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켜지지 않는 계단 #4

2021.07.06 | 조회 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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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오직 글로서만 승부하는 글쟁이의 뉴스레터, 주로 생산성 툴에 관련된 글을 보내드립니다.(가끔 소설도 씁니다.)

#. 불이 켜지지 않는 계단

  "제 이야기 잘 듣고 계신가요?"

  "네 잘 듣고 있어요. 무척 흥미롭네요.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켰다는 이야기로 당신의 과거를 해석해도 될까요? 1년 전의 기억을 이렇게 상세하게 기억할 정도로 당신은 그때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남겼고 그때 생긴 부채를 아직 청산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편이로군요. 그래서 그때로 계속 돌아가려는 것 같고요. 일종의 회귀 본능이라고 봐야 할까요? 사람은 특정한 과거 시점에 집착하는 편이기도 하니까요."

  "네 저에게 다소 편집증적인 면이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아마도 그 문제가 계속 제 깊은 곳 어딘가를 찔러 대는 느낌이 들어요. 시간이 지나면 그 통증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좀체 가라앉질 않네요. 오히려 더 심해진다고 할까요? 괴로웠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형체조차 없는 대상에게 털어놓고 나니 조금 시원해진 것 같긴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도록 당신에게 저의 허물 같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저는 당신의 이름조차 모르네요. 뭐라고 당신을 부르는 게 좋을까요?"

   "저는 어떤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고 어떤 이름으로도 불리지 않아요. 저는 이름표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그러니 적당하게 아무렇게나 불러주셔도 괜찮겠지만, 꼭 호칭이 필요하다면 앨리스라고 불러주세요. 여자 이름으로서  부를 만하죠? 지금 마침 생각나는 게 그 이름뿐입니다만."

  앨리스, 나는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부르고 1년 전의 그날로 다시 되돌아갔다.

#. 10개월 전, 강남의 어느 회사

  전 팀장이 퇴직하고 나서 회사는 그의 자취를 지우느라 바빴다. 그가 진행했던 혹은 진행할 예정인 신규 프로젝트조차 태스크 목록에서 말끔하게 지워졌다. 그것은 대표의 주도하에 차곡차곡 실행됐다. 대표에게는 회사의 비전보다 누군가의 그림자를 지워버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주 체계적으로 주도면밀하게, 하지만 그 일은 대표의 손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시선만 흘려보낼 뿐이었다. 로마의 검투장에서 죽음을 면하지 못한 검투사의 마지막 장면처럼 대표가 엄지손만 아래로 까딱하면 전 팀장의 흔적은 단 며칠 만에 지워지고 말 태세였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난 이후에 나는 생각보다 멀쩡했다. 평상시처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공원에서 30분 동안 조깅을 했고 10분 동안 면도와 샤워를 했고 아침으로 스크램블 에그와 토스트 한 장을 먹었으며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며 신문을 1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꼼꼼하게 읽었다. 그런 일이 끝나면 다이어리에 그날 해야 될 업무들의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두었는데 모든 행사가 이전과 이후에 했던 일과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7시 회사에 도착했다.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그날 밤부터였다. 전 팀장이 회사에서 나가고 난 후, 정확하게 3일이 지나서부터 일상에 변화가 찾아왔다. 그런데 그 변화란 것이 변화치곤 너무나 급진적인 것이었다. 말하자면 진보주의자 중에서도 가장 좌측에 서 있는 자들의 의식과 마찬가지였다고 할까. 

  아무튼, 4일째 밤이었다. 나는 평상시처럼 그날 벌어진 일들을 평가하고 10분간의 명상을 마친 이후, 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침대 왼쪽 위에 놓인 '장 그르니에'의 <일상적인 삶>을 펼쳐 들었다. 시작한 지 반년이 넘도록 진도가 나가지 않던 책이었다. 보통 이런 책을 들면 아무리 집중하려고 해도 거의 5분 만에 스르르 잠에 빠져드는 편이다. 언제 잠에 들었는지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니, 이 책이 원인 불상의 수면제 역할을 감당하는 건 분명하리라. 나는 이 책을 완독 하려는 게 아니라 숙면을 위해서 이용할 뿐이었다.

  보통 5분이면 기억을 잃어야 하는 게 마땅했다. 책을 펼친 시간이 11시쯤이니까 11시 5분에 의식을 잃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읽다 보니 자정을 넘겼고 어느새 1시를 넘어서게 됐다. 의도치 않게 '2. 산책'부터 시작해서 '8. 수면'까지 진입하게 됐다. 우연히 이야기에 몰입하게 된 바람에 시간이 그렇게 밤을 훌쩍 넘어버렸다는 사실, 어느 경계에서 경계로 이동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했다. 나는 그저 책 내용이 지루한 부분에서 흥미진진한 부분으로 넘어갔을 거라고 짐작했다. 가끔은 그런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고 그 책을 완독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나중에 읽을 부분을 적당히 남겨두자고 다짐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세상은 더 밝게 떠오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혹시나 내가 스위치를 내리지 않은 건가 싶어 눈을 뜨고 공기 중을 더듬거렸지만 역시 검은 어둠뿐이었다. 다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동자 위에 아주 커다란 바윗덩어리 하나를 올려두었다고 가정하며 그 바위에 깔린 내 모습을 생각하니 갑자기 끔찍스러워지는 바람에, 아침까지 뜰 수 없게 만드는 본드를 눈두덩이에 발라두었다고 대신 상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잠은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은 더 각성됐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가 반복한 일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며 그 일들에 평가를 내릴 것을 주문했다. 오전 회의 시간에 대표가 지시한 결함의 수정 시기, 점심시간 이후, 공원에서 산책하며 동료와 나눈 대화의 조각들, 퇴근 후 소개팅한 상대와의 무의미한 식사 장면이 하나하나 기억의 수면 위로 부상하는 것이었다.

  그런 기억들은 개별적으로 소각을 원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것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재판관처럼 하나하나에 대해 기억의 대피소로 이동을 명령했지만 그 기억들은 이미 사라져 버린 좀비 같은 기억만 더 환생시키는 것이었다. 하나의 기억에 희미하게 달려 있는, 어쩌면 회생 불가처분을 받은 기억의 표층들이 하나둘씩 실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전에도 가끔 잠이 오지 않는, 불면증 취급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는 걸 허망하게 지켜보며 좌절하는 날이 꽤 많았으니까. 그날도 과거의 어떤 날과 비슷했다고 여길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날도 나는 평소 패턴대로 행동했지만 당황스러운 현상은 이틀째 지속됐다. 맙소사, 나는 <일상적인 삶>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12. 자정'에까지 미치고 만 것이었다. 이건 내가 바라던  아니었다. 단지 나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고요히 침대에 누워 다음날 아침까지 기억을 전당포 같은 곳에 맡겨두었다가 다시 값을 치르며 되찾으면 그만인 것인데, 아예 맡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었다. 내 담보 물건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걸까. 내 물건이 더 이상 값어치가 나가지 않는 건가. 이것저것 생각을 해봐도 도저히 어떤 결론을 낼 수 없었다. 아예 나는 악몽조차 꿈꿀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었다. 이렇게 흘러가다, 설마 아예 잠을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심각한 상상을 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역시 다음날에도 나는 단 1분도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이제는 과거의 특정한 일들 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미래가 현실로 이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을 내가 미래라고 규정한 이유는 단지 그런 장면을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은 미래일 것이라고 판정했지만 천기가 누설되면 실제 예상한 결과대로 미래가 펼쳐지지 않듯, 그런 장면은 꿈도 아니면서 꿈의 형태를 가졌다. 어쩌면 그것은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은 기억이 나지 않는 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꿈꾼 것이라고 생각했던 즉 눈을 감고 나서 보인 장면들이 모두 생각나서 그것들을 지우느라 바빴다. 그렇지만 그 장면은 지우려 할수록 더 깊이 내 머릿속에 각인됐다. 보이지 않지만 내 목에 걸어둔 명찰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그런 잠들지 못하는 밤이 10일을 넘겼을 때 내 의식은 부정에서 체념으로 다시 긍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을 감아봤자 그 어떠한 장면이 나타난들 그것은 현실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차라리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날부터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서재에 꽂힌 책을 모두 완독하고 말았으며 그 이후부터는 마무리하지 못한 잔업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책을 읽는 것도 가끔 따분해졌으니 남은 회사일을 처리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믿었다.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서 좋은 실적을 거둔다면 현재 공석이 되어버린 전 팀장의 자리를 내가 차지할 수도 있겠다는 가정에까지 이른 것이다. 물론 나는 스스로에게 놀라고 말았다. 전 팀장에게 부채의식이 남아있었다고 10일 전까지만 해도 그와 연락을 취해야겠다고 다짐하던 내가 이제 그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그리고 있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밤마다 일에 몰두하던 나는 어느 날 교묘한 아이디어를 계획하게 됐다. 그래, 이왕 밤을 새운다면 회사에서 실천하는 게 현명한 일이 되지 않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자, 바로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물론 업무환경을 회사로 옮기기만 하면 된다. 회사는 24시간 쾌적한 근무 환경을 제공한다. 노트북 한 대와 추가 모니터 두 대 정도라면 못할 일이 없다. 그렇게 회사에서 아침 7시부터 새벽 5시까지 업무가 이어졌다. 새벽 5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 패턴대로 조깅을 하고 샤워 후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건지, 회사로 돌아가는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그것을 나누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 될 정도로 나는 회사에서 사는 남자가 되었다. 물론 그 일 덕분에 나는 대표에게 깊은 신뢰감을 안길 수 있었다. 더 많은 일들은 더 많은 기회를 제공했고 나는 그것들을 기한 내에, 아니 납기 일정보다 보통 일주일 빠르게 해치웠다. 그러던 어느 날 대표가 전 직원을 모아놓고 한 마디를 했다.

  "이 대리 보라고,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 봤어? 게다가 이 성실성을 보라고 주어진 일들을 적어도 일주일 전에 끝내 놓고 다음 오더를 기다리는 자세를 봐. 마무리 못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반드시 끝내 놓잖아. 근데 너희들은 대체 뭐하는 인간들인데 6시만 되면 땡 하고 집에 들어가기 바쁘냐고. 여자 친구 만나고 영화 보러 가고, 그렇게 일과 삶의 균형만 맞추면 전부야? 회사는 어떻게 되고? 회사에 왔으면 적어도 회사에서는 능력을 보여줘야지. 따박따박 월급이 나오니까, 대충대충 일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저녁이 없는 삶을 찾으면 그만인 거지? 회사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고 말이야. 보통 오더가 떨어지면 너희들은 일주일 분량을 이주일 동안 질질 끌지. 느릿느릿 시간이나 끌다, 그러니까 연예인 가십거리나 보고 엑스파일에나 관심을 갖지. 어떤 인간은 영화까지 받고 있지. 그래 놓고 마감이 닥치면 꽤나 바쁜 척 해. 아주 유난을 떨어. 하루 동안 말이야. 그리고 지구가 망한 것처럼 광고를 하고 다니지. 다음번에는 꼭 마감을 지키겠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말이야"

  "TF를 구성해야겠어. 앞으로는 오더대로 끝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저성과자로 간주해야겠어. 그 사람들의 평가를 철저하게 내려서 연봉에 반영할 생각이야. 아, 물론 이 대리는 이번 달에도 최고의 퍼포먼스를 냈으니 그에 맞게 월급을 200% 지급할 생각이야. 부러우면 열심히 하라고  대리처럼 보여 주라고!"

  사실 이런 칭찬 아닌 칭찬을 받고서 나는 우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는 실제로 내가 슈퍼맨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할 정도였으니까. 다른 사람은 모두 지극히 평범하며 나는 그들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여겼으니까. 그들과 나의 대우가 달라져야 하는 건 마땅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는 그날부터 팀장이든 임원이든 모두 내 아래로 깔아 두기 시작했다. 철저하게 내가 계산하고 의도한 대로 회사를 움직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곧 내가 신이었으니 내가 판단한 사실은 절대적인, 즉 거역할 수 없는 대표의 오더와 마찬가지 취급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들이 반드시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나를 미워하고 적대시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결국 썰물처럼 회사에서 빠져나갔다. 물론 나는 빠져나간 사람들의 역할을 때우면 그만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는 보충병들을 채우면 된다고, 게다가 나 스스로가 보충병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충병을 꼭 외부에서 수혈할 필요가 있겠냐고 결정해버렸다. 실제로 내가 짐작한 대로 회사는 계속 성장했고 시스템은 더 완벽한 체계를 갖춰갔다. 오히려 내 안의 시스템이 더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촘촘하게 당겨졌달까. 나는 더 완벽하게 너트와 볼트를 조였으며 그것은 외관상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터진 것은 4달이 지난 후였다. 그러니까 전 팀장이 퇴사하고 정확하게 6개월이 경과된 시점으로 이제 회사가 나를 중심으로 안정적으로 돌아가게 된 시점이기도 했다. 월요일, 저녁 나는 평소와 똑같이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곧바로 자리에 돌아왔다. 오후에 처리하던 일을 마무리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노곤함이 밀려왔다. 6개월 전, 장 그르니에의 <일상적인 삶>을 처음 읽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버린 것이었다. 그날 나는 내 책상 키보드 위에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까지 12시간을 내리 자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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