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즐기며 걷는 길
내 생에 이렇게 많이 걸었던 때가 있던가? 나이키 앱 기록에 따르면, 올해 걸은 거리만 1000km가 넘는다고 한다. 산티아고 순례가 큰 몫을 했지만 그 후에도 틈만 나면 공원을 걸었다. 틈이 안 나면 하루쯤 시간을 내어 파리 시내로 나갔다.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서 보통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다녔는데, 10km쯤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갔다가 힘들어하며 10km를 되돌아왔다.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언제나 더 멀리, 조금씩 욕심부리곤 했다.
자꾸 걷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그 이유를 명쾌하게 말 할 수 없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걷기’에 대한 아리송한 생각들을 <철학자의 걷기 수업> 책이 상당 부분 정리해줬다. 결론부터 말하면 ‘걷기’는 나를 보다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현재의 행복을 즐기고, 사랑을 표현하고, 너그럽게 웃게 하고, 불안을 덜 느끼는 사람으로 말이다. 남들이 걷기의 장점에 대해 얘기해줄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다가 이제는 그 어떤 것도 걷기를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방랑하는 길
하루는 파리에 정착할 수 있게 도와준 여진이와 저녁 데이트를 했다. 센 강 앞에 돗자리를 펴 와인 한 병을 놓고, 밀려있던 서로의 근황을 주고 받으며 늦은 시간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지하철로 10분이면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산다. 하지만 못 본지 두 어달. 자주 보지 못 하는 건 서울이나 파리나 매한가지다.
현재 여진이는 OECD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뉴스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는 국제기구, 오에쎄데에서 일을 한다니, “얘 내 친구에요!”라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멋있었다. 여진이는 함께 일하는 동료와 선임들이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전해주었다. 내 눈에는 스펙이 어마어마한 그들보다 내 옆에 앉은 여진이가 더 대단해 보였지만 아무튼. 유능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창한 프랑스어와 영어로 프로젝트를 이끌어나가는 여진이의 모습이 선하다.
밤 10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빌릴 수 있는 자전거가 하나도 없었다. 하여 어두운 밤길을 홀로 걸었다. 집까지는 6km. 1시간 가량 걸으면서 파리의 길에 대해 생각했다. 파리에 사는 여진이의 길이 곧게 뻗은 샹젤리제 거리라면, 나의 길은 무엇일까. 파리 외곽의 구불구불한, 끝이 보이지 않는 숲길이 아닐까.
독일에 “그 길이 맞는지 알려면 그 길을 걸어봐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비록 가난한 방랑자처럼 걷는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여기는 파리니까. 험난한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우회해도, 가시덤불에 다리 좀 긁혀도, 모기에 피 좀 뜯겨도 마냥 좋다.
생각을 비우는 길
내게 여행은 늘 ‘0’로 돌아가려는 시도다. 짊어 맨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지면, 그야말로 삶이 팍팍해지면, 비우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지난 8월에도 유럽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쌓인 스트레스는 없었지만 벨기에로 가는 버스표가 15유로라는 걸 알아버린 이상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눈물 흘리며 걷는 길
사실 유럽 여행의 주 목적은 리옹을 만나는 거였다. 벨기에 브루셀에서 놀다가 리옹이 쉬는 날에 맞춰 독일로 넘어갔다. 겨우 버스로 3시간 거리였다. 그리고 리옹의 휴가가 끝나는 날, 다시 2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남쪽 스위스로 내려갔다. (Lille > Brussel > Coblenz > Basel > Bern > Kandersteg > Interlaken > Géneva > Taizé)
리옹은 독일의 작고 예쁜 마을, 코블렌츠에 산다. 그는 기차역으로 나를 데리러 와주었다. 오랜만에 만나니 이보다 반가울 수 없었다. 매일 그가 해주는 삼시세끼를 먹고, 동네 곳곳을 여행했다. 그의 차를 타고 아우토반 달리 듯 드라이브를 맘껏 했다. 내가 독일에서 독일인 남자친구랑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한편 그는 나의 빨래부터 시작해 청소 설거지 모두 도맡았다. 난 그저 가만히 앉아 쉬기만 했다. 우리는 결혼 계획과 자녀 계획도 얘기하며 관계(serious relationship)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며칠 뒤, 그가 다시 일을 하러가는, 그러니까 우리가 다시 장거리연애로 돌아가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이제 좀 편해지려고 했는데 벌써 이별이라니 서글펐다. 혼자가 되자 마자 또 정처없이 걷기를 시작했다. 가슴이 꽉 막혀오는 슬픔을 느꼈다. 그러다 사람들이 있는 길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사랑하면 외면해오던 외로움이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연애를 너무 오래 쉬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그동안 이 감정이 두려워서 쉽사리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 했던 것 같다. 우리가 완전히 헤어진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다시 만날 것을 굳게 약속했지만, 아마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엉엉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서너시간 걸은 덕분에 감정이 정상궤도로 돌아왔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화려함 옆에는 추악함이, 행복 옆에는 불행이, 사랑 옆에는 외로움이. 다 같이 오는 거지 뭐.
이 일기를 쓰고 있는 지금은 독일에 다녀온지 1달이 지난 상태다. 그때 나의 직감은 맞았다. 장거리 연애가 힘들어서 내가 먼저 친구로 지내자고 얘기했다. 그는 슬퍼했지만 우리는 헤어졌다. 이제 우리에게 다음은 없다.
아파도 상처나지 않는 길
스위스에 가는 한국인은 모두 인터라켄을 간다. 기차역에 앉아 있으면 한국어가 들릴 정도로 필수코스로 알려져 있다. 나는 사람 많은 곳을 피해 그곳에서 25km 정도 떨어진 Kandersteg 칸더슈테크로 갔다. 작지만 아름다운 웨시넨 호수에서 수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책도 읽으며 2박을 보냈다. 호수물은 빙하가 녹아 내려온 물이기 때문에 무척 차가웠다. 케이블카로 온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안 나는 온도였겠지만, 나는 가파른 산길을 두 발로 오른 터라 등줄기의 땀을 식히기에 최고였다. 역시 비싼 케이블카보다 걷는 게 최고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리 내가 걷기를 좋아한다 하더라도, 산길을 맨발로 내려올 생각은 없었다. 웨시넨 호수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쪼리를 신고 산행을 했는데, 워낙 길이 험준해서 하산할 때는 차가 다니는 아스팔트 길을 택했다. 그 길에서 예뻐보이는 샛길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길을 샜다. 그러면 안 됐다. 한참 가다보니 길이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뒤로 돌아갈 내가 아니었다. 계곡 너머로 사람들이 걷고 있는 걸 보고, 계곡을 뛰어 넘었다. 정상인이라면 ‘저건 못 건너겠다.‘라고 돌아갈텐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점프를 했다. 그리고 착지하다 미끄러져 넘어졌다. 쪼리 한 쪽은 계곡물에 떠내려 가고, 무릎에는 피가 났다. 이 계곡을 넘으려고 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누가 볼새라 피를 손으로 문질러 닦아 내고 절뚝거리며 자갈길을 걸어 내려왔다. 한 걸음 한 걸을 딛을 때마다 고통이 상당했다. 신발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에 멍이 들긴 했어도 다행히 상처는 없었다. 뾰족한 유리나 쓰레기가 없는 청정지역, 스위스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발마사지 실컷했네.
기도하러 가는 길
제네바에서 파리로 가는 길에 ‘떼제’가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스위스 여행이 끝날 즈음에 맞춰 떼제에서 리플렉션 주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8/20~27) 이 기간에는 18살~35살의 청년들이 전세계에서 온다. 수천명이 한 데 앉아 하루 3번씩 예배를 드리고, 예배가 없는 사이 시간에는 젊은 세대를 위한 워크숍이 곳곳에서 열리며, 나이가 비슷한 또래로 소그룹 모임을 구성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도 갖는다. 물론 가기 전까지 이런 정보는 전혀 몰랐다. 1년에 딱 한번 있는 특별 주간이고, 누군가의 버킷리스트라고도 하니 놓칠 수 없지. 무작정 예약을 하고 기차표를 끊었다. 심지어 기차도 20유로밖에 안 하는 걸!
* ’떼제‘는 1940년 개신교 수도자인 로제 수사(브라더)가 만든 기독교 수도회다. 마을 전체가 숙소와 밭, 시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안에서 각자 맡은 노동을 하고, 양식을 얻는다. 마치 작은 사회나 다름없으므로 떼제 공동체라고 불린다. 위치는 프랑스 중심에 있는 ’Leon리옹‘에서 북쪽으로 차로 1시간이면 간다.
’떼제‘가 특별한 이유는 너무나 많은데 그중 두 가지를 꼽으면, 먼저 수많은 종파로 분열된 기독교인들이 한데 모여 서로의 신앙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어떻게든 다름을 찾아내 배척한다고 느껴왔으나, 여긴 카톨릭이냐고 물어보는 것조차 불편해할까봐 조심해하는 눈치였다. 그 다음으로 다양한 언어로 진행되는 예배가 인상적이었다. 기본적으로 영어와 프랑스어를 구사하지만, 성경 말씀 만큼은 참석한 사람들의 국적에 맞게 거의 모든 언어로 통역해줬다. 한국어를 듣는 순간,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한국어로 낭독해주신 다니엘 수사님 감사)
하루 세 번, 아침 8시, 정오, 저녁 8시가 되면 종이 울린다. 예배가 시작됨을 알리는 소리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하던 일들을 멈추고 교회로 향한다. 그럼 나는 예배가 시작할 때까지 교회로 모이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묵언(Silence)을 수행하며 종소리를 따라 한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는 게 재밌었다. 무려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했다는데, 들리는 소리는 그들의 발소리와 종소리 뿐인 게 신기하고 또 아름답기까지 했다.
파리로 돌아가는 카풀 뒷 좌석에서 떨어지는 석양을 감상했다. 유럽여행의 마지막 여정을 떼제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이끄심이었다. 유럽여행도 그러했지만 지금 파리에서 내가 누리고 있는 그 어떤 것도, 나의 계획대로 된 것이 없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길을 계획하셨을까. 오늘의 나는 크고 고요한 호수 앞에 서 있다. 물 위에 돌 하나가 놓여져 한 걸음 떼어보지만 그 다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내 다음 돌이 올라온다. 그리고 그 돌을 밟으면 또 다시 다음 돌이 올라 온다. 그런 식으로 살고 있다. 뒤를 돌아보면 이어진 징검다리처럼 보이지만, 앞을 보면 아무 돌도 놓여 있지 않다. 그래서 종종 마음이 조급해진다. 허나 급할 것 없다. 이럴 때일수록 기도하고 걸어본다.
파리우쟁이 다음이면 +100을 찍는다. 5일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보내지 못 하고 있지만, 이곳의 드라마를 하나씩 기록하는 재미가 있다. 그래선가 매번 분량이 예상을 초과하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다 읽기 힘들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럼에도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힘이 난다. “이번 파리우쟁 재미있어!”라고 연락주는 사람들, 응원의 의미로 커피를 보내주는 사람들, 너무 너무 감사하다. 글을 쓰는 오늘은 학원에서 시험을 봤다. 100점인 것 같다. (무슨 자신감? 너무 쉬웠어. 훗) 잘 살고 있다는 말이다. 부디 모두 잘 지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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