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공심 2021.03.17 기억 #3

2021.03.17 | 조회 4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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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호텔 침대에 걸터앉아 외로움을 만끽하려는데, 대표에게 인터폰이 도착했다. “이대리 배고프지 않아? 샌드위치나 하나 먹으러 갈래?”라는 소리에 내 뱃속은 이미 즉각적인 회신을 마칠 태세였다. “갑시다! 먹는 거라는데, 일단 가야지"라고 뱃속에서 열흘은 굶어서인지 근성이 한없이 떨어진 헝그리 보이처럼 생긴 녀석이 어깨를 밀쳤다. 하지만 한쪽에선 “아니, 유나이티드 항공 기내식으로 빵만 6끼를 연속으로 먹었는데, 또 빵이라고?” 하지만 고민할 이유도 주저할 이유도 없었다. 빵이라는데, 그것도 첫 번째로 맛보는 원조 of 원조 미제라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았던가.

룸에 들어왔던 복장 그대로, 그리고 캐리어는 침대 왼쪽에 덩그러니 방치해둔 채 문을 빠끔히 열었다. 목을 자라처럼 몰래 내밀며 밖으로 기어 나오니 붉은색의 은은한 조명과 초록색 카펫이 복도를 따라 일정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보이지 않던 장면이 필름처럼 차례대로 재생되는 기분과 함께 나는 일직선으로 나열된 좁다란 길과 천정 밑 친절한 안내선을 따라 1층 로비로 이동했다. 간혹 정장을 입은 비즈니스맨이 옆으로 지나갔고 그들은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나에게 미소와 Hello를 동시에 남발했다. 이유 없이 경직된 내 근육의 움직임과는 달리 한없이 여유롭고 한가로운 그들의 어깨와 발걸음, 그럴수록 더 굳어가는 나의 어색함. 비로소 미국의 문화를 제대로 인식하는 어떤 외로운 순간.

대표는 예상대로 로비 소파에 앉아, 영자 신문을 훔쳐보며 시건방을 떨고 있었다. 언제나 일정하게 자신의 규율과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는 사람, 누군가를 배려하듯이 먼저 내려와서 기다리는 편이 잦은 편이지만 그 속에는 상대방을 낮춰보려는 어떤 계급의식이 모순적으로 가득한 사람, 처음 만나자마자 민증부터 확인하며 반말을 바로 내미는 사람이 바로 대표였다. 대표는 내가 로비에 도착하자마자, “샌드위치나 먹으러 가자고 배가 불러야 잠을 푹 자는 거야”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빵이 수면제라나 뭐라나.

샌드위치를 파는 레스토랑은 꽤 어두웠다 천정에서는 중세 유럽풍의 샹들리에가 촌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뉴욕, 로드아일랜드 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족히 100년은 넘어 보이는 낮은 샹들리에, 게다가 전구 몇 개는 힘을 잃어서 위태롭게 반짝거렸지만, 그 불빛이라는 것은 차라리 촛대 끝에서 미끄러져내려가는 마지막 불빛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듯했다. 대표와 나는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어색함과 난처한 시선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아무런 다정한 대화도 아무런 긍정의 메시지도 없는 서로의 냉정한 눈빛만 간혹 의식하거나 한국에 두고 온 어떤 애절한 기억을 떠올리려는 의식만 눈동자에 가득했다.

대표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웨이터를 불렀다. 그는 아메리칸 스타일의 샌드위치 두 개를 주문하려는 눈치였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찰나의 시간이었겠지만, 아무튼 주문하자마자 샌드위치는 테이블 위로 바로 배달됐다. 샌드위치는 아주 커다란 접시 위에 얌전하게 놓여 있었는데, 그 접시의 규모는 삼류 호텔에서나 쓰다 쉽게 버려지는 그러니까 플라스틱으로 만든, 이유 없이 널찍하기만 한 그저 그런 싸구려 모양이었다.

가로세로 30센티는 족히 넘어 보이는 그 접시 위로 샌드위치가 넓고 높게 분포되어 있었으니, 나는 그 샌드위치가 어쩌면 미국의 위상을 대표한다고 순간 착각했다. 미국의 짧지만 강렬한 역사, 전쟁과 침략, 야욕, 차별, 우월함, 그들의 숭고한 가치가 샌드위치에서도 나타나는구나, 싶을 정도로 나는 샌드위치의 위용에 압도되고 말았다. 가운데 푹 꽂힌, 역시 한국의 이쑤시개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말하자면 한의원에서 마지막으로 요긴하게 써먹는, 긴급한 상황에서 사람 목 정중앙에 찔러 넣는 장침과 유사하달까.

아무튼 이유 없이 커다란 접시, 그 위에는 긴급 부하된 에일리언 새끼가 인간의 얼굴을 뒤덮은 충격적인 광경과 거의 비슷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음식이라고도 정의하기 곤란한 물건이 놓여있었다. 나는 샌드위치를 튼튼하게 떠받치던 가운데 봉침을 빼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빠졌으나, 그랬다가 안의 내용물들이 한꺼번에 흘러내릴 것만 같은 상상에 빠진 나머지, 입을 떡 하니 벌리고 말았으며 권총 자살한 커트 코베인의 소식을 막 전해 들은 사람처럼 눈을 크게 말아둘 수밖에 없었다.

눈으로 구경해도 충분히 배부르다는 사실, 자린고비가 하늘에 매달아 놓은 조기를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던 것처럼 나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로 그것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대표는 “이대리 왜 안 먹어? 설마 룸에서 뭐 먹고 내려온 거 아니지? 냉장고에서 음료수 안 먹었지?”라고 말하며 입속에서 양배추며, 양상추, 소스 같은 것을 내 샌드위치 위에 덩어리로 내뱉고 있었으니, 내가 그 샌드위치를 먹었다간 대표와 간접키스라도 나누는 것이 아닌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히 대표는 나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게 아닌지, 그날 밤 호텔 문고리를 부여잡고 밤새 떨어야 하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는 사실.

남북전쟁을 막 끝내고 고향으로 개선하는 장군처럼 샌드위치를 게걸스럽게 해치우는 대표의 입 모양에서, 중후한 중년의 멋을 뜻하는 불룩한 그만의 뱃살을 그려봤다. 그때 내 머릿속엔 ‘Vally”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렇다, 그는 한국의 계곡과 유사한 규모의 배를 보유했다. 자신의 성공, 자신의 부를 상징하는 Vally,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건방진 Vally, 인생의 상승과 하강 곡선을 담은 유서 깊은 Vally, 나는 그의 Vally를 탐험하는 상상을 하며 내 앞에 놓인 샌드위치에서 그가 쏟아낸 온갖 부유물들을 봉침으로 툭툭 튕겨냈다.

물론, 털어내는 작업이 비교적 용이하지 않았으므로 샌드위치가 내 입속까지 안전하게 진입되기에는 만만치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았다. 나는 짜증 나는 표정으로 웨이터를 불렀다. 대표가 5분 전에 손가락 하나로 까딱거리는 모양과 동일한 모션을 취하고 싶었으나, 나는 딱 소리가 나지 않는 손가락을 보유했으므로 나지막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웨이터를 불러야 했다. 나는 그에게 나이프와 포크를 달라고 말했다. 그는 말없이 잠시 후, 므흣한 표정으로 재료를 배달했다. 음,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미소가 기본인 것인가. "나처럼 굳은 사람들은 적응하기 꽤 어렵겠어",라고 생각하며 샌드위치를 본격적으로 분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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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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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향기

    0
    about 3 years 전

    공심님 글을 읽으면 대표님과 마주치고 싶지않은... ㅎㅎㅎ 저 밤에 문고리 잡고있는 공심님 생각하다 혼자 빵터졌습니다. 간접키스로 글을 버무리시다니 ㅎㅎㅎ재미있게 읽었어요 낡은 접시지만 그 곳 샌드위치는 먹어보고파요.

    ㄴ 답글 (1)
  • 망망

    0
    about 3 years 전

    위트 있는 표현과 재치입담 + 뭔가 대표님의 현실적인 모습을 적나라게 보여주신 글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메리칸 스타일 샌드위치 궁금하네요!! 실제로 드라마처럼 보이는 묘사 잘 보았습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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