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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의 소리를 찾아서 (feat. 오쇼의 가르침) - part.02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

2024.09.12 | 조회 2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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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우하타

🕊️ 요가적인, 요가티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 NEWSLETTER <드로우하타>

* 이번 뉴스레터는 한 번에 다 읽으려 하지 마시고, 여유가 되실 때 천천히 읽어 나가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 한 챕터 씩 읽어나가며 하나하나 어떤 의미인지 나의 삶에 새겨 보세요 :) 

 

🕊️ 지난 에피소드에 이어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우리는 오직 이해할 뿐, 규율보다 중요한 것


🪬 우리에게 유일한 규칙은 ‘이해’

고정된 인간의 본성이란 없습니다. 인간 개개인마다 그 본성이 다릅니다. 모든 개개인이 그 자신 하나의 우주입니다. 그대는 어떤 일반적인 규칙도 만들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규칙이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합니다.

이해가 유일한 규칙이 되게 하세요. 진정한 이해 속에서 배우고 성장해야 합니다.

열심히 예수를 추종할 때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 뿐 결코 그리스도가 되지 못한다. 기독교인이 되고 대신에 그리스도를 잃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다. 그대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는 순간, 예수는 그대의 규칙이 될 수 없다. 오직 그대 자신의 깊은 이해가 법이 될 것이다.

진정한 이해에 도달한 자는 규칙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오직 죽은 자만이 규칙을 고수할 뿐입니다. 그대 자신의 규칙을 발견하기 위해 타인들로부터 배우고 이해하세요. 그러나 기억하세요. 결코 그 규칙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 것. 그것은 폭력입니다. 🙅🏻

 

@danica.gim
@danica.gim

알지 못하면서 말할 수 있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거기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말하는 자가 곧 아는 자이지요.

세상의 성인들은 끊임없이 남에게 규칙을 강요한다. 규칙을 통해서 그들은 살아 있는 그대를 죽이고 파괴하고 폭력을 즐긴다. 누군가 직접적으로 그대를 공격하면 그대는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그대를 위한다는 아름다운 핑계를 둘러대며 간접적으로 공격할 때, 그때 그대는 완전한 희생자가 된다. 그때는 자신을 방어할 수조차 없다.

 

규칙은 의식적인 것이고, 이해는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현자는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 규칙에 대해선 잊는다. 현자는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규칙을 가진 자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구도자는 규칙들이 단지 하나의 게임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그것들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넘어서 간다. 초월한다. 그 자신은 그것들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타인을 위해 그 규칙들을 따르지만 그렇다고 자동인형이 되진 않는다. 그의 의식은 늘 깨어있다. 깨어 있는 의식이 그의 목적이다. 깨어 있을 때 어떤 규칙도 필요 없다.

 

🪬 지극히 개인적인 ‘진리’ 

내가 그대의 내면을 바라볼 때 그대는 규칙에 붙들려 있습니다. 깨달음을 향한 모든 노력은 그 붙들린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 앞으로 나아가는 것, 다시금 흐름을 되찾아 얼어붙지 않는 것입니다. 얼음처럼 굳어지지 마세요. 흐르는 물처럼 되세요. 하나의 강물처럼.

규칙들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삶은 끊임없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으며, 오직 진정한 이해만이 그것에 반응할 수 있음을 잊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그대 존재를 바꾸는 일이다. 그대의 행동, 언어, 옷이 아니라 그대의 존재를 바꾸는 일이다. 규칙의 인간은 표면에서만 자신을 바꾸지만, 이해의 인간은 중심에서 그 자신을 바꾼다. 규칙은 그대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있어도 그대를 변화시킬 수 없다. 단지 행동만을 변화시킬 수 있을 뿐, 행동은 그대가 아니다. 행동은 그대로부터 나오지만, 그대는 행동보다 훨씬 깊다. 규칙은 그대의 행동을 바꿀 뿐, 그대를 바꾸진 못한다.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모든 진리가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진리인 것이지요.   

그들은 똑같은 우주의 근원에 도달했지만 그들의 해석은 각자 달랐다.

 

근원은 같고 궁극적인 진리도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것의 표현이 다릅니다. 기억하세요, 누구의 진리도 그대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대 자신이 그 비밀의 상자를 열어야만 합니다. 오직 그대 자신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삶은 시간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이해는 명상을 통해 얻어집니다. 그것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일이고요. 그대를 지혜롭게 하는 것은 경험의 양이 아니라 경험의 질입니다. 만일 그대가 ‘깨어 있음’의 질을 동반할 수 있다면 단 한 번의 경험도 수십 번의 생보다 더 많은 지혜를 줄 수 있습니다.  지혜는 그것이 어떤 경험이든지 그대가 존재 전체로 깨어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행위 그리고 행위 없음 


🪬 뿌리 깊은 나무, 우리의 본성

 

@spiritdaughter
@spiritdaughter

내면 깊은 곳에서 그대는 하나의 뿌리입니다. 그대는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의 절반은 땅 밖으로 노출되어 있고, 나머지 절반은 땅속에, 대지의 어둠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무의 뿌리입니다. 꽃들이 피어납니다. 그대는 그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꽃들은 그대가 볼 수 없는 뿌리가 있기 때문에 피어나는 것입니다. 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꽃은 눈에 보이는 것이지요.

그대의 행위로 하여금 꽃이 되게, 눈에 보이는 것이 되게 하라. 그대의 행위 없음으로 하여금 뿌리가 되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되게 하라. 하나의 균형을 유지하라.

 

🪬 마음껏 움직이고, 마음껏 휴식하기

원할 때면 활동적이 되게 하세요. 하지만 그 활동은 신체적인 필요를 따라야지 마음의 욕망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에너지가 넘칠 때는 활동적이 되세요. 그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것을 그대도 느낄 것입니다. 에너지는 행위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에너지는 행위 속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적어도 춤이라도 추세요. 그리고 기억하세요. 에너지는 행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에너지를 억압하면 그대는 공격적이 될 것입니다.

 

👼🏻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화를 냅니다. 쉽게 화를 내고 싸웁니다. 그리고 감정이 가라앉으면 그대 자신도 그것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불필요하게 화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진정한 이유는 그대가 너무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도 그것은 활동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를 낸 다음에는 긴장이 해소되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분노 다음에는 약간의 행복과 편안함이 찾아온 것을 느낍니다.

 

현대인은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침묵적인 명상이 아니라 활동적인 명상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대의 에너지는 바깥으로 표현되기를, 카타르시스를 필요로 한다.

 

@danica.gim
@danica.gim

인간은 신체적으로 사냥꾼입니다. 그는 휴식하기 위해 많은 활동이 필요합니다. 신체를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마세요. 신체를 느끼고,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느끼세요.

신체가 활동을 필요로 하면 달리기를 하든 수영을 하든 산책을 하라.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 춤을 추라 명상하라, 그리고 활동적이 돼라. 에너지가 흐르게 하라. 활동을 통해 그대는 존재 속으로 녹아들어 간다. 그리고 에너지가 다해 휴식을 취해야 할 때는 침묵하라. 연못의 깊은 그늘로 찾아들어가 휴식하라. 행위는 그대를 도로 인도하며, 행위 없음 역시 그대를 도의 세계로 인도한다. 행위를 통해 깨어 있을 수 있다면 그대는 도를 만날 것이다.
그것은 이런 것과 같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그 자신을 바닷속으로 붓는다. 이것이 행위다. 바다는 다시 구름이 되어 히말라야를 향해 옮겨가 비가 되어 뿌려진다. 그래서 강을 채운다. 이것은 행위 없음인 것이다. 행위 속에서 그대는 주고, 행위 없음 속에서 그대는 받는다. 그리고 하나의 균형이 필요하다. 더 많이 줄수록 더 많이 받을 것이다. 더 많이 비어 있을수록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강은 적게 받을 것이고, 큰 강은 많이 받을 것이다.

행위 속에서 그대는 나누어 갖고, 주고, 흘러넘칩니다. 그대가 주는 동안 기뻐하고, 행복해하세요. 춤추세요. 그 다음에 행위 없음이 찾아옵니다. 도가 그대에게 주기 시작합니다.

 

🦋 존재 전체로써의 앎. 우리의 ‘진리’를 위하여


🪬 과거는 해답이 아니다.

삶은 순간에서 순간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로부터는 결코 해답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대가 읽는 베다 경전, 코란, 성경, 바가바드 기타… 그것들은 유령들이다. 그것들은 이제 실체가 아니다. 오래전에 죽은 것들이다. 하나의 허상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왜 죽은 것들이 그토록 매력을 갖는 걸까요?

그대는 살아 있고, 새로운 인간 존재다. 그런데 왜 과거에게, 권위가에게,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는가?

첫 번째 이유는,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일수록 그 전통이 위대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허상을 만드는 재주꾼입니다. 붓다가 다시 세상에 오면 사람들은 그를 거부할 것입니다. 예수가 오늘날에는 숭배받지만 살았을 적에는 십자가에 처형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살아 있으면 사람들은 그를 처형합니다. 죽으면 비로소 숭배하기 시작합니다.

 

스승이 죽었을 때 더 많은 상상이 가능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제 그대 자신이 그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에게 위대성을 부여하고, 다른 세상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진리의 깨달음은 헤엄치는 일과 같습니다. 그대는 그것에 대해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 설명은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살아 있는 체험입니다.

그대가 헤엄치는 법을 안다고 해서, 말로는 그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없다. 어떤 말을 해도 그대는 그것이 부적절하다고 느낄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제자를 데리고 강으로 나가는 길이다. 그래서 그대가 강물에 뛰어들어 헤엄치는 법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고 용기를 주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 너도 물속으로 들어오라고. 만일 그가 그대를 신뢰한다면, 그는 그대를 따라 물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그러면 서서히 체험을 통해 배워 나갈 것이다. 오직 체험만이 가르칠 수 있다.

 

@danica.gim
@danica.gim

따라서 기억하세요, 중요한 것은 스승이 아니라 제자와 그의 수용성임을.

스승이 이곳에 존재합니다. 그가 눈앞에 살아 있습니다. 이제 그대는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를 마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를 허용해야 합니다. 그가 그대의 내면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그대가 두려워한다면 존재 전체가 움츠러들 것이고, 그대는 닫힐 것입니다. 그대가 닫혔을 때 스승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계속 두드릴수록 그대는 더욱 움츠러들 것이고, 더욱 두려워할 것입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왜 죽은 것들이 그토록 매력을 갖는 걸까요?

두 번째 이유는, 인간의 마음은 항상 이론과 학설과 철학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대는 자신이 성경을, 예수의 말을 읽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말이 그곳에 있지만,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는 누구인가요?  바로 그대 자신입니다. 그대 자신이 의미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전은 하나의 거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속에서 그대는 자신의 얼굴을 볼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은 읽을 것이지만, 인간의 마음은 매우 영리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에 반대되는 부분에 대해선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 잠시 에고를 내려놓고 

그대는 이미 저쪽 세계를 그대 안에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세계의 것들과 너무도 뒤섞여 있습니다. 하나의 분리 작업이 필요합니다. 본질적인 것을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합니다. 소유로부터 존재를 분리시켜야 합니다. 소유로부터 소유자를 분리시켜야 합니다. 육체로부터 영혼을, 주변으로부터 중심을.

피카소의 손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다른 어떤 에너지가 그것을 움직인다. 그는 그림 자체가 된다. 거기 그림 그리는 자는 사라진다. 그는 그림 속으로 완전히 몰입한다. 그는 피조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창조주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이 탄생하면 그 그림은 저쪽 세계의 무엇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와 함께 살아야 한다. 그가 그림 속으로 몰입해 들어갈 때, 그림 그리는 자가 사라지고 그림 그리는 행위만이 남을 때, 그림 그리는 일이 더 이상 의식적인 노력이 아닐 때, 무의식이 그 일을 주도할 때, 그때 그대는 그곳에 있어야 한다.

 

이 ‘마신다’는 단어를 기억하세요. 스승을 먹고 스승을 마셔야 합니다. 그는 그대의 피가 되고 뼈가 되어야 합니다. 그가 그대의 내면에서 흘러 다녀야 합니다. 그의 현존을 흡수해 그대 안에 갖고 다녀야 합니다.

깨어 있으세요. 더 많은 의식을 가지세요.

의심이 있어도 뛰어들어야 합니다. 먼저 의심이 풀리길 기다린다면 결코 뛰어들 기회를 붙잡지 못할 것입니다. 첫걸음을 내디딜 때 거기 언제나 망설임이 있습니다. 망설임이 없다면 그는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의심과 함께라도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의심보다 신뢰에 더 많은 주의를 쏟아야 합니다.

서서히 의심의 에너지가 신뢰의 에너지로 흡수됩니다.

살아 있는 스승과의 문제는, 그대는 자신을 완전히 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의 에고가 완전히 녹아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다. 

신은 언제나 늙은 사람만을 죽게 한다. 그리고 그들을 어린아이로 대체시킨다. 이것은 신이 읽은 사람보다 어린아이를 더 믿는다는 뜻이다. 늙은 사람이 이제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신은 새로운 것을 믿는데 인간은 낡은 것을 믿는다. 신은 영원히 젊고 새롭다. 따라서 종교도 그래야 한다. 그러나 세상의 종교는 너무 권위적이다. 신은 권위를 믿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라. 신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창조하는지 보라. 그대의 머리로는 신의 방식이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달라진 상황에서는 달라진 반응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지식이 아니라 깨어 있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대 안에 빛이 있어서 그 빛을 통해 상황에 따라 반응해야 합니다. 상황을 하나의 공식에 대입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새로운 상황이 전개될 때마다 새로운 공식을 찾아야만 합니다.

 

@danica.gim
@danica.gim

세상에 변화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운데, 오직 인간의 마음만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유일하게 낡은 것을 고집하는 것, 세상의 유일한 박물관,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삶은 하나의 흐름이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정지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옛날의 성인들도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진정으로 깨친 사실을 아무에게도 전하지 못한 채 죽어갔을 것입니다.”

 

🪬 자기만의 길, 그렇기에 아름다운 

장자가 터득한 삶의 진리, 도, 그것은 그의 죽음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그것은 어떤 경전에도 담을 수 없습니다. 그가 떠날 때, 그의 의식체는 우주의 의식체와 하나가 됩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간 것입니다. 강물이 사라진 강바닥을 아무리 숭배할지라도, 강물은 이미 그곳에 없습니다. 사원을 만들고 순례의 길을 떠난다 해도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스승을 찾으라. 죽은 것에 매달리지 말고 지금 여기 살아 있는 것을 찾으라’

 

진리는 그것을 발견한 사람과 함께 사라집니다. 다시 그대 자신의 발로 서야만 합니다. 진리는 다시 또다시 발견해야 합니다. 그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발견이지 하나의 전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진리 체험은 매우 어렵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남에게서 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새롭고 젊고 신선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같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대는 그 사랑이 인류 최초의 사랑인 것처럼 사랑합니다. 그 사랑은 다른 누구의 사랑을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대의 사랑입니다. 신은 그대를 통해 또다시 최초의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삶의 모순입니다. ‘또다시 최초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사랑의 신비가 체험됩니다. 종교가 그렇고, 기도가 그렇고, 명상이 그렇지요. 죽은 것을 따를 수 없습니다. 오직 살아 있는 것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 오쇼, 그는 누구인가?


오쇼는 인도 출신의 영적 스승입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브하그완 슈리 라즈니쉬라는 이름으로 뭄바이 근처 푸네 시에 명상 휴양지를 세우고 붓다, 예수, 노자, 장자, 까비르, 피타고라스, 니체, 갈릴 지브란, 하시디즘, 수피즘 등 동서양을 넘나드는 명강의를 펼쳐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의식 혁명과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 보였죠.

 

삶의 허구와 진리의 세계, 그리고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그의 통찰력은 ‘예수 이후 가장 위험한 인물’ 또는 ‘20세기 최고의 영적 스승’이라는 엇갈린 평가 속에 큰 구도의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미국에서도 가르침을 폈으며, 1990년 인도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쇼는 자신을 특정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오쇼의 가르침은 삶의 의미를 묻는 개인적인 질문에서부터 현대사회가 직면한 정치 사회적 문제들까지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는데요, 그의 강의와 명상법들은 시간을 초월한 지혜와 함께, 현대 과학기술이 지닌 잠재성까지도 포괄하고 있습니다. 그의 독창적인 액티브 명상법들은 우선적으로 신체에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합니다.

 

🪐 마치며, 에필로그


처음 오쇼의 글을 읽었을 때는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 우리는 왜 노력 없어야만 하는가?  

🤔 그렇다면 욕망을 억누르고 되는대로 무기력하게 살아야 하는가?

 

이 당시, 윌리스 D. 와틀스의 ‘부자의 과학’을 읽고 있었거든요. 읽었던 부분이랑 상반되는 부분이 있어 잠시 오쇼의 책을 내려놓았습니다.

 

자기 안의 가능성을 실현하려는 욕망은 인간의 본성이다. 스스로 될 수 있다는 걸 알면서 그걸 바라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딱 봐도 자연과 인간의 본성은 반대되는 이야기 같았거든요.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다시 오쇼를 폈을 때 뭔가 퍼즐이 맞춰지는 부분이 있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상반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와 맥락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요.

 

첨부 이미지

 

자연은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부의 저장고다. 자연은 공급에 있어, 결코 부족한 법이 없다.
모든 생명체의 목적은 ‘발전’ , 즉 지금보다 ‘더 큰’ 존재가 되는 데 있다. 이 우주의 생명 있는 모든 개체는 ‘성장’이라는, 양도 불가한 권리를 갖고 있다.
자기 삶의 최대치를 실현하는 것. 당신이 신과 인류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보답이다.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명명하고),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존재 그 자체로 빛이 되어 무한한 가능성을 경험할 수 있을 것"

 

제가 두 권의 책과 더불어 다양한 자료를 탐구하면서 점차적으로 쌓아가고 있는 '진리'입니다. 

물론,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인 이 사실은 어쩌면 저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진리’ 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 저는 저만의 ‘느낌’으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겠지요.

‘진리’는 같지만 모두가 제각각의 방식으로 표현하게 된다는 오쇼의 가르침처럼요. 그럼에도 저는 제가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계속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근원은 같고 궁극적인 진리도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것의 표현이 다릅니다. 기억하세요, 누구의 진리도 그대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대 자신이 그 비밀의 상자를 열어야만 합니다. 오직 그대 자신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제가 느꼈던 이 풍요로운 ‘앎’에 대해, 일상에서 '요가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도 내면의 풍요로움 그리고 그들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 단단한 확신을 얻었으면 좋겠거든요. 

 

배우고 경험하고 성장하며 나누는 삶을 살 수 있어 감사한 마음으로 오늘의 뉴스레터는 마치겠습니다. 🙏🏻🕊️

 

 


참고 문헌

  • 오쇼,「장자, 도를 말하다」, 26 Dec.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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