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에게
예은으로부터 9호
온 세상이 덕후였으면 좋겠어 ! 를 보냅니다.
2024-06-14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것일 수 있잖아요.
설사 방에서 가만히 누워 쉬는 것이라도요."
나에겐 몇몇의 덕후 친구들이 있다. 여기서 덕후가 뭐냐고? 사전적 정의를 먼저 찾아보자.
덕후의 사전적 정의가 이토록 자부심이 느껴질 줄이야.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니. 나 역시 초등 교육 과정부터 직장인이 된 지금까지 열정을 다해 아이돌 덕질 (덕후의 열정적 활동)을 하고 있으니. 새삼 덕후 정체성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다.
앞서 말했듯, 나에겐 다수의 덕후 친구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소원 (소녀시대 팬덤 명칭) 1기의 욱, 교통 체증이 지독히도 심했던 LA의 고속도로에서 5시간 동안 거뜬히 일본 사케 이야기를 풀어 내던 사케 매니아 김 기장님, 스무살부터 십년동안 서울의 온갖 독립 영화 상영관 그리고 전국 각지의 국제 영화제를 누비고 있는 영화 매니아 수. 나와 함께 12년동안 도경수의 열렬한 팬인 영. 그리고 세븐틴과 BTS를 논하곤 그녀를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드는 Cathy까지.
글을 써내려가는 지금 이 순간, 그들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눈빛을 반짝거리며 좋아하는 무언가를 설명하는 그들의 표정, 옅게 붉어진 뺨과 살짝 올라간 광대, 웃음기 섞인 목소리. 상상만해도 지금 내게는 친구들의 좋아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요약하자면,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조카를 바라보는 이모 표정을 띄운 채 제 관심사를 말하곤한다. 한편, 1월 어느 날 회사 후배가 내게 취미 고민을 풀어놓았다.
“선배님은 취미도, 좋아하는 것도 많아 부러워요. 저는 좋아하는 걸 만들려고 해도. 쉽게 좋아할 수가 없어서요. 취미로 뭔가 해보려고 해도 그 마음이 오래가지 않아요.”
스스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그녀의 고민을 듣고, 나는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 물음표를 떠올렸다. 좋아하는 것을 찾고 그것을 계속 좋아하기 위해 나, 친구들은 얼마만큼의 시간과 마음을 쏟아 냈나. 그 마음의 시작은 어땠나. 그러다 나는 요즘은 예전보다 무엇인가를 진득히 좋아하기 더 힘든 게 사실이 아닌가. 하며 합의점을 찾는다. 좋아하는 것을 진득히 알아보기도 전에 새로운 자극이 밀려오고, 또 자극은 금새 지겨워지고, 다시 전보다 더 뜨거운 자극을 찾게 되고.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 후배에게 해줄 답을 고르고 그녀에게 말한다.
“생각해보면 요즘은 무엇인가 하나를 딱 정해놓고 진득하게 좋아 하기도 참 어려운 세상인 것 같아요. 눈 깜빡 하는 사이 유행은 바뀌고, 내가 그 유행이나 흐름을 따르지 않으면 순식간에 비주류가 되곤 하니까요. 또 내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영상을 보고 웃을 수 있다보니까.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찾기 어려운 게 맞죠. 노력 없이 쾌락을 맛볼 수 있으니까.”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의 숏폼만 봐도 그렇다. 엄지손가락 하나를 스마트폰 액정에 가져다대어 위로 쓸어 올리는 동작 하나. 그거면 5~10초 짜리의 짧은 영상이 뇌를 순간적으로 강하게 자극 시켜 도파민을 분비시킨다. 스스로 의식 하지 못한 상태로 자극에 노출 되어 수동적인 쾌락을 느끼다보면 점차 쇼츠에 중독되어 내가 무엇을 좋아했는 지 잊게 되곤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맥락이지만, 한참 유튜브 음악 플레이리스트가 생겨날 무렵의 나의 음악적 취향을 잃을 뻔 했던 적이 있다. 그때 알고리즘으로 유튜브에 로그인만 해도 우후죽순으로 떠오르던 음악 리스트들을 아무거나 눌러가며 노래를 듣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네가 어떤 음악을 보관함에 담아 놨는지! 한번 좀 들어보자.” 라는 말에 나는 “보관 음악? 난 요즘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음악 듣고 있는데…” 라고 답할 수 밖에 없었다. 친구는 이런 내가 낯설다는 듯.
“네가? 너 예전에 좋아하던 음악 목록 만드는 거 좋아했잖아!”
그러게. 5개월 전을 끝으로 더이상 추가되지 않던 나의 음악 보관함을 보고 머쓱하게 웃었다. “그냥 이거나 듣자” 하고 유튜브를 틀었다. 나 아닌 누군가의 취향이 담긴 음악을 들으며 이유 모를 씁쓸함, 부끄러움, 알고리즘에 대한 원망을 동시에 느꼈다. (친구에게 티를 내진 않았지만.)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은 나의 취향에 맞춰 새로운 발견을 도와주는 기술이자 동시에 나의 취향을 점점 사라지게 하는 기술이기도 하다고. 이후에 나는 나홀로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른바, 수동적 도파민 분비 방지 캠페인. 캠페인 방법은 간단하다. 되도록 음악 보관함에 들어있는, 내가 직접 선택한 노래를 듣기, 집에선 되도록 손수 골라 수집해둔 LP와 CD로 음악 듣기, 유튜브의 쇼츠, 인스타그램의 릴스를 3개 이상 연달아 보지 않기. 딱 3개만 꾸준히 지켜보기. 이렇게 알고리즘과 나름의 치열한 전투를 현재도 진행 중이다. 어쩌다 이 이야기까지 와버렸지? 아. 후배와의 고민 상담. 후배에게 나는 나의 캠페인까지 말해주었다. 돌고 돌아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할 수 있도록 노력 중인데, 그게 썩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다고.
그런 의미에서 한가지를 아주 오랜 시간동안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은 보면 볼수록 멋지다. 앞서 말한 것처럼 숨 쉬듯 새로운 자극과 매혹이 넘쳐나는 요즘 아닌가. 그런 와중에 지고지순하게 소녀시대를 17년 동안 좋아하는 사람이라던가, 사케를 위해 일본 여행을 다니며 사케 양조장만 찾아다니는 사람은 비단 소녀시대와 사케가 아니더라도, 열정적으로 사랑을 줄 것만 같다.
아이돌 덕질은 특히나 생면부지의 누군가의 열정과 꿈을 응원하면서 나 또한 성장하게 된다는점에서 건강한 영향을 준다. 나 역시도 그래왔고, 나의 친구 욱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걸그룹 소녀시대를 17년 동안 응원했다. 말하자면, 중학교 2학년부터 서른 초반인 지금까지, 그의 생애 절반의 모든 해에 소녀들이 존재한다. 소녀들이 몸이 부서져라 춤을 추며 성장하는 모습에 그는 아마 밤을 지새우는 노력을 배웠을 것이다. 해를 거듭하며 꿈을 이루어 가는 소녀들은 아마 학생시절 욱에게 또다른 꿈을 꿀 수 있도록 했겠지. 나의 오빠들이 나에게 아침마다 다른 직업을 꿈꾸게 해줬던 것처럼 말이야. 그와 가끔 덕질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이런 질문을 했다. “소녀시대를 17년 동안 좋아하면서 가끔 실망할 때도 있지 않아요?” 그는 아래 메세지를 보내왔다.
모난 점 대신 좋은 점을 더 눈에 담고 마음껏 응원하는 것을 17년동안 하다보면, 그것 자체로 또 그만의 능력이 되곤 한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본업에 충실한 모습을 보고 나 또한 어디에서든 충실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마냥 쉬운 일일지 모르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틈만 나면 이판사판처럼 어지러운 직장생활 속에서 어디 구석에 앉아 몰래 영상을 보기만해도 피식 웃음 짓게 만드는 한줄기 빛. 출퇴근 길 지하철에 앉아 내 아이돌의 노래를 듣고 순수하게 위로 받고 그래! 버텨 보자는 거야! 하고 이겨낼 수 있는 두줄기 빛. 모난 점만 눈에 담고 모난 것만 들으려고 하는 것이 본능이 되어가는 요즘 시대에 이렇게 무한 이타적인 사랑을 받고, 또 사랑을 주는 행동은 그 자체로 새로운 원동력이 된다. 마치 욱이 나에게 쾌활한 에너지를 주는 것처럼 말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주는 힘은 강하다. 용기, 성장, 인내와 배려. 그 모든 것을 좋아하는 과정 속에서 만나게 된다. 욱과 달리 이제 막 좋아하는 마음을 시작한 친구도 있다. 기주는 이제 막 발레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발레 입덕 속도는 가히 17년 욱 저리가라 (욱 미안해요) 할 정도다. 그녀는 6년 전 취업 준비 시절 문화회관에서 발레공연을 처음 접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기주의 상상 속 발레는 깡 마르고 예쁜 발레리나의 우아하고 정적인 춤이였지만 그녀가 실제로 마주한 발레는 단단한 근육에 역동적인 몸짓으로 혼신을 다하는 예술이었다. 관객 뒤에서 공연을 보던 그녀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발레를 배워보리라 다짐했고 6년이 지난 올해, 드디어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언니. 나 발레 등록하러 가. 오늘 퇴근하고 갈거야.”
“갑자기?”
“응. 갑자기! 용기가 생겼어.”
“무슨 용기?”
“발레를 하려면 굉장히 마르고, 유연성도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좀 두려웠어. 그러다 오늘 취미 발레 블로그에서 발레는 체형도 유연성도 상관없이 모두가 할 수 있었다고 하는 말 하나에 갑자기 용기가 생겼어.”
기주에게 발레는 반복되던 일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은 존재같았다. 그녀는 바쁜 업무에 지쳐 “나 언제 퇴근하냐..” 하고 지쳐있다가 오늘 너를 즐겁게 할 아주 작은 일을 생각해봐 뭐가 있어! 라는 나의 물음에 언제나 달력 속에 기록된 ‘퇴근 후 발레’ 글자를 말했다. 오늘 배울 새로운 동작에 대한 기대를 품은 듯, “언니 나 오늘 발레감. ㅋㅋ” 하고 답장을 보내는 그녀를 보면 나도 웃음이 난다. 어느 날은 막상 발레 교습소에 가서 배운 동작을 남들 보다 못했는지 잔뜩 시무룩해져서 돌아오더니.
“오늘은 나만 바보처럼 동작을 제대로 못했어.”
(야 괜찮아 기주야. 넌 왕초보잖아) 라고 대답해주려던 찰나, 똑똑한 그녀는.
“근데 앞으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아서 좋아. 배워보니까 자세 하나를 만들기까지 시간과 노력이 엄청 많이 필요하더라고. 전적으로 나혼자만의 싸움이라 누구를 탓할 수도 없어. 그래도 꾸준히 하면 내가 변해가고 있는게 보이고 그런 내가 너무 뿌듯해. 그래서 오늘처럼 바보 동작인 날에도 재밌었어. 혼자 해보다가 또 언젠가 될 것 같거든!”
그리곤 내게 스트레칭 하려고 하는데 좋은 요가매트를 추천해달라고 당차게 말하는 기주를 보며 나는 속으로 이 왕초보의 마음가짐에 박수를 보냈다. 오늘의 연습에 집중하며 시간이 지나 완성될 스스로의 동작을 기대하는 방식으로, 실패 마저도 재미의 일부로 여기며 발레 사랑을 시작한 그녀는 내가 여태 알아온 기주 중 가장 생기있어 보인다. 그 모습이 꼭 여름날에 제 향기를 발산하기 시작하는 아카시아 같달까. 또 그녀는 발레를 통해 새로운 삶의 관점을 만들고 있는 듯 했다. 기주는 취미 발레를 시작한 후 발레 공연을 보고 영상을 종종 찾아본다. 그러면서 발레 연습 전과는 사뭇 다른 시점으로 이 예술을 바라보게 됐는지 대뜸 내게 이런 메세지를 보내왔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들의 움직임 뒤에 축적된 시간과 노력을 고스란히 느끼기 시작한 기주. 그녀는 어쩌면 발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된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이 생애를 다 받쳐 만들어낸 움직임의 결과물을 보고 경이를 느끼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문화적 도파민은 딱 이런 거지 싶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아, 맞다! 후배의 고민 상담!
그래서 후배에게 어떤 말을 했나 되짚어 봤다. 나는 취미를, 좋아하는 마음을 찾고 싶다는 후배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돼요. 내가 편안한 마음이 드는 것. 그거면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일 수도 있어요. 설사 그게 방에서 가만히 누워 쉬는 것이라도요. 그러다 무언가 해보고 싶고 좋아해보고 싶으면 마음껏 좋아해보기도, 싫증이 나버리면 그대로 그만해보기도 해봐요! 그럼 언젠가 내 마음에 꼭 들어 맞는 녀석이 등장하더라구요. 나도 한입 먹고 뱉은 취미가 허다한 걸요.”
습관적으로 싫어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많아도, 내가 좋아하는 걸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사랑하는 후배가 얼마가 걸리든 오랜 시간 마음을 두고 아낌 없이 제 열렬한 마음을 쏟을 무언가를 찾기를 바라며. 좋아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욱과 기주의, 또다른 친구들의, 나의 하루를 무탈하게 혹은 위로하며 잠들수 있기를! 바라며. 이번 편지를 마무리한다.
Question . 구독자 이 요즘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Answer . 혼자 생각해보기, 글로 써보기, 예은에게 보내주기 등등..
잘 풀어 내고 싶었던 주제였는데 말이죠.
욕심이 과해 산으로 가버린 것 같습니다.
뭐, 산으로 가면 어떤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행을 했다는 것에 의의를..두겠어요 ...
여기까지 읽은 당신....대단합니다. 엄지 척!
그럼 열번째 편지에서 만나요 :)
24년 06월 14일 목요일.
예은으로부터.
댓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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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주디
안녕하세요 김예은 작가님 덕후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제 평범한 날을 예쁘게 기록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막간.예은으로부터 (75)
시즌 2, 발레하는 영상 기대할게요 신발레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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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장
좋은 글 잘읽었어요 예은 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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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슈
난 더 빠지면 안돼. 날 자극하지마. 안그래도 다시 사무실 들어가니 막 재밌어지기 시작해서 경계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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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춘
덕분에 용기를 얻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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