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에 대하여

2026.05.31 |

구독자님 안녕하세요, 초장레터의 2026년 세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새로 개편된 초장레터는 매월 마지막 날, 한 달간의 시간을 회고하는 짤막한 에세이를 보내드릴게요.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네요 : )

초장레터#18


서울에서 나는 자연을 꽤 좋아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주말마다 공원을 걷고, 창가에 화분을 두고, 날씨 좋은 날엔 한강에 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게 자연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연을 소비하는 것에 가까웠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쾌청한 날, 잘 정비된 길, 적당히 멀고 적당히 아름다운 풍경. 나는 자연을 즐기기 좋은 조건들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처음 든 건 4월 말 양양 오색에서였다. 비가 왔다. 우비를 챙겨왔지만 금방 소용없어졌다. 안개가 짙게 깔려 능선이 보였다 사라졌다 했고, 계곡물은 평소보다 거칠었다. 젖은 돌은 미끄러웠고, 신발 안까지 물이 들어왔다. 불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발을 멈추기가 싫었다.

빗속에서 보는 산의 초록은 달랐다. 물기를 머금은 잎들이 그 자체로 발광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끼는 더 두텁고 진하게 살아 있었고, 나무 기둥을 타고 흐르는 빗물 사이로 나무의 결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맑은 날이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들이었다. 비가 오니까 비로소 보였다.

우산을 접고 그냥 맞으면서 걸었다. 서울에서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는 지금껏 자연 앞에서도 비를 피하고 있었구나. 불편함을 최소화한 채로 아름다운 것만 골라서 보려 했구나.

지난 주 제주도 사계에서 워케이션을 보내고 왔다. 지내는 동안 비가 왔고, 바람도 많이 불었다. 사계는 산방산 자락에 기댄 작은 마을인데, 바람이 워낙 강해서 우산을 펴는 게 무의미했다. 그냥 맞았다. 비와 바람을 함께 맞으니 몸이 어딘가에 쓸려가는 느낌이었다.
또, 마을이 정말 조용했다. 1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일행이 뭔가를 말했는데, 그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서울에서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바람 소리와 풀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 목소리가 다 따로따로 구별됐다. 소음이 없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처음 알았다.

길을 걷다 보니 발길이 자꾸 멈췄다. 제주에서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뭔가 살아 있었다. 유채꽃이 끝물로 노랗게 남아 있었고, 그 사이로 남방노랑나비와 호랑나비가 바람에 실려 다녔다. 돌담 틈에는 이름 모를 들풀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팽나무 아래에는 고사리가 올라오고 있었고, 습한 돌 위에는 이끼가 두껍게 앉아 있었다. 무당벌레 한 마리가 내 손등에 잠깐 올랐다가 날아갔다.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무당벌레를 봤던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런 풍경 앞에 서면서 '자연스럽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그 말은 '매끄럽다', '어색하지 않다'는 뜻에 가깝게 쓰인다. 그런데 진짜 자연 앞에 서면, 자연은 그런 의미에서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날씨는 예측을 벗어나고, 길은 고르지 않고, 바람은 방향을 바꾼다. 그 모든 것이 자연의 방식이다. 뭔가를 거스르지 않는 것, 주어진 조건 안에 그냥 있는 것.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움의 원래 뜻이었는지 모른다.

나는 서울에서 너무 오래 매끄러운 것들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 같다.

두 여행에서 나는 초록을 많이 봤다. 그리고 초록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제대로 알았다. 이끼의 초록, 고사리의 초록, 빗속에서 빛나는 활엽수의 초록, 유채 줄기의 초록, 돌담 틈 들풀의 초록, 팽나무 아래 그늘의 초록.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들이 한 풍경 안에 수십 가지나 있었다. 4월 말에서 5월로 넘어가는 이 계절은 아직 짙어지기 전의 초록, 연두와 초록 사이 어딘가의 색이 가장 많이 살아 있는 때다. 이 시기가 지나면 여름의 무거운 초록이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지금만 있는 색이다.

그 기쁨이 예상보다 훨씬 컸다. 이 우주에 이렇게 많은 초록이 있다는 사실이, 무당벌레 한 마리가 손등에 올랐다가 날아간다는 사실이, 100미터 밖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쳐온 시간들이 함께 떠올랐다.

 

비 오는 날 산을 걷고, 바람 속에서 작은 마을을 거닐면서 내가 느낀 건 결국 하나였다. 나는 작다. 한없이. 그것이 불쾌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서울에서의 나는 무언가를 늘 하고 있다. 생산하거나 해결하거나 이동하거나. 그 안에서 작아지는 일은 대개 패배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자연 앞에서의 작음은 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그냥 있는 것. 그 상태가 오히려 홀가분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환경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랑은 충분히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비가 와도 나가고, 바람이 불어도 걷고, 손등에 올라온 무당벌레를 잠깐 들여다보는 것. 그런 식으로 조금씩, 자연스러워지는 연습을 해본다.

 

첨부 이미지


구독자님의 5월은 어떠셨나요? ☺️ 아래 “후기 남기기“ 버튼을 누르고 짧은 소감을 나눠주세요. 6월을 맞이하는 다짐도 좋아요! 정성껏 남겨주신 두 분을 추첨해서 그러메도의 식물성 콜라겐과 베지어트의 서리태 식물성 단백질 쉐이크를 각각 보내드릴게요! (~ 6/7까지) 🌿

 

첨부 이미지

초장레터를 다 읽으셨다면, 메일함에서 삭제해 주세요. 메일함을 정리하면 데이터 센터의 에너지 사용을 줄여 탄소 배출 감소에 도움이 됩니다. 나중에 또 읽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초장레터 홈에서 다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아래 버튼을 누르고 초장레터의 후기를 자유롭게 남겨 주세요. 더 좋은 콘텐츠로 보답 드릴게요💚

 

 

ⓒ초장 greenycart
ⓒ초장 greenycart

초장레터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협력과 실천을 지향합니다. 환경 관련 프로젝트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협업 제안이 있다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함께 지구를 위한 변화를 만들어가요! 💚

다가올 뉴스레터가 궁금하신가요?

지금 구독해서 새로운 레터를 받아보세요

✉️

이번 뉴스레터 어떠셨나요?

초장레터 님에게 ☕️ 커피와 ✉️ 쪽지를 보내보세요!

댓글

의견을 남겨주세요

확인
의견이 있으신가요?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세요 !

다른 뉴스레터

© 2026 초장레터

지구를 위한 작은 행동과 영감 한 스푼을 담은, 우리들의 지구 일기 🌿

메일리 로고

도움말 오류 및 기능 관련 제보

서비스 이용 문의admin@team.maily.so 채팅으로 문의하기

메일리 사업자 정보

메일리 (대표자: 이한결) | 사업자번호: 717-47-00705 | 서울특별시 송파구 위례광장로 199, 5층 501-2-31호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정기결제 이용약관 | 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