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계약서 뽀개기
한식당 근무를 시작한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세무소에서 계약서가 나왔으니 잠시 들러 사인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분량은 3장. 모든 페이지 하단에 사장님 사인이 적혀 있었고, 나도 그 옆에 사인을 했다. 1부는 사장님이 1부는 내가 보관. 이로써 계약 완료! 집에 가자마자 계약서를 펴 놓고 번역기를 돌려가며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프랑스 노동법에 대해서 아는 바는 없지만 일하기 좋은 나라 아니던가? 실제로 근로자를 위한 내용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총 20개의 조항들을 간단히 정리해본다. (읽기 귀찮다면 아래로 스크롤 내리셔요)
Article 1 - Conditions d’engagement 본계약은 노동법 표준을 준수한다.
‘블라블라 : Hotels cafes restaurants’라고 쓰여 있다. 이 계약서는 요식업법을 따른다는 뜻이다. 업종에 따라 준수해야 하는 기본법이 조금씩 다른가보다.
Article 2 - Emploi et qualification 고용형태를 정한다.
’temps partiel(임시직)’, ‘Serveuse(웨이터)’라고 쓰여 있다. 프랑스의 고용형태로는 계약기간이 무한인 CDI(정규직)와 기간이 정해져 있는 CDD(비정규직)이 있다. 짧게 일하는 CTT(일용직)도 있다는데…. 더 깊게 알아볼 필요 없이 나는 당연히 CDD 비정규직!
Article 3 - Objet et Durée du contrat 계약기간을 정한다.
근무를 시작하는 날짜와 근무하는 기간이 쓰여 있지만, 실제와 다르다. 사장님께 확인하니 형식적인 서류라서 대략적으로 작성한다고 했다.
Article 4 - Période d’essai 수습기간을 정한다.
내용이 상당히 길며 복잡해서 다 이해하지 못 했다. 어차피 나의 임금은 최저시급이므로 그냥 넘겼다. 수습기간에라도 최저시급은 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훗날 풀타임 정규직으로 근무한다면 반드시 체크하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다.
Article 5 - Lieu du travail 근무지를 정한다.
한식당의 주소가 쓰여 있다. 초간단.
Article 6 - Suivi médical à l’embauche 의사의 진찰을 받는다.
신체적으로 일을 하기에 적합한지 확인한다는데, 아쉽지만 나는 너무 빨리 그만두는 바람에 이 과정은 겪지 못 했다. 한국의 보건증같은 게 아닐까 싶다. 진찰은 일을 시작한 후 3개월 이내에 진행해야 하며 진찰 내용은 고용주와 피고용인에게 동일하게 안내된다.
Article 7 - Durée du contrat 계약기간을 정한다.
계약기간이 1달 후 만기로 쓰여 있다. 뭔가 이상해서 사장님께 확인하니 계약서를 3달 간 3번 쓰고, 그 뒤에는 정규직 계약서를 쓰게 된다고 했다. 비정규직으로 3달이나 일하면 자동 정규직 전환. 이게 프랑스 법인가 보다.
Article 8 - Durée du travail - Répartition 근무시간을 정한다.
무슨 요일에,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하는 지 상세하게 쓰여 있다. 실제 근무를 하니 조금씩 더 일하게 되었다. 그래서 단서조항으로 근무시간이 바뀔수 있다는 내용이 있다.
Article 9 - Rémunération 보수를 정한다.
‘한 달에 000유로를 받는다.’라고 너무나 간단하게 쓰여 있다. 세전인지 세후인지도 나와있지 않았다. 어떻게 계산이 된 것인지 조금 더 풀어서 써주면 좋으련만. 계산기를 여러번 두들겨 봤지만 딱 맞지 떨어지지 않았다. 계산법이 워낙 복잡해서 포기했다.
* 세전급여(salarie brut)는 ‘노동시간x최저임금(SMIC)+특별수당(primes)+보상금(indemnitiés)’으로 계산된다. 세후급여(salaire net)는 세전급여에서 건강보험, 산업재해, 퇴직연금, 고용보험, 일반사회부담금(CSG) 등을 뺀 금액을 말하는데, 워낙 항목이 많아서 계산을 포기했다.
* 프랑스 최저 시급은 11.52유로(Brut세전), 8.87유로(Net세후). 매년 바뀐다. salairebrutnet.fr 에서 최저 시급을 확인할 수 있고 월급 계산도 가능하다.
Article 10 - Heures complémentaires 필요 시 노동자의 추가근무는 의무사항이다.
추가근무를 하지 않을 시 퇴사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쓰여 있다. 보통 손님이 많은 날에 추가 근무를 하게 되는 것 같았다. 해봤자 15분 정도로 짧았다. 하지만 추가근무에 대한 금액적 보상은 없었다.
* 프랑스에서 초과근무를 하면, 첫 초과하는 8시간에 대해서는 25% 가산, 그 이상의 시간부터는 50% 가산된다.
* 프랑스는 21시부터 새벽 6시까지의 일은 야근으로 분류된다. (그렇지 않은 업종도 있다고 함.) 야근으로 분류되면 뭐가 달라지는 지는 모른다… 알고 싶다… 돈 벌고 싶다…
* 프랑스는 다음 일을 시작하는 때까지 최소 11시간을 비워야 한다. 잠 잘 시간을 보장해주는 것 같다. (새벽에 퇴근해 다음날 아침 출근하던 때 어지럽긴 했지…아련…) 금요일 밤 11시에 일을 마치고, 토요일 오전 10시에 일을 시작하므로 한식당에서도 딱 11시간 차이를 지켰다.
Article 11 - Obligations professionnelles 노동자는 근무 중 지켜야 할 의무사항을 정한다.
페이지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내용이 많다. 하나씩 살펴보면 너무 과하다. 휴대폰까지? 하지만 반대로 기본매너를 지키지 않아도 해고가 어려우므로 계약서에 넣은 건 아닐까… 잠깐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그래도 이건 한국 계약서에는 없는 내용인데, 왜 더 심한 것 같지…?
- 작업지침을 준수한다.
- 개인사항을 알린다.
- 무단결근을 금한다. 결근 시 즉시 알리고 48시간 이내 증빙서류를 제출한다.
- 정해진 근무 시간을 초과하지 않기 위해 이중취업을 금한다.
- 근무 중 알게 된 정보를 기밀로 유지한다.
- 근무 중 휴대폰 사용 금한다.
- 휴식시간과 근무시간을 엄수한다.
Article 12 - Déclaration sociales nominatives (DSN) 고용주는 행정정보기관 ‘DSN’에 직원 정보를 등록한다.
직원 한 명 한 명에 대한 세금을 지불하고, 직원에 대한 휴업, 질병, 출산, 친자관계, 퇴사 등의 개인 정보를 사회단체에 전송하는 데 사용된다. 미등록 또는 지연 시 벌금이 부과된다. 가만보면 프랑스 행정 엄청 느리다면서, 벌금은 엄청 좋아해.
Article 13 - Priorité d’accès au temps plein et égalité de traitement 계약직 근무자를 우선해 정규직으로 전환한다.
(어려움. 생략)
Article 14 - Congé Payés 유급휴가를 정한다.
‘회사의 규정에 따라 유급휴가를 받는다.’라고 쓰여 있지만, 규정이 무엇인지는 명시하지 않았다. ’경영진과 협의가 필요하며 직원의 필요에 따라 지급된다.‘라고 하니까, 주말만 일하는 알바생이라서 유급휴가는 없는 것 같다.
* 프랑스는 매달 2.5일의 유급휴가를 받거나, 1년에 휴일을 제외한 30일을 유급휴가로 받을 수 있다. 유급휴가 20일로 한 달을 통으로 쉴 수 있다. 프랑스의 휴일은 또 어마어마하게 많다. 30일 유급휴가를 다 쓰면 진짜 언제 일을 하지?
Article 15 - Fin de contrat 계약 종료 방법을 정한다.
첫 줄에 ‘절차없이 자동 종료된다.’고 쓰여 있어서 대충 훑었다. 내용이 상당히 많은 것으로 보아 계약 해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엄격한 것 같다.
* 프랑스는 알바생에게도 실업수당(chômage)을 지급한다. 최저시급(SMIC)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100%를, 그보다 많이 버는 사람에게는 35시간 기준 84%, 39시간 기준 70%를 지급한다. 더 오래 일한 사람에게 14%를 적게 준다. 이래서 일을 적당히 하나보다. 실업수당 때문에 코로나 시기에 국가재정이 휘청거렸다고 한다.
Article 16 - Hygiène 노동자는 근무 중에 술을 마시지 않는다.
당연... 일하면서 술 마시는 사람도 있구나...
Article 17 - Télésurveillance 고용주는 보안을 위해 CCTV를 설치해 모니터링한다.
위험한 프랑스니까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CCTV의 주목적은 1층에서 2층 상황을 모니터링하기 위함 같았다.
Article 18 - Matériel et Documents 노동자에게 지급된 물건 및 서류는 모두 고용주 소유이며 퇴사 시 반환한다.
유니폼으로 앞치마와 검정 반팔티를 제공받는다. 잘 입고 잘 반납하면 됨.
Article 19 - Dispositions diverses 그 외.
‘이중취업 금지, 개인 상황 공유’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Article 11에 있던 내용과 중복된다. 아마도 이전에 일하던 알바생들이 문제를 일으켜서 추가한 게 아닐까 싶다.
Article 20 - Avantages Sociaux 사회보장혜택을 정한다.
원문) A daté de votre engagement vous serez affiliée au régime de retraite complémentaire, prévoyance et mutuelle obligatoire via :
쌍점 뒤에 뭔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없다. 글 그대로 해석하면 사회적 혜택, 즉 연금, 세금 공제, 상호 보험을 보장한다는 뜻인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계약서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다. 마지막 조항은 뭐.. 중요하지 않은 거겠지.
퇴사 완료
밤 11시, 집에 갈 시간이지만 설거지 하는 사장님을 붙잡고, 계약서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여쭤봤다. 그리고 이어서 퇴사 의사를 밝혔다. “저.. 8월에 여행 다녀온 다음에 10월까지만 더 일하고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물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계약서까지 쓴 마당에 3개월은 채우고 나가야할 것 같았다. 사유는 재즈바로 이직. 프랑스에 오기 전 목표는 재즈바에서 일하는 거였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La musique, C’est ma vie!
불행히도? 그 다음주, 사장님은 그냥 이번 달까지만 일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내가 생각해도 새로운 직원을 뽑는 게 낫다. 8월 휴가 끝나고 돌아오면 일을 또 새로 알려줘야 할테니 말이다. 그렇게 7월 한 달 동안 총 68.75시간을 일하고 한식당 알바는 끝이 났다.
8월 휴가를 다녀온 후, 서류와 월급을 받기 위해 다시 한 번 한식당에 방문했다. 그리고 봉투를 하나 받았다. 그 안에는 수표 2장과 현금 150유로 그리고 퇴직 관련 서류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근로 경력을 증명하는 '고용주 증명서'와 '재직증명서', 급여 계산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급여명세서', 퇴사했음을 확인하는 '최종정산 확인서' 이렇게 4종이었다.
* 급여명세서(Bulletin de salaire)는 5년 이내에 총액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 프랑스에서는 서류를 잘 관리해야 한다. 언제 필요하게 될지 모른다.
월급을 현금 또는 수표 1장으로 한꺼번에 주면 좋았을텐데 왜 이렇게 쪼개주셨을까. 세금이 관련되어 있는 걸까. 그만둔 마당에 여쭤볼 수 없었다. 수표를 들고 은행에 가니 수수료로 10유로를 떼갔다. 겨우 50만 원 입금하는데 1만 5천 원을 떼간 거다. 1천 5백 원을 떼가도 아까울 마당에 사기꾼이 따로 없다. 그럼에도 기분은 좋았다. 지금껏 한국돈을 유로로 환전해 사용해오다가, 처음으로 유로로 된 돈이 생기다니! 금융치료를 받으니 일하면서 힘들었던 것들이 싹 잊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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