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는 130년 만에 역대급 폭설이 내리는 등 기후위기를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가요? 1월과 2월은 초장레터의 겨울방학으로 정하고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인데,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편지를 띄웁니다.
두 달 전에 릴스를 하나 올렸어요. 이미 보신 분들도 계시겠죠. 조회수가 700만 뷰가 나왔어요. 영상은 2018년 논란됐던 BBC의 다큐멘터리 속 한 장면인데, 논란이 된 건 다큐 촬영 중에 펭귄 무리가 협곡에 갇혀 탈출하려고 애쓰다가 탈진해서 쓰러진 걸 보고 촬영팀이 고민 끝에 경사로를 만들어준 것 때문이에요. 다큐 팀은 야생동물 촬영 시 개입 금지 규칙이 있었지만 결국 펭귄을 도와준 거죠.
이 릴스에는 2천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려서 흥미롭게 지켜보다가 문득 궁금해졌어요. 사람들은 대체 무슨 말들을 나누었을까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영상을 보고 공유하고 소감을 나누었을까요? 2천 개가 넘는 댓글들을 일일이 다 확인할 수가 없어서 댓글추출 프로그램으로 댓글을 다운 받아서 분석해봤어요.


댓글을 분류해보면 재미있어요. 대부분 감동했다는 반응이었지만, 일부는 자연에 개입해선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어요. 가장 많은 건 인간도 자연의 일부니까 개입도 자연스럽다는 의견이에요. 그다음이 생명이 규칙보다 중요하다는 쪽이고요. 그 외에도 인간이 환경을 파괴했으니 책임져야 한다는 말, 생태계 교란을 우려하는 목소리, 관찰자는 개입하면 안 된다는 원칙론까지 다양했어요.


각각의 논리가 나름 탄탄해요. 예를 들어 “인간도 자연”이라는 말은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놓지 않으려는 시도처럼 보이거든요. 하지만 동시에 좀 교묘하기도 해요. 우리가 뭘 해도 자연의 일부니까 괜찮다는 식으로 읽힐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환경 파괴도 자연인가요? 결국 이 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라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로 이어져야 할 것 같아요.

반면 생명 우선론은 가장 직관적이에요. 눈앞에서 고통받는 존재를 그냥 둘 수 없다는 감각, 그건 머리로 따지기 전에 가슴이 먼저 반응하잖아요. 실제로 저도 영상을 보면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펭귄이 얼어죽기 직전이었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이 따뜻한 감정이 온전히 펭귄을 위한 건지는 모르겠어요. 우리가 느끼는 안도감과 뿌듯함이 더 큰 건 아닐까요. 경사로를 만들어 기회를 줬다는 말도 그래요. 스탭들이 최대한 조용히 했다고는 하지만, 기회라는 단어 자체가 펭귄이 아니라 우리 관점의 언어죠. 펭귄에게 그 순간이 어떤 의미였는지, 정말로 원했던 건 무엇이었는지는 결국 알 수 없잖아요.
비슷한 맥락에서, 환경 파괴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쪽도 진지하긴 해요. 우리가 망쳐놓은 세상이니까 돕는 게 당연하다는 거죠. 이 논리에는 자기비판이 들어 있어요. 하지만 여기에도 묘한 지점이 있어요. 가해자가 구원자로 변신하는 순간, 주인공은 여전히 인간이거든요. 펭귄은 우리 죄책감을 덜어주는 도구가 되는 거예요.
한편 생태계를 말하는 사람들은 차갑게 들릴 수 있지만, 나름의 고민이 있어요. 한 마리를 살리는 게 나비효과를 일으켜서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거죠. 먹이사슬, 개체수 조절, 유전자풀 같은 말들이 나와요. 일리는 있어요. 하지만 이 논리에는 불편한 구석이 있어요. 전체를 위해 개체를 포기하는 건데, 그 개체에게는 자기 목숨이 전부잖아요. 누가 그 선택을 할 권리가 있는 걸까요.
규칙을 강조하는 쪽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어요. 관찰자는 개입하면 안 된다는 원칙은 과학적으로 타당해 보여요. 자연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거니까요. 그런데 남극에 촬영팀이 간 것 자체가 이미 개입은 아닐까요? 카메라를 설치하고 장비를 옮기고 사람이 움직이는 것 모두요. 왜 경사로만 개입이고 카메라는 아닌 건가요. 결국 이 규칙은 자연을 위한 게 아니라 인간이 원하는 종류의 정보를 얻기 위한 것 같다고 느꼈어요.

여기까지 쓰고 보니, 모든 입장이 하나를 공유하고 있더라고요. 결정하는 건 전부 인간이라는 거예요. 도와야 한다는 쪽도, 도우면 안 된다는 쪽도, 판단의 주체는 우리예요. 펭귄은 그저 우리 윤리 토론의 소재일 뿐이에요.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우리 중 누구도 펭귄이 뭘 원했는지 모른다는 거예요. 경사로를 어떻게 느꼈는지, 도움이 필요했는지조차 몰라요. 우리는 펭귄의 마음을 모르면서 펭귄을 위한 결정을 내려요. 내 감정을 펭귄에게 투사해요. 내가 저 상황이면 도움받고 싶으니까 펭귄도 그럴 거라고 가정하죠. 생태학자들은 개체가 아니라 종 전체를 생각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결국 인간의 시간과 기준으로 생명을 재는 거예요. 펭귄 한 마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전부인데 말이에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정말 펭귄을 생각한다면,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도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가 아니라, 애초에 우리가 거기 있어야 했나요. 관찰이 필요했나요. 기록이 필요했나요. 인간이 모르는 것들, 인간 없이 일어나는 일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걸까요.
물론 저도 영상을 보고 감동했어요. 경사로를 타고 내려가는 펭귄을 보면서 다행이다 싶었고요. 하지만 그 감동이 정답이라는 확신은 없어요. 어쩌면 그건 인간의 감정일 뿐이니까요. 펭귄에게 진짜 필요했던 게 구조였는지, 아니면 그냥 혼자 있는 시간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요.

다만 이건 확실해요. 펭귄은 이 논쟁에서 단 한 번도 말하지 못했어요. 모든 의견이 인간의 것이었어요. 찬성이든 반대든, 감정적이든 이성적이든, 주어는 전부 우리였어요. 그 침묵을 동의로 읽으면 안 될 것 같아요. 우리가 귀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에요.
어쩌면 가장 윤리적인 선택은 때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알지 못하는 걸 인정하는 것, 인간이 항상 옳은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그게 불편하고 답답하더라도요. 그것마저 인간의 감정일 뿐이니까요.
요즘 들어 더 자주 생각하게 돼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나은 답이 아니라 더 나은 질문인 것 같아요. ‘어떻게 도울까’가 아니라 ‘이들은 정말 우리의 도움을 원할까’, ‘우리가 보지 않아도 이들의 삶은 온전할까’ 같은 질문들이요.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하게 느껴지는 건, 단지 동물을 보호하자는 게 아니라 그들 자체의 관점을 인정하려는 시도처럼 보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인간 중심으로만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도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세계는 우리의 이해나 승인 없이도 존재한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게 진짜 공존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펭귄은 여전히 남극 어딘가를 걷고 있겠죠.
우리의 토론과 상관없이요.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무엇이었을까요? 🐧
스스로와 사투를 벌이며
겨울을 이겨내고 있는
초장으로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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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geun Seo
감동적이고 공감되는 내용이었어요. 가볍게 생각하면 닿기 어려운 통찰인 것 같은데 좋은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거인이라는 동화책이 생각나는 글이에요.
초장레터
와 초장레터 첫 댓글이에요! ㅎㅎ 너무 감사해요🥹😍 어떻게 꺼내볼까하다가 두서 없이 풀어봤어요. 앞으로도 동물권에 대한 제 생각을 더 용기내서 나눠볼게요. <마지막 거인>은 처음 들었는데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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