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능 프로그램 <노는 언니>에서 출연자들의 미술 심리 테스트를 한 적이 있다. 이때 각자의 그림을 분석하던 전문가가 흥미로운 지적을 했다. 개인종목인 박세리나 남현희, 정유인은 곧바로 자기 그림을 쓱쓱 그려나가는데, 단체종목인 한유미, 김온아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둘러본 뒤에 시작하더라고. 아마도 단체종목의 좋은 점 중 하나일 것이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묻어갈 수 있다는 것.
— 옛날부터 사람들과 자주 했던 얘기가 있다. 만약 내가 운동을 했다면 개인종목은 절대로 안 했을 거라고. 아니, 못 했을 거라는 말이 정확하겠다. 홀로 면도날 위에 서 있는 듯한,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독의 순간을 견뎌낼 자신이 없다. 하긴 내 성질머리에 단체종목이라고 제대로 하겠냐만.
— 어제 포르투갈전 보고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라스트 댄스>가 떠올랐다. 마이클 조던은 유능한 리더일지는 몰라도 온화한 리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팀원들이 자신의 성에 차지 않으면 악랄하게 모욕을 주며 자극했고, 심지어 구타까지 했다. 여기에 대해 <라스트 댄스>에서 조던은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팀원들이 자신과 같은 수준에 이르기를 바란 게 아니라고. 그저 자신이 앞에 나서서 싸울 때 등 뒤에서 물러서지 않고 같이 싸워줄 동료를 원했을 뿐이라고. ‘나는 이렇게까지 절박한데 너희는 안 그래?’라는 심정이었다고.
— 조던은 7년 동안이나 수없이 맞고 깨지고 내던져진 끝에(feat. 디트로이트) 간신히 그런 동료들을 얻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못하는 선수한테 굳이 패스하는 건 공평한 게 아니라 비효율적인 헛짓거리”라고 공공연히 말하던 그가, 앞만 보고 경주마처럼 질주하던 그가 주위에 있는 사람을 비로소 돌아보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7년 만에 우승하고 펑펑 우는 조던을 보고 팀원들은 꽤 많이 놀랐다고 회고했다. 분노와 투쟁심 빼면 감정이 없는 기계인 줄 알았는데, 그런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걸 처음 봤다고.
— 그 점에서 포르투갈전 역전골 장면은 상징적이다. 리플레이로 보면서 앞서 튀어나가던 손흥민의 뒤를 쫓던 선수들에 눈길이 갔다. 어떤 선수는 아예 땅바닥을 보면서 뛰기도 했다. 이미 체력이 방전된 상황에서 어떻게든 빨리 따라가려고, 포르투갈 수비수들에게 둘러싸인 손흥민을 고립시키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뛴 것이다. 아마도 그 즈음에서는 다들 입에서 피맛이 나고 다리가 질질 끌렸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투입돼서 힘이 남아 있었던 황희찬은 그야말로 미친 황소처럼 돌진했고, 손흥민이 포르투갈 수비 네 명에게 포위된 순간 결국 그의 앞에 다다랐다. 농구에서 흔히 말하는 그래비티(Graviry) 효과의 젼형이다. 그 다음의 결과는 다들 아는 바다.
— KBS에서 해설하던 구자철은 경기 내내 크리스티안 호날두가 짜증을 냈고, 그때마다 동료들이 눈치를 보는 게 보인다고 말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호날두가 잃어버린 게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옛날에는 철없는 플레이보이 이미지이긴 했어도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던 그는, 어느 시기부터 강박적인 기행과 어그로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유추해보자면, 맨체스터 시절에는 경기 전에 콜라 먹다가 라이언 긱스에게 혼나던 호날두가 수도승 같은 자기관리를 시작한 시점과 대략 맞물린다.
—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말을 빌리면, 영웅 신화에서 고행 끝에 힘을 얻은 자는 인간계로 돌아와야 비로소 영웅이 된다. 돌아와서 세상을 이롭게 만들어야 영웅 신화가 완결되는 것이다. 자신의 세계로만 파고드는 사람은 구도자로 남을 뿐이다. 이 말은 인간이 영웅이 되려면 타인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어쩌면 호날두에게는 과도한 위닝 멘탈리티와 집착만 남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 혼자 싸우는 거라면 이런 아집에 가까운 에고도 동력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축구는 팀 스포츠다. 이 점은 마찬가지로 비인간적인 자기관리로 유명했던 스즈키 이치로의 이야기와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 지금까지 열 번의 월드컵을 봤다. 특수 상황이었던 2002년과 비교적 순조로웠던 2010년을 제외하고, 이렇게까지 해볼 수 있는 걸 다 쏟아냈다는 느낌을 주는 건 처음이다. 손흥민이 참가한 세 번의 대회 중 이렇게 외롭지 않게 보인 것도 처음이다. 다른 대회에서 나머지 선수들이 열심히 안 하거나 못했다는 게 아니고, 이 정도로 모든 선수와 스태프의 절박함이 응집되어 나타난 게 처음이라는 뜻이다. 또 첫 경기의 긴장감과 공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세대가 달라졌구나 싶기도 하다.
— 어쨌든 이겼기 때문이다. 졌어도 후회는 없다는 말은 쉽게 믿기 어렵다. 자책이라는 건 그리 간단하게 떨쳐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골 때리는 그녀들>에서 아나콘다의 최은경 아나운서가 허탈하게 인터뷰하던 게 생각난다. 막상 해보니 ‘졌잘싸’가 얼마나 공허한 말인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아무리 거지같이 해도 이기면 되는 거더라고. 보는 사람에게야 아름다운 스토리를 제공해줄 수 있겠지만, ‘언더독’의 스트레스가 어떤 것인지는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 늘 하는 말이지만, 아무리 미사여구를 붙여도 스포츠의 본질은 폭력이고, 결국 싸움 구경이다. 그게 바로 세일즈 포인트다. 이 생각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특히 축구는 그냥 공놀이가 아닌, 오랜 세월 자본과 정치와 구조적 불평등을 토대로 이어져온 인류의 전근대적 대리전이다. 그렇지만 위의 사진 같은 장면을 맞닥뜨리면 어쩔 수 없이 돌아보게 된다. 그 보편적인 감동은 순간의 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굳이 겸연쩍게 여기거나 삐딱하게 의미를 둘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 선수들이 왜 저렇게 절박하게 뛰는지 이유를 알고 나면, 특정 팀이나 선수를 응원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을 누군가가 했다. 공감한다. 그것은 스포츠가 세상의 축소판이라는 말이 실상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깨닫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스포츠의 무섭고 잔인하고 슬픈 구석이다. 다만 그런 것이 또 누군가를 응원하는 이유가 된다는 게 역설적으로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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