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공심 2021.03.18 기억 #4

2021.03.18 | 조회 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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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기억 #1 - https://maily.so/gsletter/posts/605799

기억 #2 - https://maily.so/gsletter/posts/220382

기억 #3 - https://maily.so/gsletter/posts/1e5a6a

 

먹어도 먹어도 끝이 없는 샌드위치, 나이프로 조심조심 썰어가면서, 또한 균형미를 유지하면서 게다가 나의 고귀한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 샌드위치를 먹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표의 동태를 슬쩍 살펴 가며 옆 테이블에 앉은 백인 젊은 남녀의 옆눈길을 피해 가며 샌드위치 써는 일에 집중했으나, 높다란 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견고함을 유지하는 일이 힘든 건지, 배고프지도 않는데 억지로 샌드위치를 입에 밀어 넣는 것이 힘든 건지 분간하기 힘들었다는 사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햄은 왜 이리 두껍고 퍽퍽한지, 빵은 자꾸만 힘없이 부스러져 가루로 돌변하는 건지, 맛은 짠맛만 두드러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닥치고 먹어야 했다. 하지만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부피 앞에서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들고 하얀 깃발을 내미는 수밖에……. 그때 대표는 “이대리 샌드위치 다 먹은 거야?”라고 말하며 실망하듯 쓴웃음을 지었다. 90킬로도 넘는 덩치가 그 정도 양도 못해치우냐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는데, 나에게 그의 두 눈썹 일그러지는 모양이 뜻하는 바가, 마치 국가 망신 시키는 그런 한심한 녀석 정도로 비쳤달까.

대표는 마치 “미국이란 이런 곳이야”라고 큰 프라이드를 내미는 것 같았다. 빈 접시와 함께...... 한동안 말없이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 머뭇거리다, 대표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대리 말이야. 이번에 미국으로 출장 오게 된 이유는 잘 알고 있겠지? AudioVox 사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고객인지 이대리도 잘 알고 있을 거야. 사실, 이대리가 개발한 번들 소프트웨어가 그들에게 아주 중요한 건 아닌데, 그래도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제품의 성능과 더불어 바로 신뢰감과 직결될 테니 이대리도 좀 더 각별하게 신경 써주면 좋겠어. 게다가 우리 회사의 명예가 달린 일이니까, 또 50만 대 수출 계약을 위해서 이대리의 역할이 무시할 수 없다는 거야. 그래서 하드웨어 엔지니어 데려오지 않고 이대리를 이번 출장에 동행하게 한 거야.”

“그리고 말이야. 전팀장 어떻게 생각해? 그 친구와는 커뮤니케이션이 잘 돼? 둘이 동갑이잖아 그렇지? 그 친구 실력은 이대리가 보기에 괜찮은 거 같아? 내가 이번 출장이 끝나면 회사를 구조조정하려고 고민 중이거든. 전팀장이 없으면 회사가 잘 굴러가려나. 전팀장 연봉이 너무 세서 말이야. 이대리도 알다시피 소프트웨어는 번들만 잘 만들면 되잖아. 일은 대부분 하드웨어가 처리하니까, 될 수 있으면 소프트웨어 인력은 줄였으면 좋겠는데……. 이대리가 혼자 감당할 자신이 있으면 내가 연봉은 조금 더 보태줄 테니, 전 팀장은 내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전팀장 내보내는 문제는 내가 순리에 따라 처리할 테니까, 이대리가 나한테 확신만 주면 돼”라고 말하며 대표는 남은 샌드위치를 한입에 처넣더니 우걱우걱, 양쪽 볼이 터질 듯이 씹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내가 만든 인코더의 성능에 대해……. 그리고 출발하기 전 그들이 클레임을 건 문제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 여러 경우의 수를 계산했다. 그런데 나는 그 어떠한 현상도 문제점의 원인도 알지 못한 채, SCSI CD-ROM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만 들은 상태로 이곳에 도착했다. 과연 내가 여기서 그들의 문제점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문제점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걱정 따위에 빠진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런 걱정거리만을 머리 한가득 쌓아놓을 수밖에 없었다. 힘없이 옆으로 무너지는 샌드위치를 보며, 나도 내일 저런 신세가 되지 않을까, 우려만이 증폭했다. 미국 한복판에서 뉴욕도 아닌 로드아일랜드라는 시골 변두리에서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는 건 아닌지…….

게다가 나의 섣부른 대답이 누군가의 생계를 위협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니 등이 더 서늘해졌다. 나는 웨이터를 불러, 이곳이 왜 이렇게 춥냐고 클레임을 걸고 싶었다. 손발이 너무 차가워진 나머지 룸으로 빨리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한가득.

“뭐 그렇다고 너무 부담을 가지진 말아.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문제는 내일 확인하고 조치를 취하면 되는 거야. 전팀장의 문제도 내가 당장 해답을 달라는 건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고 나중에 얘기해 줘. 오늘은 샌드위치나 거하게 먹고 취해버리자고” 대표는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대표를 무시한 채, 룸으로 돌아왔다. 거짓말처럼 캐리어가 정리되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입어야 하는 옷가지들을 반대편 침대 위에 전시해놓고 3.4 킬로그램 노트북을 꺼냈다. 오늘 오전 JFK 공항에서 폭발물 취급을 당하며 윈도우즈가 맞는지 체크당했던 그 노트북을……. 만약 부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나는 현장에서 테러범으로 바로 체포됐을까.

아뿔싸! 정리하다 보니 칫솔과 치약을 챙기지 않았다. 노트북이 문제가 아니고 개발 툴이 제대로 구동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일단 샌드위치 먹은 기분에서 벗어나야겠는데, 나에겐 지금 칫솔, 치약도 아니 소금조차 없던 것이었다. 이건 마치 무인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옆에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친구 윌슨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할까.

뭐, 없으면 사면 된다. 이런 문제는 문제의 오촌도 되지 못한다. 근데, 이곳은 영어권이 아닌가. 몇 시간 전, 출입 심사를 통과할 때의 당당함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 “칫솔, 치약 음… 영어로 뭐더라. 학원에서 이건 배운 기억이 없네.” 어쩌면 영어 시간에도 배운 적이 없던 것 같았다. 그렇다, 난 칫솔과 치약이 영어로 무엇인지 배운 적이 없다. 그러니까 모르는 거다. 기억력이 고장 난 게 아니라.

“가방 안에 뭐가 있더라” 1999년, 스마트폰도 룸에 와이파이도 지원되지 않던 원시시대, 스티브 잡스도 재기하지 않던 시대, 폴더폰을 자랑삼아 들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가방 속에서 비밀병기, 즉 1,000페이지짜리 엣센스 실용 영어 회화 사전을 꺼내들었다. 난 그것을 가슴속으로 푹 안아들곤, 너만 믿는다,라는 기묘한 말을 책에게 걸었다.

 

199년 뉴욕 출장에 동행했던 민중서림 영어회화사전
199년 뉴욕 출장에 동행했던 민중서림 영어회화사전

 

출장을 떠나던 한국의 전날 밤, 나는 민중서림의 이 두꺼운 실용 영어 회사 사전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민 중이었다. 캐리어에 넣었다, 뺐다, 이랬다 저랬다를 수백 번 반복하며, 3.4킬로그램짜리 노트북에 1킬로에 육박하는 영어 회화 사전을 더하다니, 공부 못하는 놈이 가방만 무겁다고 스스로에게 핀잔주기를 수백 번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주어진 무기는 현재 이 두껍고 어깨를 부숴버릴 듯했던 영어 회화 사전뿐이었다. 차라리, 한영사전을 들고 올 걸 그랬나,라는 후회감이 밀려왔으나 그런 생각이 칫솔을 대신 구해다 줄 일은 아니니, 나는 1페이지부터 찬찬히 칫솔 또는 치약이 나올 때까지 넘겨보기로 했다. 그래, 아주 나다웠다. 편의점에서 손짓 발짓하기는 자신 없고, 영어 못해서 망신당하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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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과삶의 프로필 이미지

    일과삶

    0
    over 4 years 전

    이렇게 오래된 책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게 더 신기하네요 ㅎㅎ

    ㄴ 답글
  •  veca의 프로필 이미지

    veca

    0
    over 4 years 전

    그러게요. 22년전 사전이라니ㅎㅎ구조조정에서 칫솔과 사전으로 이어질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그 전팀장님은 어떻게 되셨어요???

    ㄴ 답글
  • 혜나무의 프로필 이미지

    혜나무

    0
    over 4 years 전

    99년이면Y2K로 온세상이 난리난, 결국 사기극 비슷하게 끝났던 그 이듬해가 생각나는 시간이네요. 저는 더 오래된 사전있어용 ㅎ. 그놈의 구조조정, 무엇을 조정해야 모르던 야만시대였음다 ㅜㅜ

    ㄴ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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