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후의 기도

성폭력 피해자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피해자일까

2026.10.07 |

 

가끔은 내가 성폭력 생존자라는 사실을 잊기도 한다. 그런 걸 24/7, 시시각각 떠올리고 느끼며 살기엔 이젠….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상처는 아물기도 하니까.

더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물론 일부 영향을 미치기도 했겠지만- 사건 취급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런 일이 있었지. 맞다. 아주 어릴 때 연필로 찍힌 상처가 잘 안 보이는 데에 있다고 생각해 보자. 부러 시간을 들여 그 흔적을 관찰하지 않는 한, 누군가 ‘어? 여기 흉터 같은 게 있네?’라고 콕 집어 물어보지 않는 한, 우리는 그런 상처가 있다는 걸 평소에 굳이 의식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성폭력 사건은 그런, 사소하고 흐려진, 그러나 존재하는 흉 같은 일이 된 것 같다.

‘사건’이라고 부르긴 애매하다. 그 사건은 몇 개월에 걸쳐 일어났고, 더 길게 추적해 보자면 몇 년에 걸쳐 일어난 일이다. 미성년자 학생을 대상으로 한 그루밍 성폭력이었다. 나는 오랜 기간 가해자에게 길들여졌고, 주변 사회(가족이나 친구 등)와 단절된 정서적 고립 상태에서 피해당했다.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괴로운 시간을 보냈었다. 그리고 나는 성장했다. 이건 그 상처에서뿐만이 아니다. 그냥 사람은 언제든지 변화한다. 굳이 그런 피해를 보지 않았어도 누구나 한 사람의 10대 중후반과 20대 중후반을, 그리고 30대 중반을 비교해 놓고 본다면 조금씩은 변화한다. 같겠지만 어느 정도는 다른 사람이 된다. 시간도 흐르고 세상도 바뀌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때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은 내게 마치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일이 내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는 건 또 아닌데. 그때의 나에겐 큰일이 맞았는데, 흐려지고, 멀어졌다. 아득해졌다. 17년 전의 일을 여전히 생생히 아프게 느낀다면 그것 나름대로 허무한 인생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해자는 잘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솔직히 별로 관심도 없다. 멀어진 후 얼마간은 그가 나에게 집착한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실제로 그런 정황을 찾았던 적도 있다. 무슨 소용이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된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그렇듯 가해자도 더는 나에게 관심을 껐을 수도 있다. 정말. 17년이나 지났으니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고 또 그렇게 엄청나게 거부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그저 그렇다.

이 피해에 대해 폭로한다든지, 가해자를 벌해달라고 탄원한다든지의 행동을 취하기엔 난 현실의 다른 일들로 인해 이미 지쳐있다. 할 일이 있다. 시간을 내서 뭔가 해야 하나? 그렇게까지 화나 있지도 않다. 그런 강렬한 감정은 많은 시간 속에서 깎였고, 삼켰고, 소화됐다.

성폭력 피해자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괴로울까? 아니. 별로. 언젠가는 괜찮아진다. 무엇이든지 흐려지듯이.

다만 나의 인격을 시나브로 무너트리면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자 했던 비열한 인간이 매일 자신도 알 수 없는 만큼 조금씩 덜 행복하길. 잃어버린 행복들이 불행이 되어 고요하고도 잠잠히 그를 집어삼키길. 결국, 길잃은 그가 외벽에서 소리를 지를 때 아무도 손 내밀어 주지 않기를, 아주 가끔 마음속으로 기도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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