜티(Specialty)’ 영화라고 부르는 예술 영화의 코어 관객층은 30대 이상이었어요. 그런데 팬데믹 기간 동안 이 분들이 극장 출입을 중단했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거대한 성공

대신, 신기하게도 20대가 예술영화관을 찾기 시작했어요. 돌이켜보면 [기생충]의 폭발적인 인기도 밀레니얼과 젠Z 관객 때문에 더 큰 화제였잖아요? 미국의 어르신 관객들이 유럽 예술 영화 취향을 고수하는 것과 달리, 미국의 20대 예술 영화 관객은 아시아 영화에 좀 더 열려 있습니다. 팬데믹이 끝나가자 이들은 스트리밍 서비스의 알고리즘으로는 접하기 힘든 극장 영화를 찾아나섰는데요, 올해 봄에 미국에서 개봉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성공이 그 명확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10월 12일에 개봉했어요)

2022년 주류 영화계에 [탑건: 매버릭]이 있었다면 비주류 영화계에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있습니다. 톰 크루즈를 보는 아저씨들이 감동의 눈물을 멈추지 못할 때, 젊은 세대는 차이나타운의 흔한 아시안 아줌마 옷차림으로 쿵푸를 하는 양자경(미셀 여)에게 빠져들었죠.

이 영화는 [문라이트] [미드소마] [레이디버드] [미나리] [애프터 양] [그린 나이트] 등 쿨한 독립영화 배급하기로 유명한 배급사 A24의 영화입니다. 3월 24일 미국 10개관에서 개봉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뒤 상영관을 1200개 이상 늘리며 박스오피스 5위로 올라섰죠. 개봉 두 달 뒤에는 A24 최고 흥행작이었던 [언컷 젬스]의 기록을 갈아치웠고요. 7개월이 넘어가는 지금(2022년 9월) 시점에도 극장에 걸려 있습니다.

혼자 온갖 멀티버스를 오가면서 북치고 장구치고 너구리와 추격전도 벌였던 주인공 양자경은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됩니다. 윤여정 배우가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받은 뒤 또 아시아 배우가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쥘 확률이 높아요.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작품상, 각본상, 감독상, 편집상 등등의 막강한 후보로 등장할 것 같습니다. 

이 독특한 예술 영화의 엄청난 성공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예술 영화 관객층이 바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브랜드로서 A24가 젊은 층에 신뢰를 얻고 있다는 것. 예술 영화 관객층이 바뀌었다는 것은 조금 더 파고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브랜드'로서의 극장

얼마전 열린 취리히 영화제에서는 흥미로운 패널 토론이 있었어요. ‘나이든 관객이 팬데믹 이후에 극장으로 돌아올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A24와 네온(Neon, 기생충의 북미 배급사였죠) 관계자 및 유럽 극장 실무자들이 대담을 나눴어요.

그들이 주목한 것 중 하나는 팬데믹 이후 젊은 층의 영화 소비였는데요. 팬데믹이 끝나가는 가운데, 스트리밍 서비스의 알고리즘 기반 컨텐츠 감상과는 다른 독창적이고 새로운 영화 경험을 기대하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앳 올 원스]를 보러 왔고 영화는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었다는 것이죠.

극장 운영자들은 이제 예술영화관이 ‘Whole experience’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감독과 배우를 직접 만나서 유대감을 가지는 공간이자, 친구나 연인과 와인 한 잔 하며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영화에 대한 충성도를 쌓고 커뮤니티로 확장되는 공간.

“극장 자체가 크리에이티브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고 베를린 예술영화관 대표가 말했죠. 이어서 스위스 예술영화관 대표가 “도시의 예술 영화관은 극장뿐 아니라 갤러리와 뮤지엄 오프닝, 다양한 문화 이벤트와도 경쟁한다”고 말했을 때, 그 존재감이 확 와 닿았어요. ‘스페셜티’ 영화를 고르는 기준도 조금 바뀌었다고 해요. 기분 좋은 코미디나 따뜻한 가족 드라마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지난 여름 뉴욕의 큰 시네마테크에서 홍상수 감독 회고이 열렸습니다. 단편을 포함해 홍상수의 모든 작품을 상영했죠. (외국 시네마테크에서 홍상수 감독의 입지는 상상 이상이랍니다) 비바람이 치는 날, 저는 홍상수 감독의 대담을 보려고 극장 밖에 서 있었는데, 함께 줄을 선 사람들이 모두 20대 초반처럼 보여서 또 놀랐더랐죠. (그러고 보니 이 회고전의 제목도 [홍상수 ‘멀티버스’]였군요)

올해 토론토 영화제에서도 그 젊은 기운이 이어졌어요. 드디어 캐나다가 국경 출입 규정을 완화한 덕분에 토론토 영화제는 2년 만에 온전한 대면 영화제로 열렸죠. 곳곳에는 젊은 관객들이 줄을 서서 영화 상영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초창기 부산영화제를 보는 기분이었달까요. 큰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팬데믹이 끝나가면서 더 간절해졌을 지도 모르죠. 스트리밍 세계를 벗어나 오랜만에 극장에서 [탑건: 매버릭]을 본 관객들도 입을 모아 “이게 영화지!”라고 외치지 않았던가요? 극장에서 영화를 본 사람들만의 유대감을 오랜만에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아이맥스를 차지하는 예술영화들

A24는 꽤 많은 작품을 가을 시즌 영화제에서 선보이는 중입니다. 브랜든 프레이저의 컴백작 [더 웨일(The Whale)], 제니퍼 로렌스 주연의 [코즈웨이(Causeway)], 아마도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부문에서 [헤어질 결심]과 접전이 예상되는 [클로즈(Close)] 가 영화제 화제작들이죠. 최근 A24는 회원잡지와 굿즈를 제공하는 회원 구독권 판매도 시작했는데요. 과연 이런 브랜드 멤버쉽 전략이 추후 흥행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해집니다.

[기생충]을 배급했던 네온도 어느덧 브랜드로 자리잡았습니다. 최근 개봉작인 데이빗 보위를 다룬 다큐멘터리 [문에이지 데이드림(Moonage Daydream)]은 조용하게 흥행에 성공했죠. 영화제 화제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다시 말해, 영화제에 갈만큼 수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를 포함한 데이빗 보위의 충성스런 팬들이 시청각적 경험을 위해 기꺼이 극장을 찾았어요. 무려 아이맥스로 개봉했거든요.

여담이지만 요즘 미국 극장은 ‘공급 부족 사태’를 겪고 있어요. 수퍼히어로 무비를 제외하고 블록버스터가 모두 스트리밍 서비스로 가버리는 바람에 다음 수퍼히어로 영화까지 큰 영화가 없는 상황이에요. 덕분에 예술영화가 아이맥스 상영관을 차지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거죠.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작품 구매로 유명한 네온은 올해도 역시 [슬픔의 트라이앵글]을 샀습니다. 그리고 한국영화 [브로커]도 샀죠. 그런데 [헤어질 결심]은 특이하게도 이제 막 미국 극장 배급 사업을 시작한 예술영화 스트리밍 서비스 뮤비(Mubi)라는 곳에서 구매했어요. 예술영화 틈새 시장을 발견한 뮤비는 스트리밍 서비스와 극장을 엮는 새로운 예술영화 배급사가 되려고 노력 중이에요.

경험이 미래다

집밖에서 특이한 경험을 원하는 젊은 층이 예술영화관을 찾고, 그 기대에 부응하는 예술영화가 지속적으로 공급된다면 예술영화관은 지속가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팬데믹 시기에 많은 극장이 문을 닫았고 국제적인 기름값 인상이 극장 운영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예술영화와 예술영화관의 미래가 그리 암담한 건 아니라는 거죠. 초점은 ‘경험’입니다.

스트리밍 서비스와 공존하면서 차별화하는 전략은 ‘극장 경험’이고 이는 거대 멀티플렉스가 추구하는 효율적인 방향과는 꽤 달라보입니다. 관객 수도 중요하지만 계속 비슷한 영화를 보러 같은 극장을 찾는 충성심 어린 단골 관객층도 성장해야 하거든요. 주류 영화가 아닌, 비주류이자 예술영화로 미국 시장에 진입하게 되는 한국 영화에도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 스페셜티 영화계는 이번 가을과 겨울 시장을 포스트 팬데믹 지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영화제로 입소문을 점유한 영화들이 대거 극장에 공개되고 아카데미 시상식을 향해 달려가는 이 시즌은 예술 영화 시장의 성수기이기도 합니다.

상반기의 기적을 일으킨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포함한 모든 영화들이 본격적인 홍보전에 돌입하는 거죠. 미국에서 10월 14일에 개봉한 [헤어질 결심]도 그 중 하나인데요, 이 종잡을 수 없는 변화의 시기에 또 하나의 한국 작품이 유의미한 지표를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 DJ 홍수경 | janis.hong@gmail.com

📻 Son Lux, Mitski, David Byrne - This Is A Life |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미국의 실험 뮤지션 선 럭스가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사운드트랙을 맡아 멀티버스 사운드를 선보입니다. 현재 가장 핫한 뮤지션 중 한 명인 미츠키와 살아있는 전설(!) 데이빗 번이 함께 부르는 주제곡 "This is a life"는 사소한 일상에 심오한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는 영화의 유머 감각을 잘 드러내죠.

영화를 보고 나면 유튜브 영상에 떠 있는 동그란 물체의 정체도 알 수 있고, 데이빗 번의 코러스에 폭소를 터뜨리면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멋진 가사와 정말 완벽한 보컬 조합인데요. This is a life free from destiny. 네, 인생은 모를 일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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