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개발자에게 주어진 기묘한 특명

직장 다니면서 내 사업 하는 법

2022.07.04 | 조회 6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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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남몰래 소설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해놓고 공개하니 남모를 일은 더 이상 아니겠네요? 이 소설이 어디에 쓰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지금 이 순간 제가 가장 하고 싶은 일 쪽으로 기울기 위해 저의 모든 기울임을 소설 쪽으로 몰아붙일 요량입니다. 

이 소설은 말 그대로 소설입니다. 가상의 세계를 다룬다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그 소설엔 제 생각과 경험이 실제인 듯 가짜인 듯 구분할 수 없도록 장치될 겁니다. 어쩌면 허술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고 재밌지 않더라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안서 쓰기와 관련되어서 실용적인 글을 쓰려다가, 영 재미가 없어서 소설이라는 방식을 사용해보겠습니다.


“자, 이거 받아”

“이게 대체 뭡니까?”

나는 다소 삐딱한 투로 대답했다. 나 스스로도 그런 건방진 투로 이사의 감정을 자극한다는 게 놀라웠다. 게다가 지극히 무성의하며 관심 없는 단답형 형태의 말투라니.

두툼한 서류 뭉치였다. 아마도 한글로 작성된 문서인 듯했다. 대충 눈으로 흘겨보고 다시 내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투로 대화를 전개해나갔다. 물론 그 대화는 상대방에게만 유익한 그런 일방적인 색채를 띠긴 했지만…

“제안 요청서야. 제안 요청서가 뭔지는 잘 알고 있겠지? 뭐, 그게 무엇인지 중요한 건 아니니까. 어쨌든 읽어보고 일정에 차질 빚지 않게 잘 진행하라고”

“제안 요청서요? 그런 건 잘 모릅니다. 오늘 처음 들어봤습니다. 이사님.”

이사는 마치 항공모함을 오래도록 지휘했지만 어쩌다 재수가 없어 불명예 퇴역한 함장처럼 걸걸한 보이스로 말했다. ‘제안 요청서란 무엇인가?’ 물론 그 문서가 목적하는 바에 대해선 어렴풋이 알고 있긴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문서의 성격과 이뤄야 할 과제에 대해서는 카페 옆자리에 앉은 커플이 노닥거리는 사랑의 속삭임 놀이만큼만 이해할 뿐이다. 그 깊이와 가치에 대해선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고 내가 연애 전문가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서 내가 여태까지 결혼을 못한 걸까?

게다가 이건 기계적인 코딩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왜 그런 사실까지 일일이 알아야 할까. 그저 나는 하루 동안 주어진 코딩만 잘해놓고 퇴근하면 그만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업무도 내게는 모두 피곤한 것들로 취급될 뿐이다.

제안 요청서라는 것을 책상 위에 던져버렸다. 으악, 이라고 종이 뭉치가 소리를 지르는 듯하다. 디지털 시대에 종이 뭉치라니 그것도 빳빳하게 인쇄된 더블 에이라니, 나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

나는 그 종이로 뭉쳐진 덩어리들을 아무 의식 없이 그러니까 의무적으로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순식간에 훑어봤다. 하지만 아무리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읽어도 그런 종류의 문서들은 언제나 이해하기 따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더 힘들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주인공인 요조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그 책을 두 손에 들고 눈이 뚫어져라 문장에 집중하는 게 차라리 쉬운 일이다. 이런 걸 읽을 시간에는 차라리 소설 몇 페이지라도 읽는 게 더 유익하다.

제안 요청서에 따르면 그들의 요구 조건에 따라서 우리는, 아니 엄밀히 말한다면 내가 남몰래 궁리 중인 소설 쓰는 일보다 더 지독하게 골치 아픈 이 작업을 2주 이내에 마무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소설 쓰는 일이나 제안서 작업하는 일이나 마감이 있다는 사실은 같다. 하지만 둘이 가진 공통점은 오직 그것뿐이다.

내가 가진 무기는 현재 오직 이 제안 요청서뿐이다. 문제는 나와 경쟁할 무리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누군지도 모르는 적들과 적들의 소굴 정중앙에서 싸움을 펼쳐야 하는데 나는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다. 나는 오직 나와 싸움을 펼쳐야 하는 형국에 처한 것이다.

제안 요청서의 첫 페이지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잔뜩 쓰여있었다. 개발 요구 조건에 따라 치밀하게 뭔가를 준비해서 치밀하게 입력한 다음 치밀한 프로세스에 맞게 온갖 서류들을 치밀하게 업로드하면 된다. 말하자면 빈틈없는 일을 치밀하게 마무리해야 한다는 지령이다. 마치 비밀스러운 공작을 치밀하게 펼쳐야 하는 첩보원의 임무가 떠올랐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교하지 못한 나와 같은 왕초보 첩보원도 있다. 나처럼 코딩에만 그럴듯한 재주를 가진 인간 말이다.

이대로는 안된다. 이렇게 의식 없이 문제와 직면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승산이 없는 싸움에는 절대 뛰어들지 않는다. 그것이 이 지독한 승부의 세계에서 몸으로 겪은 일들이다. 예외는 허락되지 않는다. 내가 설계한 이 치밀한 세계에서는 더욱더.

“이사님, 제가 제안 요청서라는 것을 심각하게 들여다봤는데요. 제가 이것을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제안서 같은 건 영업팀의 김 팀장이나 기획팀의 설 대리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닌가요? 개발자인 제가 이 일을 왜 맡게 됐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스스로가 납득되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타입입니다. 제가 일을 할 수 있게 먼저 납득을 시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홍대리. 자네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네가 원하는 대로 펼쳐질 거라 생각하나? 소설을 좋아하는 자네가 잘 알다시피, 세상은 우리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네. 그저 어떤 사건이 터지면 우리는 그 사건을 이리저리 분석하고 봉합하고 치료할 뿐이지. 그 사건에 의미를 대입하려고 노력해 봤자 그런 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일이라네. 결국 자네는 한계에만 봉착하고 말 것이네. 그저 의심하지 않고 그 세계에서 하나의 일부분으로서 작동하면 그만이지.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질문은 더 이상 허용하지 않을 작정이네.”

“자네의 고민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네. 코딩이라는 일만 대학 졸업 후, 꾸준히 해온 자네에게 제안서 작업이라니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겠지. 하지만 직장 생활이란 게 어디 우리가 원하는 일만 하면서 펼쳐지는 것이었던가? 애초에 그런 일은 우리가 기대한 적이 없지 않았던가.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오늘로서 만 30년 가까이 되는 날이라네. 자네 생각으로는 나와 같은 부류는 진즉에 퇴물 취급을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그래도 선배로서 나의 경험을 반추해 보자면 직장이 그렇게 우리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네. 그건 냉정하면서도 엄정한 사실이지. 직감적으로 받아들이는 거라네. 의심하지 말게.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게, 그게 직장에 다니는 자네에게 주어진 현실이네. 그것이 자네가 이곳에 딱정벌레처럼 붙어 있는 이유라네.”

나는 이사의 말을 듣고 물론,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에서 턱밑까지 솟구쳐 올랐으나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 마치 나 스스로가 내 의견의 변호인인 된 것처럼 떠든다 한들 그것을 이사가 받아들일 가능성도 거의 제로였고 그저 변명으로 비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의식은 집에 두고 회사에서는 정해진 패턴대로 일만 하면 된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이자 마지막 수칙이다.

“일단 이사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추상적으로 말씀하셨지만 구체적으로 그러니까 찰떡 아이스크림처럼 받아들이는 건 제 몫이겠지요. 맨땅에 헤딩이라도 하는 각오로 잘 써보겠습니다. 제가 너무 막막해서 그런데 도움을 요청할 만한 분이 혹시 있을까요?”

역시 이사는 내 예상대로 대답했다.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도 작업을 지원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리플레이스먼트는 절대 없다는 아주 강경한 어조였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묵으로 이사에게 목례를 전달한 후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출력된 제안 요청서를 레이저라도 쏘아대듯이 뚫어져라 노려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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