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은으로부터 15호

뉴질랜드 편지 서랍 : 예은의 단상집 (12월 2주차)

2024.12.19 | 조회 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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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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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간.예은으로부터

비행하며 세상을 마음껏 음미하고 있습니다. 사라지는 영감을 글로 기록하고 내용 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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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은으로부터 15호

뉴질랜드 편지 서랍 : 예은의 단상집을 보냅니다.

 

 

12월 8일  : 바람과 나무 

 행복해서 목구멍 끝이 간지러운 기분이 든다. 아침에는 비가 많이 내려 캠핑카 침상에 누워 빗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지금은 날이 화창하게 개어 와나카 강변 카페 야외에 앉아 글을 쓴다. 와나카는 호수를 둘러싼 작은 마을이다. 걸어서 20분이면 동네 구석구석을 다 볼 수 있다. 하지만 풍경이 아름다워 멈추고 가다 또 멈추면 2시간이 금방 지나있다. 산책을 하다 한 옷 가게에 홀린 듯 들어갔다. 옷 가게 주변으로 꽃이 잘 정돈되어 있어 옷 가게인지 꽃가게인지 멀리서 보면 분간이 잘 안 간다. 가까이 다가서 보니 조금 촌스럽지만, 그렇다고 영 못 입을 정도의 옷은 아닌 옷들이 곳곳에 진열 되어있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한 할머니가 나를 반긴다. 할머니는 지금 당장 진열해도 될 것 같은 옷, 그러니까 할머니가 좋아하는 옷만 쏙 쏙 골라둔 것 같은 그런 옷을 입고 있었다. 한국은 유행에 따라 옷이 계속 바뀌는데, 이 할머니의 옷은 두고두고 내가 할머니 될 때까지 (옷이 해지지 않는 이상) 입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두벌의 옷을 샀다. 뉴질랜드에 운동복만 들고 와서 그런가. 유행과 거리가 먼 나의 할머니스러운 취향. 그 취향의 세계에 다녀오니 나름 기분 전환이 된다. 

 

 

17:08

와나카 호수 앞에 돗자리와 요가 타월을 깔고 누워 요가했다. 독서를 하다 눈을 감고 잔디 위에 누워 있었다. 얼굴 위로 스치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살랑이는 바람이 아니라 그냥 와아앙- 소리 내며 부는 바람이랄까. 아무렴 어떤가. 땅에 등을 붙이고 누운 채로, 하늘로 발을 들어 올려 본다. 발가락 10개를 힘껏 쫙 펼쳐 보면, 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발가락 사이로 그 감각이 선명히 느껴진다. 요가 매트 위로 올려둔 책 위로 나무 그림자가 지고, 그림자는 바람의 움직임을 그대로 담아낸다. 하얗고 검은 음영이 하얀 종이 위를 춤추듯 움직이고 그렇게 와나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내 책 위로 담긴다.

 

17:47

앉은 자리에서 명상을 오래 했다. 명상하는 동안 바람이 여전히 세차게 불어 머리가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명상하는 동안 내 마음속은 깊은 물 속처럼 고요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나의 외부를 세차게 쳐대고 흔들어도 나의 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명상을 마치고 눈앞에 보이는 나무를 응시한다. 나뭇잎이 매달려있는 얇은 가지부터 기둥을 지탱하고 있는 두꺼운 나무뿌리까지. 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얇은 가지와 나뭇잎은 결국 한 그루 나무 중 10%도 안 된다. 얇은 가지 밑으로 뻗어 내려지며 점점 두꺼워지는 저 나무 기둥, 그리고 내가 앉은 땅 아래로 얽혀 있을 뿌리들. 그래.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결국 눈에 보이는 얕은 가지와 얇은 잎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와 두꺼운 저 기둥의 속은 아주 단단하고, 무겁게, 그리고 고요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힘을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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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 엄마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거야?

 자기 전, 생각이 좀 많아진다.  나홀로 여행한 지 10일이 되어 그런 걸까. 내 안에 불쑥불쑥 외로움과 소외감이 찾아오곤 한다. 그럼 외로운 내가 싫어진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스물 아홉이 되어 서른이 곧 다가오니 단순히 이유 없이 떡볶이를 먹으며 웃고, 과자를 나눠 먹던 천진난만한 우정에도 점차 현실의 조건들이 우리에게 드리워진다. 엄마와 통화하며 말했다.

 

“서른이 되는 건 이런 거야? 내 진심을 온전히 진심으로 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점점 적어져.”

“평생에 그런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다행이라고 하잖아. 적어도 진심을 털어놓는 그 소수의 친구들을 소중히 여겨."

"넵."

 

12월 10일 : 캠핑카 여행을 하며 느끼는 것들.

92914의 오키나와를 들으며 와나카 카페 2층에 앉아 글을 쓴다. 파도 소리와 통기타 소리가 섞인 음악. 그리고 창을 통과한 햇빛. 책을 읽다 창문 너머를 보고 그러다 또 책을 읽는다. 와나카. 이곳이 너무 좋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책 읽기, 글쓰기, 명상, 요가, 산책 뿐이지만. 그런 나를 충만하게 만족시킨다. 더할 나위 없는 영감의 휴식처를 찾은 기분. 나는 어제 저녁, 와나카 캠핑장에서 3일을 더 머물기로 결심했다. 3박을 하고 오늘 떠나기로 했던 내 예상을 뒤집고, 12일까지. 그러니까 6일을 이곳에서 머무는 셈이다.  캠핑카 여행은 이제 6일밖에 남지 않았다. 캠핑카 여행의 9일 차. 캠핑카 생활을 하며 느낀 점을 적어본다. 

 

< 캠핑카 여행을 하며 느끼는 것들 >

(1)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고 바로바로 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중에 하는 것도 결국 '나' 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하면 그때가 지금보다 더 귀찮아짐…

 

(2) *내 삶을 내가 제어하고 있다는 감각을 

매 순간 충만하게 느낀다.

* 표시 : (출처: '인생의 해상도, 저자 유병욱')

 

(3) 내 공간, 내 하루, 하는 일 중 어느 것 하나

나의 의지, 선택이 빠진 것이 없다. 

 

(4) 잘한 것, 잘못한 것. 모두 나만이 감당한다.

그래서 못하면 못 하는 대로, 잘하면 잘하는대로.

칭찬하거나 탓을 할 필요 없이 묵묵히 다음 길을 간다.

 

캠핑카와 씨름하는 예은의 모습
캠핑카와 씨름하는 예은의 모습

 

 

12월 11일 : 감정  운동장

 그저께부터 생각이 정말 많다. 인간관계에 있어 서운한 마음도 들고, 다음 목적지를 어디로 향할지에 대한 고민도 하루 종일 나를 어지럽게 한다. 지금 머무는 곳이 너무 좋아 퀸스타운에서 2주를 머물게 될 여정에 대한 걱정이 먼저 앞섰다. 그곳이 여기보다 별로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 뉴스레터 보내야 하는데 언제 다 정리하지? 이런 잡생각. 한번 빠진 외로움, 불안, 걱정의 에너지는 내가 알아차리지 않는 한 나를 속절없이 그 속으로 미끄러지게 한다. 캠핑카 천장을 바라보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아휴! 그만 생각하고 싶어!!!' 이런 마음이 들때면 늘상 눈을 감는게 최고다.

 

 새벽 5시 30분. 눈이 떠졌다. 다시 억지로 잠을 자볼까. 생각하다 그냥 몸을 깨워본다. 몸을 일으켜 가스에 불을 붙인다. 주전자를 꺼내고, 물을 넣어 주전자에서 김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린다. 다 끓은 물을 머그잔에 따라 차를 우린다. 두 손안에 따스한 머그잔을 꼭 쥔 채, 목으로 넘어가는 온기를 느껴본다. 차를 입에 머금고 목으로 넘기며 나는 '억지로 생각을 그만하려고 하는 것'을 멈추려 한다. 그러니까 차를 다 마실 때까지 생각이 드는 대로, 나를 통과하는 모든 감정을 이 한잔의 차에 가득 담아내본다. 눈을 감고 학교 선생님이 내게 '자! 지금부터 아무 생각 하지 말아요!' 하면 오히려 '오늘 점심, 내일 입을 옷, 오늘 저녁 7시에 하는 지붕 뚫고 하이킥...동방신기, 슈퍼주니어...구몬 숙제...' 하고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르는 것처럼. 생각과 감정은 청개구리 같다. 하지말라고 하면 당해보란듯 마구잡이로 떠올라 나를 혼란스럽게 하니까.

 

그러니 생각과 감정이 맘껏 펼쳐져 나를 시원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생각과 감정의 운동장을 잠시 만들어준다.  차 한잔을 천천히 비워내고 나서야 명상을 시작했다. 명상을 끝내고 침대에 기대어 커튼을 열고, 창에 보이는 먹구름을 바라봤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지만, 회색 기운을 잔뜩 머금고 하늘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먹구름. 그 움직임이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로 빠르게 하늘을 가르고 지나간다. 그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무. 그 모양새가 꼭 내 마음 같았다.

 

먹구름이 몰려오는 과정 아래에 있는 모든 숨 쉬는 것들은 전부 그 아래에서 제 몫의 흔들림을 겪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금 내 안에 느껴지는 감정, 불쑥 얼굴을 내밀고 지나가는 생각들. 모두 잠시 구름이 지나가며 들려오는 거센 바람의 소리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이야기를 일기에 적어내는 동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먹구름의 이동, 거센 바람, 그 다음은 소나기. 소나기가 그치고 나면 다시 바람이 멈춘 세상이 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비바람 멈춘 마음엔 언제나 정화가 찾아온다. 마음에 영원히 고이는 것은 없다.

 

밀려드는 사색이 사라질까 재빠르게 일기를 적고, 깊은 잠에 빠졌다. 오전 9시 30분쯤 눈을 뜨고 창을 다시 보니 세상이 새파랗다. 청명하고 맑은 하늘. 거친 바람 소리 대신 평온한 세상 소리. 고요하다. 평온하다.

먹구름이 가고 난 아침
먹구름이 가고 난 아침

 

 

12 12일 : 와나카를 떠나야만 해.

와나카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동네가 한적하고 조용한 것 그리고 6일 정도를 와나카에서 머무니 이곳이 익숙해지기 시작해 생활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지금 타고 있는 캠핑카를 16일에 꼭 퀸스타운에서 반납해야 한다. 또 크리스마스로 숙박 예약이 모두 차버릴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예약한 15일 치의 퀸스타운 숙소도 있었다. 이제 와나카를 떠나면 그렇게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서, 마음이 심란했다. 캠핑카를 반납하는 날인16일까지 쭉 와나카에 있을까. 그런 고민도 하면서 말이다. 연인에게 이런 나의 고민을 털어놨다.

“나 오늘 퀸스타운으로 가지 말고 와나카에 있을까? 캠핑카 반납할 때까지 쭉.”

“글쎄. 너 캠핑카 여행 시작할 때, 어디든 실패해도 좋으니 도전하는 여행을 하고 싶다며.”

“맞지. 근데 와나카가 너무 좋은걸?”

“그렇지. 근데 퀸스타운은 네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곳이잖아.

겪어보지 않았는데 와나카가 더 좋을지, 퀸스타운이 더 좋을지 어떻게 알겠어.”

그의 대답에 나는 댕-. 머리를 세게 맞은 느낌이다. 맞아. 나는 겪어보지 않은 곳에 대해 본능적으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라며 섣부른 판단을 하고 있었다. 안전지대에서 벗어나 이런저런 실패를 경험해 보고 싶다던 다짐은 12일 만에 사라진 셈이다.

“그래. 와나카를 떠나야만 해.”

나는 퀸스타운이 좋든 싫든. 또 와나카가 너무 좋아 떠나고 싶지 않아도. 그런데도 이곳을 떠나기로 했다.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해 편견과 판단을 하지 않기로 하는 결심과 함께.

 

+) 크롬웰에서.

 

 퀸스타운으로 오는 길, 크롬웰에게 잠시 들렸다. 어느 카페에서 점심을 때우고, 커피를 마시며 휴식 시간을 갖는다. 류시화 시인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라는 책을 읽다가 오늘 나의 결정을 응원해 주는 문단을 발견한다. 책의 일부를 일기에 필사해 본다.

‘삶은 설명을 듣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

경험자들의 조언에 매달려 살아가려는 나를 직접 불확실성과 껴안게 하려고. 미지의 영역에 들어설 때 안내자가 아니라 눈앞의 실제와 만나게 하려고. 결국 삶은 답을 알려줄 것이므로. ‘새는 날아서 어디로 가게 될지 몰라도 나는 법을 배운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와나카를 뒤로한 채, 퀸스타운을 향하는 도중 나에게 찾아온 류시화 시인의 이야기. 

이 말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나에게 다가온 듯 했다. 마치, 이 이야기를 배울 시기가 되었다는 것처럼. 


 

12월 13일 : 오늘을 망친 범인은 바로, 너!

퀸스타운 시내에 처음 나왔다. 사람이 많고, 관광지 느낌이 물씬 난다. 어떤 곳은 걷는 것만으로 영감이 쏟아지는데 어떤 곳은 이렇게 걷는 것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릴 수 있다. 누군가에게 퀸스타운이 인생 여행지가 될 수 있어도, 그게 나와 맞지 않는 곳일 경우엔 이야기가 다르다.

 이곳에 대한 나의 부정적인 마음 때문인 걸까. 퀸스타운에서 가장 유명한 햄버거 가게 앞에 앉아 햄버거를 먹다 갑자기 태국인 아저씨에게 시비가 걸렸다. 내가 2인용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고, 그의 가족이 내 건너편 식탁에 앉았다. 그의 가족 식탁으로 해가 강하게 내리쬐어 그들은 자리를 옮겨내 식탁에 포함된 자리로 건너 앉기 시작했다. 뭐, 여기까진 괜찮았다. 그럴 수 있지. 햄버거를 맛있게 먹고 있을 때였다. 작은 식탁에 큰 햄버거, 어니언 링, 음료수, 책, 카메라까지 올려두니 자리가 부족해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식당 휴지를 내 식탁 아래로 내려뒀다. 그런데 태국인 아저씨가 나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내 식탁 위로 큰 소리가 나게 ‘탁-!’ 하고 휴지를 올려두는 것 아닌가. 나를 노려 보면서 말이다. (그는 노려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내가 그렇게 느꼈을지 모른다) 내 안에 미친 원숭이가 날뛰기 시작했다. 햄버거를 씹던 이로 그를 ‘아갸걁’ 소리를 내며 뜯어 버리고 싶어진다. 이상한 신경전이 발동한 나는 기싸움 하듯 그 휴지를 다시 있던 자리로 내려 뒀다.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다시 툭.

그러자 그가 나를 죽일세라 노려보기 시작하고, 나에게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

“너. (你) 한 명.(一个人).”

나 역시 중국어를 알아듣고 소통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가 괘씸했다.

심술을 부리듯 못 알아듣는 척한다. (반성한다)

“Sorry But I don’t speak Chinese. And I’m not Chinese.” (반성한다2)

그러자 그와 그의 가족은 내가 말한 ‘차이니즈’ 한 단어만 듣고 발끈해서 냅다 목소리를 높인다.

“We are not Chinese! We are from Thailand!”

여기서 나는 또 한 번 열을 받았다. (반성한다3). 너희가 중국어로 나한테 먼저 말해서 내가 중국인 아니라고 한 거야. 라고 말하니 아저씨는 서툰 영어로 또 내게 성질을 부린다.“You! Only one! You only one!!!”이때쯤 나는 보아의 온리원 노래를 속으로 흥얼거렸다. (유 알 디 온리원~ 온리원~.)
화가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에게 천천히 말했다.

 

“Yes. But no matter how many people are at this table, you should have asked me first before you took it (the napkin in question) away.”

 

그러자 그의 딸은 나에게 미안하다고 재차 나에게 사과했고, 그의 아빠에게 태국어로 상황을 설명하는 듯 했다. 나 또한 더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고 묵묵히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 더 점화된다. 그가 화를 참지 못하고 그의 물건을 내 식탁 위로 '탕! 탕!' 소리가 나게 다시 여러번 내려놓으며 화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온갖 태국어와 영어 단어들을 섞어가며 나에게 삿대질했다. 난 여기서 비언어적 의사소통의 힘을 느꼈다. 태국어는 사와디캅 코쿤캅 밖에 할 줄 모르는 나조차 적어도 그가 나에게 엄청난 비방을 해대는 중이라는 걸 그의 표정, 행동으로부터 알 수 있었다. (뭐랄까... 가족 오락관의 '고요 속의 외침' 같았다. 그러난 안 고요한...) "왜 이 테이블을 너 혼자 다 쓰려고 해!! 넌 혼자고 !! 우린 여러 명이잖아! 이 테이블은 네 것이 아니야악!"라고 소리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추측이다.

가만히 듣다 나는 그녀의 딸을 쳐다봤다. 나를 향한 측은지심 어린 그녀의 눈빛. 눈이 마주치고 그녀는 입 모양으로 내게 ‘Sorry-….’ 하고 고개를 재차 내저었다. 딸을 보고 화를 참자.. 하며 분노를 참고 참다 그가 자꾸 빵 따위로 내 테이블을 탕탕 칠 때마다 나의 이성의 끈도 점점 툭.투둑..뚝! 끊어졌다. 결국 나도 손에 들고 마시던 진저 비어 병을 그의 빵 옆에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놓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고 싶었다.

‘아저씨! 아저씨가 지금 망친 건 내 햄버거 맛이 아니에요!

아저씨가 내 하루를 완전히 망쳐놨어요! 나의 오늘을요!’

(하지만 말하지 못했다…)

10분 정도 지나 이 사연을 급히 메모장에 쓰는 지금. (나름 재밌는 사연 아닌가?) 상황을 다시 바라본다. 그 사람이 내게 했던 행동이 그렇게 나를 자극할 만한 일이었나? 이유가 어떠했든 그 상황에서 반응한 감정의 주체자는 나였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닐 수 있는 무의식적인 그의 행동을 ‘무례함’으로 해석하고 짜증 버튼을 누른 것 또한 난다. 버튼 주변을 살살 긁은 것은 그였지만, 두 손으로 세게 눌러 화를 내고 같이 짜증을 낸 것 역시 나 자신이다.. 그가 나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식탁에 휴지를 올린 것, 그 작은 행동 하나에 손 떨리는 분노를 경험한 내가 부끄럽고 후회됐다. 결국 내 하루를 완전히 망친 것은 그가 아니라 내 자신인 셈이다.

 

12월 14일 : 어제보다 오늘 더 많이... 사랑합니까...?

퀸스타운에 와서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이곳에 도착하고 이틀 동안 밤마다 감기약을 먹고 잤다. 아침에도 으슬으슬한 몸과 두통 때문에 오전부터 오후 3시까지 내리 차에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이제 다시 나가봐도 좋겠는걸?’ 그런 마음이 들 때 다시 시내로 나왔다. 어제처럼 퀸스타운은 여전히 사람이 많고, 관광상품을 홍보하는 피켓 투성이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보다 이곳이 좋다. 날씨도, 거리의 풍경도 다 어제보다 좋았다. 흐리고 먹구름이 있었는데도 그랬다. 이곳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한 것이 없다. 내가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뒀다. 매력이 나를 파고들 틈조차 주지 않은 채로, 경솔하게 ‘이곳은 이래서 싫고, 저곳은 저래서 싫다.’ 판단하고 있었다.

퀸스타운 캠핑카에서 하루종일 휴식
퀸스타운 캠핑카에서 하루종일 휴식

 

 

12월 15일 :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퀸스타운에서 마지막으로 온전한 하루를 보내는 날, 그리고 캠퍼밴을 반납하기 전날이다. 퀸스타운의 와카티푸 호수 변에 앉아 이틀 전과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나는 왜 그렇게 싫어했을까?’. 퀸스타운보다 와나카가 백배 더 좋은데. 하 괜히 여기 왔어.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상한 마음이 내 안에 크게 울렁였다. 처음 홀딱 반한 곳에 계속 머물 것을 괜히 새로운 곳에 도전하겠다 와서 영감도 잃고, 싸움도 나고, 컨디션도 저조해졌어. 그렇게 5일 중 2일 하고 반나절. 이미 떠나온 장소에 대해 미련을 놓지 못한 채 새로운 장소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오후 7시 40분. 저녁 8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퀸스타운은 해가 따뜻하게 내리쬔다.

“어제보다 날씨가 더 좋은 거 같아. 햇빛도.”

내 말에 베이글 가게 직원은 나에게 대답한다.

“아냐. 어제랑 날씨 똑같은데?.”

그래. 날씨는 똑같았고, 이곳을 받아들이던 내 마음은 달랐다. 유네스코 문화유산도 마음의 빗장을 굳게 잠근 내 앞에선 무력했다. 좋은 점은 눈에 점점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기는 이래서 싫고, 저기는 이래서 싫고.’ 가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로 바뀌는 전환점. 퀸스타운이 안 좋은 이유 100가지를 대라면 댈 수 있어. 라고, 말하던 어제의 나는 점차 사라진다. 내가 계속 와나카에만 머물렀다면 사유하지 못했을 생각이다. 결국, 와나카에서 퀸스타운으로 새로운 발걸음을 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내가 또 다른 새로운 결정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두려움이 아닌 확신으로 가득 찬 결정 말이다. 

퀸스타운이 좋아진 어느 날. 급하게 감정을 적는 중이다.
퀸스타운이 좋아진 어느 날. 급하게 감정을 적는 중이다.

 

 

🍀

 

뉴스레터를 갈무리하고 있는 지금은

캠핑카를 반납하고 와나카로 돌아와 머무르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 한참 에세이를 정리하고,

와나카에 하나뿐인 서점에 다녀왔는데요.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서점 앞에 이런 보드가 있더군요.

와나카 서점 앞에서 
와나카 서점 앞에서 

책  : 다시, 또다시 열어볼 수 있는 선물.

이 말 참 멋지지 않나요?

 

저도 이 멋진 말을 잠시 빌려, 아니 그 마음을 빌려 

여러분께 이 편지를 보냅니다 !

 

그럼 열여섯번째 편지에서 만나요 :) 

 

24년 12월 19일 목요일.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언제든 열어 볼 수 있는 선물을 담아서.

예은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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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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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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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months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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