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김근주읽기에 참여하고 계신 김정건 님의 뉴스레터 후편입니다. 일산은혜교회 청년부 예배 영상 댓글로 연결되어 함께하시게 되었습니다. 후편 레터는 김정건 님의 성경 읽기에 관한, 질문과 대답으로 꾸몄습니다. 직접 그리신 멋진 그림도 꼭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전편 '신앙과 그림 이야기' 후편 '질문하는 성경읽기'-발행인 주
"다양하고 다채로운 생각들로 넘치는 곳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나, 그래서 저같이 조금은 황당한 생각을 잘하는 사람도 안심하고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이 모임이 너무도 소중합니다."
_김정건, 2024수요성서학당<에스겔서>,1월 27일 카톡방에서
Ԛ : 김정건 님의 성경 읽기는 어떻게 시작됐나요?
А : 프랑스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성경 통독을 했습니다. EBS의 성서학당과 진도를 맞추어 강해와 함께 읽으면서 딴에는 꽤 열심히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성경 안에서 납득할 수 없는 내용들을 너무 많이 만났고, 통독을 했다는 하릴없는 성취감 외에는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욥기>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들과,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심하여 시험을 하시게 된 것일까? 뭐 그런 질문들이죠. 아무리 강해 설교를 들어도 의문에 속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읽은 <길가메쉬 서사시>가 제 성경 읽기의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지금까지 목사들에게 철저히 속아왔구나!'라는 종류의 충격이었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관 학문들, 특히 이집트와 고대 근동 지역의 역사와 종교, 문화 등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Ԛ : 성경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고대 근동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셨군요?
А : 저는 성경을 읽다가 의문이 생기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어떻게든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보려고 애를 쓸 뿐입니다. 저는 그런 의문들을 일기 형태로 기록해 두었다가 시간이 날 때 이리저리 단서들도 찾아보고 궁리도 해보고 합니다. 그렇게 찾아다니면서 알게 된 것들도 기록을 해 두는데, 이게 조금 효과가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암기능력이 확실히 떨어지니까요.ㅎㅎ
그래서 두번째 성경 읽기는 이집트와 고대 근동의 신화, 역사에 대한 공부와 병행해서 진행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토록 어렵기만 하던 성경 말씀이 훨씬 더 쉽게 다가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두번째 성경 읽기의 어려운 점은 신화나 역사에 대한 공부는 아니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점은 그동안 교회에서 들어왔던 잘못된 설교들과 가스라이팅에 가까운, 강요된 가르침을 비워내는 일이었습니다.
Ԛ : '가스라이팅', '강요된 가르침', 김정건 님 그림처럼 선이 뚜렷한 표현이네요.
А :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혼란을 줍니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은 페르시아의 문화와 마르둑 종교, 조로아스터교, 길가메쉬 서사시 등의 영향을 받은, 기원전 4세기 경의 상당히 발전된 신관이 반영되어 있는데, 창세기 11장부터는 기원전 12세기 이전 원시 가나안 종교의 엘과 여호와가 뒤섞여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니 뭔가 앞뒤가 안맞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말씀만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 기드온 따위에게 성능 테스트를 받고, 안식일에 장작 팼다고 죽음을 선고하셨던 분이 신약에서는 돌아온 탕자를 맞으러 달려 나가시죠. 목회자들이 이렇게 발전하고 변화하는 유대인들의 신관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 혼란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Ԛ : 역사에 따른 신관神觀의 변화와 흐름을 짚어보는 것이 필요하겠군요?
А : 성경의 저작 연대와 고대근동의 신화와 역사를 공부해 보면, 성경의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주변의 문화적 영향과 그들이 처한 역사적 현실에 따라 조금씩 발전시켜 온 그들만의 신관에 의해 표현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예수님이 말씀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얼마나 차원이 다른 신관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재림과 최후의 심판으로 표현되는 신약 성서의 종말론은, 사도들의 이해 부족으로 인해 예수님의 신관을 오히려 퇴행시켜 놓은 결과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되지요.
성경 관련된 역사를 공부하고 싶은 분에게 제가 개인적으로 추천드리고 싶은 것은, 우선 포로기부터 신구약 중간기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주로 이집트, 신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의 역사가 되겠는데요, 목회자나 신학자가 쓴 책이나 설교는 절대 권하고 싶지 않고, 우리가 신학도도 아니니 차라리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검색을 해서 공부하시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위키피디아를 무시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학자의 사견이나 한계, 특정 학파의 견해가 제거된 가장 담백하고 객관적인 내용들이고, 링크를 따라가다 보면 관련된 정보도 쉽게 찾게 되고 분량도 작아서 처음 역사 공부를 할 때 가장 유용한 방법입니다.
"성경만 읽지 마시고, 고대 역사와 문화도 함께 이해를"
Ԛ : 이집트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유대 고대사에 관심이 있으시다고?
А : 이집트의 신화와 마르둑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마카베오서,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 등도 제게 큰 도움이 되었던 공부였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데 정말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성경의 저작 연대와 역사적 상황, 저자의 신분 등에 대한 간단한 이해 만으로도 성경은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무조건 맞는 말씀이라는 가스라이팅만 제거되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그냥 성경만 절대 읽지 마시고, 역사적 이해를 겸해 가시면서 성경을 읽어보시길 꼭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Ԛ : 읽기방에서 성경의 문자주의적 접근과 수용에 대한 문제점을 언급하셨지요?
А : 저는 보수(?) 개신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의 문자주의적인 해석과 성경무오설에서 비롯된 중세 신학의 가스라이팅을 성도들에게 퍼붓고 있다는 점을 들고 싶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은 아담과 하와가 정말 존재했던 분들이라고 믿어지십니까? 온 인류가 노아의 후손이라고 정말로, 진심으로 믿으십니까? 안믿어지는 걸 무조건 믿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가스라이팅을 당한 적은 없으신가요? 교회에서 안믿으면 안된다고 하니까 그냥 믿기로 한 것은 아니신가요?
저는 동정녀 탄생, 삼위일체, 대속신앙, 육체적 부활과 재림을 믿지 않으며, 영생이나 천국이나 지옥도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제 신앙이 ‘진보’라는 단어의 정의에 어울릴만한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한국 개신교에서는 ‘진보’라는 이름보다는 ‘이단’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가능성이 높다고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단이든 삼단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제가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요.
Ԛ :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과 교리적 신앙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인지요?
А : 동정녀 탄생, 삼위일체, 대속신앙, 육체적 부활과 재림이 없다면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치가 없는 것일까요? 재림 후의 보상이 없다면 교회는 다닐 필요도 없는 곳이 되는 걸까요?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삶이 오로지 예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현세의 나를 돌보시고 재림 후의 영생과 구원을 주실 거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것은 분명 거래일 것이고 신명기 율법으로의 회귀일 겁니다.
오히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마음속에서 제거하고 복음서를 읽었을 때 저는 신약성서의 커튼 뒤에 서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너무도 아름답고 순수해서 제가 살아가며 평생을 사모할 만한 것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러니 저는 주저없이 예수님을 제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을 신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섬기는 것은 인류에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주저없이 예수님을 제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Ԛ : '이제 포장된 예수님을 걷어내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А : 만약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 각자의 인생들 속에 살아 숨쉬며, 이 폭력과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래도 그 삶을 살아내도록 도와주시고 계신다는,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바로 영생이고 부활이 아니겠는가 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와 신약성경이 멋지게 포장한 예수님이 아니라, 그 포장을 벗겨내야 보이는 진짜 예수님의 삶이 보여주신 가르침을 따라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몇십년 살지도 못하는 인생인데 그렇게 한번 살아보는 것, 그거 한번 해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마음과는 다르게 실제의 삶은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제 자신이 많이 변했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이제는 세상과 내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따뜻해졌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기적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Ԛ : 한국 개신교와 교단 신학의 낙후성에 관해 할 말이 있으시다고?
А :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은 제가 굳이 일일이 거론하지 않아도 기독교인이 아닌 분들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한가지 좀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개신교가 신앙과 행동이 맞지 않는, 언행 불일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신앙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입니다. 그 교리와 신앙이 올바른 것이라면, 저 많은 목사들이 하나같이 저따위 행동들을 할 리가 없지 않나요?
오늘 한국 보수 개신교의 신앙이 엄밀히 보면 중세의 신앙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 그 시절 카톨릭의 행동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대부분의 목회자가 교단에서 운영하는 신학교에서 배출되니 젊은 신학도들이 교단의 구닥다리 신학에 충성하게 만드는 폐해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보수 개신교단들의 행태는 우리 기독교를 구닥다리로 만들어버렸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포도주를 담을 부대는 2천년이 지난 아직도 준비되지 않은 것이다."
_김정건, <다니엘처럼> 김근주읽기 카톡방에서
Ԛ : 공부하는 종교인, 과학을 이해하는 신학이 왜 필요한지요?
А : 장로교와 감리교의 기초를 놓았던 칼뱅과 아르미니우스는 16세기를 살았던,우리나라로 치면 임진왜란 시절에 살았던 신학자들입니다. 이분들은 그 시대를 감안해 보면 아주 훌륭한 분들이지만 이집트의 유물이나 길가메쉬 서사시가 발견되지도 않았던, 역사학, 고고학, 문헌학, 철학, 과학 등 연관 학문들이 제대로 성장하지도 않았던 시절의 인물들입니다. 그 분들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그저 학습만 열심히 하는, 5백년 전 과거에 머물러 있는 한국 개신교에 당연히 미래가 있을 리 없습니다.
너무도 많은 목회자들이 역사학, 진화론, 우주과학 등에 놀라울 정도로 무지하거나, 그것들을 외면하거나, 종교와 과학을 분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신데, 저는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과학이나 종교는 결국 우리 인류가 가진 Big Ques on, 즉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찾아가는 길입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그들이 역사적인 사건들을 겪고, 다른 민족들의 종교와 문화를 통해 배우고 알게 된 것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그들의 신관을 발전시켜왔습니다. 우리 역시 진화론과 우주과학으로 어떤 것들을 알게 된다면 종교적으로 그것을 고민하고 보다 발전적인 신관을 모색해야 할텐데, 그저 외면하고 흉보고 배제하면서, 퇴행적인 학습을 정통이라 부르며 고집한다면, 이 거꾸로 가는 길에 분명히 미래는 없을 것입니다.
Ԛ : 김근주읽기를 두 차례 참여하셨는데, 모임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А : 제가 김근주 읽기에서 다른 분들이 쓰신 글들을 읽으며 느끼는 감정은 ‘부러움’입니다. 언제나 뭔가 삐딱하고 가슴이 아닌 머리로 먼저 이해하려는 제 모습과 달리 성경 말씀과 책에서 긍정적이고 은혜 넘치는 감상을 남기시는 분들이 저는 부럽습니다.
이렇게 ‘은혜’ 넘치는 분들 가운데 ‘의심’만 넘치는 제가 끼어 있는 것이 가끔은 죄송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고, 제 비판 섞인 감상 때문에 괜한 스트레스를 드리는 건 아닌지 걱정될 때도 있습니다. 특정한 분의 성함을 거론하고 싶지는 않지만, 함께 자신의 감상을 나눠주시고, 제가 갖지 못한 은혜롭고 따뜻한 심성들을 보여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와 부러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Ԛ : 김근주읽기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А : 매우 만족스럽고, 제가 외국에 있어 아무래도 제한적인 부분이 있다보니 크게 제안드리고 싶은 부분은 없습니다. 다만, 단톡방이 조금 더 시끌벅적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누군가 나서서 할 일은 아니고, 다 같이 만들어 나가야 하는 일이겠지요.
Ԛ : 먼저 했어야 할 질문인데, 마지막에 하네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А : 읽은 책 중에 산도르 마라이의 소설 <열정>(솔, 2016)이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가끔 김근주 목사님도 말씀하시지만, 이 책에서 작가는 "우리는 우리의 삶에 나타난 문제들에 대해 말이 아닌 전 생애로 대답해야 한다"라고 하는데, 이 문장에 참으로 공감이 되어서 계속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닮기 위해 애쓰는 것. 그것이 이 희망없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먹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_김정건, <다니엘처럼> 김근주읽기 카톡방에서
댓글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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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경
김정건 님 감사합니다! 성경 읽기를 위해서 정건 님처럼 이러한 노력들을 해야 하는데요~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하지 말아야지 합니다. 부럽기도 하고 글을 읽으며 제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질문하는 성경읽기'로 나아가야 하는데 괜히 주저했음을 덕분에 알아갑니다. 톡방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질문을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길가메쉬 서사시> 저도 꼭 읽어봐야지 싶습니다. 고대 역사와 문화와 친해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림들은 너무 멋져서 대단하십니다! 멋지네요! 요런 표현으론 부족 할 것 같습니다.ㅎ 늘 감사합니다. 정건님이 계셔서 정~ 말 기쁘고 행복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평안, 안전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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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
넓은 세상과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다양함에 대한 이해를 생각하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김근주읽기 (280)
전사 님,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사람들을 조금 더 가깝게 느끼고 이해하게 되어 저도 기쁩니다. 늘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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