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배는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낮과 밤이 바뀐 공대생의 모임 운영 이야기

2021.05.25 | 조회 6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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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6 - 108배는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퇴사와 입사를 오고 가며 간헐적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108배를 이어오는 중이다. 퇴사하는 시점에서 왜 108배를 시작했는지 궁금하지 않는가? 직장에 복귀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108배가 진행 중인지 궁금하다면 더 좋겠지만, 딱히 궁금하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다.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읽었으니 끝까지 들어주시기를 완곡하게 부탁드리지만.

수행자는 아니지만 수행 비슷한 걸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얻어지는 게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 때문에 108배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던 것 같다. 계획 없는 퇴사 - 대표와 대판 싸우는 일? - 를 자주 반복하는 편이었지만, 뛰쳐나가면 의미가 절로 찾아질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믿음과 108배의 뜬금없는 시작은 다소 비슷했달까.

대표가 지지부진한 프로젝트를 끝장내자며 돌연 강원도 양양으로 ‘프로젝트 마감 작전’을 떠나자는 제안을 토해낸 것은 10년 전쯤이었다. 양양에는 때마침 회사가 운영하는 콘도가 있었다. 당시, 대표의 제안에 반감을 품진 않았다. 바닷바람도 쐴 겸, 반복하던 ‘집 => 회사 => 집’의 굴레에서도 벗어나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의 억압(?)에서 잠시 벗어나고픈 충동적인 이유도 없진 않았으니까.

“넌 둘뿐이니까 합숙 훈련에 돌입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겠다.”

‘둘뿐이라고? 게다가 합숙 훈련이라니… 우리 휴가 떠나는 거 아니었나? 그리고 내가 딩크라는 사실이 합숙과 무슨 관련이 있는데?’라는 짜증이 밀려왔으나 부정적인 것들을 속에만 품어야 했다. 한 편으론 서울 떠난다는 게 휴가라고 믿었던 자신이 한심할 뿐. 아무튼 그런 생각이 착각이라는 건 대표의 ‘둘뿐이라는’ 문장에 이미 담겨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 말에 숨긴 뜻이 설마 그거겠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기대하던 휴가와 비슷한 삶은 이틀도 못되어서 산산 조각나고 말았으니.

집을 떠나자, 고행이 바로 펼쳐졌다. ‘산속에서 대체 뭘 하지? 혹시 산삼이라도 캐러 들어가나?’ 주말마다 강원도로 떠나는 나를 보고 아내는 캠핑이라도 떠나냐고 비아냥 댔다. ‘아니 남자 둘이서 먼 양평까지 월요일 새벽마다 난리냐고 차라리 펜션이나 하나 차리자고 해’라고 말이다.

대표는 집중이라는 구실로 펜션 거실 정중앙에 폭 2미터짜리 책상을 두 대나 구비했다. 그 위에는 온갖 개발 장비들이 줄줄이 올려졌다. 그리곤 바로 다음날,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이론이 아닌 실전 코딩 강행군이 펼쳐져야 했으므로, 밥 먹는 시간까지 코딩 시간에 보태야 할 정도였다. 대표는 주인아주머니에게 문 앞까지 밥상 배달을 강요했으니, 우리는 배달의 민족을 이미 실행한 셈이었다.

옆을 바라봐도 눈, 뒤를 바라봐도 눈, 설산 속에서의 낮과 밤을 몇 달째 넘기곤 겨우 서울로 탈출에 성공했으나, 지옥의 풍경은 아파트에서도 계속 펼쳐졌다. 게다가 대표의 새로운 요구 사항까지 하달됐으니 그것은 아침마다 108배를 해야 한다는 통보였다. 108배? 참회의 수행이라도 펼쳐야 한다는 걸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라도 지었나?'

108배란 무엇인가? 나는 번뇌와 쓸데없는 집착에 빠진 반드시 나머지, 구원을 받아야 할 미물이 된 것이었다. 하루를 신성하게 시작해야 한다는 대표의 성토를 진지하게 수행하는 신도로 살아야 했으니, 108배는 정신적인 재무장과 바른 자세로의 교정, 단단한 호흡법까지 배우게 만들었다. 겨우 10분 만에 땀을 뚝뚝 흘리는 내게, ‘지금 우리가 하는 게 유산소 운동이 아니란 말이야!’ 마음의 수양을 쌓는 게 더 중요하다고 대표는 아침마다 설교하느라 바빴다.

대표의 지시에 따라 자세와 호흡에 집중했으나, 마음이 깨끗해지는커녕 온갖 잡생각 때문에 더 더러워지는 것 같았다. 나중엔 힘들어서 어지러운 것이 아니라, 생각이 너무 많아서 주저앉게 생겼더랬다. 매트에 무릎 자국이 생기는 걸 희한하게 쳐다보거나 마치 고양이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아올리는 대표의 우스꽝스러운 옆모습을, 그러니까 108배의 집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쓸데없는 구경에 빠지며 108배의 취지를 잊어버릴 때마다 신기하게도 대표는 ‘너는 참 생각이 많은 녀석이구나’라고 내 생각을 꿰뚫었다. 따가웠지만, 그렇다고 잡생각도 내 것인데 그것을 나에게서 떼어낼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108배에서 나는 이런 것들을 얻었다. 몇 년 동안 반복된 대표와의 충돌 탓에 정신이 병들어가고 있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대표가 제안한 108배로 온전히 못했던 정신이 정상을 되찾아가고 있었으니 단순 반복적인 행위가 정신을 하나로 정리하게 이끈 셈이었다. 단순하게 세상을 바라보면 그 어떠한 스트레스조차 견딜 수 있다고, 그런 힘은 내 안에서 나온다는 원리를 체험했던 것이다. ‘아, 뭔가 교훈적인 스토리로 전개되네.’ 이걸 내가 원하던 것은 아니었는데…

1배를 더할 때마다 세상에 대한 원망,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 대표를 미워하는 감정이 108배 방석 위로 차곡차곡 쌓여갔다. 온갖 불만들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어가며 제각각 소리를 질러댔고 나는 그 비명 소리에 쓰러질 듯했다. ‘지금 왜 108배를 하는 거야?’ ‘회사를 왜 때려치우지 못해?’ ‘왜 대표의 말이라면 참기만 하는 거야?’. 하지만 더 짜증 나는 것은 운동일 뿐이라고 무시했던 108배가 나에게 쌓인 울분, 괴로움들을 정말로 게워냈다는 사실이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108배는 강요의 옷을 스스로 벗어던지려는, 마음의 감옥에서 탈출하려는 자정 활동인 셈이었다.

그 시절 대표는 나에게 <생각 버리기>라는 이상한 책 한 권과 DVD를 선물했다. 그가 선물한 책에는 이런 글이 쓰여있었다. “생각이 정말로 그렇게 좋기만 한 것일까? 현대인들은 지나치게 생각이 많기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지고, 불안해하고, 망설이는 것은 아닐까?” 나는 결국 생각을 버릴 것인가 나를 버릴 것인가 고민하다 그 책을 버리는 선택을 감행하고 말았지만…

아, 어쩌면 그는 신선이었을까? 천수경과 금강경을 줄줄 외운다던 그는 얽히고설킨 내 마음을 어찌 꿰뚫어 보았던 걸까. 물론 그 사실은 대표의 입에서만 강조되었지만… 

현재 진행 중인 108배는 과거를 청산하려는 것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시끄러운 고독을 물리치고 ‘고요한 고독을 충전하는 시간’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다. 고독은 존재로서의 상실이 아닌 인간 그 자체만이 누릴 수 있는 고유의 멋이라는 사실, 그 108배 덕분에 삶이 균형을 되찾고 있다는 것. 이 이야기는 그러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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