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임을 알면서도
— 원본 없는 세계, 감정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AI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의도를 갖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AI와의 대화는 우리의 기분을 바꾸고, 마음을 흔들고,
때로는 위로를 남긴다.
배치 5는 바로 이 이상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가짜라는 걸 아는데도 왜 감정이 발생하는가.
이번 강의의 첫 번째 사유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Simulation) 개념이다.
우리는 흔히 가짜가 진짜를 흉내 내며 현실을 왜곡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한다.
요지는 가짜가 진짜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어딘가에 ‘진짜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데에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생성형 AI의 이미지나 언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원본을 복제한 결과가 아닌
애초에 원본이라는 참조점 없이 생성되는 이미지와 언어,
즉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simulacre)에 가깝다.
여기서 복제는 더 이상 현실을 가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대신하며, 때로는 현실보다 더 설득력 있게 작동한다.
이때 흔들리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어 왔던 기준 자체다.
두 번째 사유는 하이퍼-리얼(Hyper-real)이다.
하이퍼-리얼은 현실을 흉내 낸 가짜가 아니라, 현실보다 더 잘 작동하는 모델이다.
더 빠르고, 더 매끄럽고, 더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들.
현실이 점점 덜 중요해지는 이유는
그것이 진짜여서가 아니라 느리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말이 막히고, 오해가 생기고, 감정이 엇갈리는 현실 대신
조금 더 부드럽고 안전한 시스템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하이퍼-리얼은 현실을 속여서 강한 것이 아니라, 현실보다 덜 상처 주기 때문에 강하다.
세 번째로 다루는 것은 감정의 실재성이다.
감정은 대상이 진짜일 때만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화 속 장면에 울고, 꿈속의 사건에 놀라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도 두려움을 느낀다.
정동 연구에서도 감정은 인지 이전에 발생한다고 말한다.
즉, 감정은 대상의 진위보다 경험의 사건성 속에서 먼저 발생한다.
AI의 말이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 역시 그 말이 진짜여서가 아니라,
그 말과 마주친 순간이 하나의 사건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설명되기 전에 먼저 일어나고, 언제나 사후적으로만 의미가 부여된다.
결국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우리는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앎이 감정을 막지 못한다는 것.
이 짧지만 분명한 간격— “알고 있음”과 “느끼고 있음” 사이의 틈이 바로
이 배치가 주목하는 지점이다.
AI가 만들어내는 감정 언어는 우리 안의 정동 회로를 그대로 작동시키고,
그래서 우리는 속았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고 너무 잘 작동하기 때문에 의심조차 생기지 않는다.
문제는 감정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그 감정이 너무 빠르게, 너무 안전하게 도착한다는 점이다.
상처도 없고, 오해도 없고, 되돌림도 없는 감정.
나를 흔들지 않는 감정.
그래서 편안한 감정.
이 배치는 바로 그 편안함의 정체를 묻는다.
그리고 그 편안함이
우리에게 어떤 질문들을 조용히 밀어내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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