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차 19.81km
Astroga Valdeviejas Murias de Rechivaldo Santa Catalina de Somoza El Ganso Rabanal del Camino

Astroga 아스트로가는 2천 년 전 중세시대에 세워진 역사적인 도시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숨은 벽화를 발견하는 재미와, 산책길 옆으로 보이는 도시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며 해가 질 때까지 산책을 했다.
그리고 이튿날 도시 중심에 있는 아름다운 주교궁과 대성당을 다녀왔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멋진 외관에, 내부 모습도 경관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구경했다. 한 번쯤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 만큼 예쁜 도시 아스토르가! 앞으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 어디였는지 물어보면 “아스토르가!”라고 답할 생각이다. 이곳을 언젠가 또 올 수 있을까..?
대성당과 주교궁

생에 처음 보는 가우디 건축물이었다. 아스토르가 주교궁. 10시, 문이 열리자 마자 들어가서 1시간이 넘도록 놀정도로 예뻤다. 이전에 방문한 곳들은 거대한 규모에 압도당했지만, 이곳 주교궁은 주교가 사는 집이기 때문에 섬세한 디테일이 돋보였다. 지하부터 꼭대기까지 각 층별, 구역별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기도하는 곳, 일하는 곳, 회의하는 곳, 밥 먹는 곳, 자는 곳 공간의 목적에 맞게 미묘하게 다르면서도 조화를 이루니 천재 가우디는 역시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각 공간의 패턴과 색감, 창문의 모양과 스테인리스, 타일과 기둥에 새겨진 무늬까지 꼼꼼하게 보느라 오래 걸렸다.

그후 가우디가 어떤 인물인지, 주교궁은 어떤 히스토리를 갖고 있는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알라딘에서 이북을 하나 구입했다. 책의 내용은 꽤나 자세했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교궁은 가우디가 지은 건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순간 속은 기분이 들었다. (읭)
주교관 공사를 포기하기로 결정한 가우디는 위원회에 “당신들은 일을 제대로 마무리할 능력도 없고, 일을 중단된 채 내버려둘 용기도 없는 사람들이다”라며 그동안 말하지 못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산처럼 높게 쌓인 아쉬움과 미련을 내려놓고 가우디는 그라우 주교를 위해 비석을 제작하며 아스토르가의 일을 마무리했다. 몇 년이 지나 가우디에게 다시 와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가우디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건축가에게 자존심은 건물의 기둥과 같다. 인간적인 신뢰가 무너진 곳에 작품의 씨앗이 자랄 틈은 없다. 화가 난 가우디는 원래 설계도를 모두 태워버리고 다시는 아스토르가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결국 수십 년이 걸려 공사가 끝이 났지만 가우디의 설계대로 지어지지 않았다. 세월은 참으로 무심한 듯하다.
<스페인은 가우디다> (김희곤 지음) 중에서

지금 작은 시골도시 아스토르가를 방문하는 사람은 어김없이 시내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주교관을 가우디의 작품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건물은 가우디의 작품이 아니라 가우디의 아픈 감정이 쌓여 있는 애물덩어리였다. 건물의 마무리와 지붕 공사는 레온 교구 건축가인 리카르도 가르시아게레타가 마음대로 했다. 가우디가 구상한 건물과는 완전히 다르게 지어졌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모든 사람은 이 건물을 가우디의 작품이라고 부르며 가우디의 예술혼을 팔고 있다.
<스페인은 가우디다> (김희곤 지음) 중에서

주교궁 바로 옆에는 높게 솟은 아스토르가 대성당이 있다. 이미 주교궁에서 많이 걸은 상태였고, 다음 마을로 이동해야 해서 시간적인 부담이 컸지만 지나가던 프랑스인 GP아저씨가 “볼 만 해.”라고 은근슬쩍 추천해 주시는 바람에 5유로 입장권을 끊고 또 들어갔다. 아무리 아스트로가가 좋다한들 여기를 또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일단은 고!

레온 성당에 비해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연세가 들어보이는 분들이 저마다 수화기처럼 생긴 오디오 가이드를 귀에 대고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었다. 나도 오디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그 무리에 합류했다. 오디오의 설명은 생각보다 길었다. 영어로 된 데다가 성경 속 인물들이 계속 거론되어 거의 이해하지 못 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꾸역꾸역 가이드를 다 들으며 한 바퀴를 돌았다. 가장 따뜻한 곳 앞에 서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을 떠올리며 순례길을 걸을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오전이었다.

성당을 나오니 해가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오후 1시를 훌쩍 넘긴 때라, 곧바로 화살표를 찾아 다음 마을로 출발했다. 이미 대성당과 주교궁을 구경하느라 10km 쯤 걸은 듯 피곤했지만 먼저 출발한 리옹을 따라 잡아야 했다. 결국 목적지였던 로센바돈까지 가지 못 하고 바로 전 마을인 Rabanal del Camino에서 체크인을 했다.
산티아고 순례자를 위한 우체국 서비스
아침 8시, 알베르게의 체크아웃 시간에 맞춰 일찍 일어나 인근 카페에서 아침을 먹었다. HOKA 신발을 신은 후로 발은 훨씬 편해졌지만, 조그만 가방에 등산화를 데롱데롱 매달고 다니는 게 영 거슬렸다. 그래서 산티아고로 보내고자 우체국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다시 신지않을테니 홀가분하게 보내주었다. 신발 하나 뺐을 뿐인데 걸음은 더욱 가벼워졌다.

우체국을 들린 김에 우표도 10장 샀다. 1장 당 5천 원이나 하다니, 사놓고 살짝 놀랐다. 산티아고에서 20유로 이상 내 본 게 거의 없으니까 말이다. 가벼운 종이 한 장이지만 지구 반 바퀴를 돌아 가니까 비싼 건 아닐 거다. 여행을 자주 하지만, 기념품은 한 번도 사본 적이 없다. 선물 대신 편지를 보내는 편이다. 그래서 성당이나 미술관, 박물관에을 가면 꼭 엽서를 사는데 때로는 뒷면에 일기를 써서 한국으로 챙겨 가고, 때로는 편지를 써서 우편을 보낸다. 이번에도 무사히 도착하기를 :)

꼬불꼬불 꼬불꼬불 맛좋은 라면라면이 있기에 세상 살맛나하루에 열개라도 먹을 수 있어 후루룩짭짭 후루룩짭짭 맛좋은라면
알베르게에 도착하자 순례 1일차에 함께 걸었던 한국인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고급 정보를 접수했다. 건너편 바에서 라면을 판다는 것. 산티아고 길에서 두 번째 라면을 먹었다. 무려 6유로(8천 원)이지만 국물까지 싹 비우고 나니 13유로 하는 코스요리 못지 않는 포만감을 느꼈다. 먹는 동안 “음~~~!!! 후루룩 쩝쩝 음~~ ” 맛있어 죽겠다는, 행복에 겨운 소리를 들은 옆 독일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 왔다. "너 정말 라면을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맛있어?" 한국인의 소울푸드로 라면 만한 게 없다고 실컷 설명하고 짧게 대화를 나눴다.

알베르게에서 한국인이 순례자를 맞는다면?
알베르게 앞 성당에서 진행되는 저녁 미사를 기다리는 동안 영국인 할아버지 두 분과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이분들은 무척 친해보였는데 (덤앤더머같은 느낌) 만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순례길은 진짜 특이한 곳... 이 분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미 여러 번 완주했으며, 현재 2주 간 알베르게 운영을 돕고 있는 자원활동가라고 설명했다.

알베르게 자원활동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흥미를 보이자 “영어밖에 할 줄 모르는 나도 하는데 한국어까지 하는 너라고 못 하겠어?”라고 지원을 권유했다. 한국인이 전체 순례자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고 당연히 내가 더 잘 할 거라며, 원한다면 추천서도 써줄 수 있다고, 접수 사이트 주소를 알려주셨다. 언젠가 순례자들에게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를 바꿔가며 유창하게 설명하는 그런 날이 올까. 즐거운 상상이었다.

이윽고 저녁 9시가 되어 저녁 미사를 드렸다.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터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리를 채우는 것만으로도 홀리해졌다. 그런데 미사 도중 갑자기 몸이 차가워지면서 현기증이 핑-하고 돌았다. 사실 초등학생 때부턴가 나는 기립성저혈압이 있다. 젖은 머리에 얇은 옷을 입은 채로 앉았다 일어서길 반복하다보니 순간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온 몸에 힘이 빠졌다. 힘없이 주저 앉아 기도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진정될 때까지 일어나지 못 했다. 몸과 정신이 따로 분리되는 느낌이랄까. 그리곤 눈물이 주루룩 났다. 미사가 끝날 무렵 다시 멀쩡해졌는데, 왜 눈물이 났던 것일까. 몸이 힘들어서? 정신이 혼미해서? 나도 모르겠다.
25일차 32.16km
Rabanal del Camino Roncebadón Cruz de Ferro Manjarín El Acebo Riego de Ambrós Molinaseca Campo de Ponferrada Ponferrada

Rabanal del Camino는 산중턱에 있어서 일출을 보기 딱 좋은 마을이다. 그래서 새벽에 출발하고자 5시에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코고는 소리가 너무 심해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던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나와서 보니 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빛이 없어 길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깜깜했고 심지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 확인하지 않은 채, 헤드라이트도 없이 어떻게 새벽 길을 걸으려 했던 건지 참 고우정스럽다는 생각했다. 대책없이 마음만 앞서는 스타일.

새벽 향기 맡으며 - 빗소리 들으며 -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한 시간 지나서, 비오는 가운데 5km 정도 오르막길을 올랐다. 어제 저녁 Rabanal del Camino에서 체크인 하지 않고 욕심내 이 험난한 길을 걸었다면 과연 지금까지 나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조난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가파른 산길이었다.
산 꼭대기에 있는 다음 마을, Rocenbadón에서 리옹을 다시 만났다. 호스텔에서 조식까지 먹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고로 리옹은 키가 너무 커서 알베르게 침대가 불편하다고 한다. (키2m) 그래서 주로 전날 부킹닷컴에서 저렴한 호스텔을 찾아 예약을 한다. 진정한 순례자라면 알베르게에서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뭐, 사람마다 다르니까!
기껏 열심히 올라갔더니, 그 뒤에는 내리막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짙은 안개를 뚫고 미끄러운 돌 길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히 내려갔다. 거대한 물 웅덩이가 보이면 새 신발이 무사하도록 뜀박질을 했다. 산길인 데다가 날씨까지 도와주지 않아 “힘들어 죽겠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려고 할 때 즈음, 구름이 걷히면서 멋진 절경이 펼쳐졌다. 숨이 턱 막혀오는 절경을 보면서, 오늘도 30km를 걸었다. 이 행복, 사진 대신 마음 속에 오랫동안 간직해야지 하고 사진을 찍지 않았다.
오늘의 목적지 Ponferrada 까지 5km 남짓 남겨놓고 작고 예쁜 호수가 있는 Campo de Ponferrada 바에 자리를 잡았다. 땀 흘린 뒤 아름다운 호수 경관을 보며 레몬맥주를 마시는 시원함이란,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호수 뷰 한 번 보고, 일기 한 문장 쓰기를 반복하며 그 자리에서 2시간을 머물렀다. 그동안 리옹은 다음 마을로 먼저 갔다. 어차피 나는 알베르게, 그는 호스텔로 갈 거니까 목적지가 다르니 따로 가는 게 편했다.
26일차 24.67km
Ponferrada Columbrianos Fuentes Nuevas Camponaraya Cacabelos Pieros Valtuille de Arriba Villafranca del Bierzo

예쁜 도시가 왜 이리 많은 것인가! Ponferrada도 정말 매력적인 도시였다. 이곳을 최고로 꼽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유는 각각 달랐는데, 한 분은 코엑스처럼 큰 쇼핑센터에서 쇼핑을 맘껏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하고, 다른 한 분은 다양한 박물관들이 있어 볼 거리가 많아서라고 했다. 그 중 한 군데도 방문하지 못 한 게 아쉽지만, 전날 아스토르가에서 박물관 감상용 체력을 다 소모해버렸으므로 제일 유명한 템플기사단 성(Ponferrada Castle)만 둘러 본 것으로 내게는 충분했다.
실제로 폰페라다에는 고풍스러운 건물에 음향기기가 아기자기하게 전시되어 있는 라디오 박물관(Museo de La Radio), 1920년부터 1971년까지 운영된 전기 생산 공장을 복원해 생산방법을 실제로 보여준다는 에너지 박물관(Museo de La energía), 약간은 뻔한 철도 박물관(Museo del Ferrocarril) 등 유럽에서 손꼽히는 유명 박물관들이 있었다. 그분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많은 박물관이 있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템플기사단 성(Ponferrada Castle)

역시 오픈 시간을 기다리며 시계탑 앞에서 아침을 먹었다. 10시가 되자 크고 무거운 성문이 스스륵 열렸다.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 같았다. 들어서자마자 도시 전경을 보기 위해 성 꼭대기로 향했다. 몸 하나 겨우 지나갈 만큼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도시가 한 눈에 보였다. 높은 빌딩도 있고, 길에 차도 많았지만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선지 평화로웠다.

먹구름이 아슬아슬 하던 차에 보슬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를 피해 성 내부로 들어갔다. 그러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한, 구석진 자리를 찾아 바닥에 철푸덕 앉았다. 이른 아침이고 또 비도 내리고 있어서 지나 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고요한 이 공간이 중세 시대엔 어땠을까. 수백년도 더 된 바닥과 벽을 보면서 영화의 유니버스처럼 중세 사람들이 드나드는 모습을 상상했다. 아마 폭력이 난무하는 위험한 곳일 수도 있고,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온기를 나누던 방일수도 있겠지?
종종 기사단 복장을 입은 사람들이 행진하는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축제 시기를 잘 맞춰 오는 것도 좋겠지만 왠지 오늘은 사람 한 명 없는 정적이 좋았다. 방해받지 않고 상상할 수 있으니까. 오후가 되어 하늘이 차츰 맑아졌다. 지금이다! 하고 다음 마을로 출발했다.
성전기사단은 1119년 설립되어 1129년경부터 1312년경까지 활동한 천주교 수도회의 일종이다. 여러 기사단 중 가장 부유하고 권세가강했으며, 세계 전역으로부터 기부를 받아 규모와 권력이 급속히 성장하여 기독교 금융의 주요 기관이 되었다. 기사단의 세력을 경계한국가와 교황청에서 1312년 조직을 해산시키면서 성전기사단은 공식적으로 사라진다. 유럽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던 집단이 갑작스럽게 거세당하자 이에 관한 추측, 전설, 음모론이 여러 세월 동안 유통되었다.
위키피아(기사단이 뭔지 몰라서 찾아봄)
옆으로 내리는 비

6시간을 걸어, 목적지까지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비가 쏟아졌다. 그것도 옆으로. 내 우산은 속수무책으로 뒤집혔다. 보통은 운이 좋아서 피할 수 있는 곳들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처마도 없었다. 배낭 커버가 없어서 침낭까지 홀딱 젖어버렸다.
우왕좌왕 정신없이 걷다가 살짝 튀어나온 틈새가 있어 그쪽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비는 30분이 넘도록 계속 내렸다. 온 몸이 다 젖어버린 다음에야 다 포기하고 다시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구름 때문인지 길은 어두웠고, 좁은 길을 누구라도 나타날까 두려웠다. 언제 그칠지 모르는 천둥 소리 마저도 무섭게 느껴졌다. 그때, 우비를 입은 한 사람이 내쪽으로 걸어왔다.
의견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