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맞는지 잘 모르지만, 왠지 저는 오늘 당신에게 묵은 이 이야기를 전달해야 할 것 같은, 어떤 숙명적인 전환점을 만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에게도 털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나 주어져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진술을 시작해보도록 하죠.
이야기 중심엔 저와 회사의 대표가 등장합니다. 이 사건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건이 발단이 된 특정 시점이죠. 제가 저주인지 축복인지 모를 그것을 받게 된 시점이기도 하고요.
그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표가 저를 호출했습니다. 대표방에서 따로 이야기를 나눠도 무방한데 그는 굳이 바깥으로 저를 데리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잠시 카페에 가서 차나 한잔하자고 하더군요. 저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고작 대리에 불과한 제가 대표와 독단적으로 그것도 월요일 아침부터 대화를 나누게 된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죠. 여간해선 그런 일이 회사에서 벌어지지 않거든요. 게다가 제가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은 상황도 아니니, 딱히 대표가 개인적으로 불러서 일을 지시할 일도 없었습니다. 저는 기껏해야 팀장이 지시하는 프로젝트의 아주 작은 부분을 담당할 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대표가 저를 개인적으로 불러서, 카페에 데리고 간다? 거기서 비싼 차를 사준다? 게다가 구두쇠가? 대체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겉으로는 애써 침착한 척 굴었지만 속으로는 수없이 많은 걱정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설마, 회사에서 나가라는 건 아니겠지? 회사의 자금 사정이 곤란해져서 대리에게마저 연봉을 지급할 수 없으니 회사는 앞으로 차/부장 시스템으로 재편할 예정이다,’ 이런 유의 충격적인 발언을 건네려고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는 게 아닌지, 저는 마치 5분 후에 총살을 당하게 될 포로의 운명이 된 것 같았어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니 식도에 그게 걸려서 내려가질 않더군요. 저는 정말 심각했습니다. ‘나 큰일 났다’, 이런 생각만 했죠.
대표와 저는 회사 건물 1층에 위치한 카페에 입장했습니다. 푹신한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대표는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 표정을 보니 저는 속으로 더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대표의 알 수 없는 표정 안쪽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공상해야 했습니다. 그는 표정이 없는 얼굴로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뭐 마실 건지 물어보지도 않고 대표는 수박 주스 두 잔을 주문했습니다. 저는 왜 제 취향을 물어보지 않느냐고 질문하고 싶었지만, 수박 주스를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어서 그저 잠자코 기다렸습니다. 대표는 카페 아르바이트생에게 주문을 해놓곤 계속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거나 뭔가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어쩌면 저와 정면으로 대면하는 게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어쩌면 자신이 지금 건넬 말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요한 발언은 꼭 그 상황이 닥치면 땅바닥에 흘려버리곤 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그렇게 모순적이게도 특정한 상황이 되면 꼭 트리거되는 사건들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치 밥솥에 갓 씻은 쌀을 얹혀놓고 그 쌀이 빨리 밥이 되길 기다리는 무척 초조한 사람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그 긴장과 어색함이 흐르는 분위기가 참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견디기 어려운 것도 아니어서 그냥 인내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대표가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대리, 내가 할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즉흥적으로 대답해 줬으면 좋겠어. 이 대리도 알다시피 요즘 우리 회사가 외부에서 투자도 받고 자문도 받고 이래저래 외부에서 손님도 자주 드나들고 바쁜 상황에 처해있잖아. 지난주부터는 정부과제 제안한다고 기획팀이든 기술팀이든 그쪽에 투입되느라 다들 정신없고 말이야. 이 대리도 지난주에 제안서 작업하느라 힘들었지? 집에도 거의 못 갔다고 들었어.”
“제가 힘들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저야 기술 부분의 한 꼭지만 담당했을 뿐인걸요. 특정 키워드로 구글링해서 얻은 아이디어를 정리해서 전 팀장에게 토스한 것뿐입니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매일 하는 일인걸요.”
이렇게 말해놓고 저는 스스로의 경솔한 태도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토스한 것뿐이라니, 제 일을 심각하게 훼손한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투자한 시간과 노고를 단숨에 깎아내리는 불손한 태도라니 제가 이렇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는지, 저의 태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대리는 다 좋은데 말이야. 스스로를 너무 깎아내리는 것 같아.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는데 말이야. 그걸 스스로 눌러버린단 말이지. 사회생활을 잘 하려면 때로 포장을 잘 할 필요가 있어. 물론 내실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걸 겉으로 포장하는 것도 능력이야. 오랫동안 사회생활을 유지하려면 말이야. 어쨌든 이게 본론은 아니니까. 다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지. 내가 오늘 이 대리를 회사가 아닌 바깥으로 불러낸 이유는 말이야. 일단 회사에는 귀가 많잖아. 엿듣는 사람이 어딘가, 그러니까 화분 뒤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보안이 허술할지도 모를 테니 이렇게 따로 부르게 됐네. 그렇다고 아주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니까 긴장할 필요는 없어. 어이, 어깨에서 힘 좀 빼라고, 이 대리는 어깨에 날이 너무 날카롭게 서 있단 말이야. 자네는 그 힘을 좀 뺄 필요가 있다고.”
대표는 어떤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선포하고 나서 주문한 수박 주스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뭐가 급한지 그 한 잔을 다 들이켜고 리필이 되는지 아르바이트생을 불렀어요. 물론 수박 주스는 리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걸 리필이 되냐고 묻는 대표가 비상식적인 겁니다. 이런 태도를 보이는 대표가 나에게 어떤 말을 던질지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긴 다 좋은데 말이야. 수박 주스가 리필이 안돼. 저 옆에 ‘노르웨이 숲’ 거기 가봤어? 노르웨이 숲에 가면 그곳에서는 뭐든지 한 번 까지는 리필이 되거든. 그러니까 허용을 한 번 해준다는 거지. 어쩌면 눈감아준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겠어. 나는 그런 곳에 가면 인생을 한 번 더 사는 기분이 든다니까. 그거 한 잔으로 하루가 충전이 되는 거지. 아주 기분이 좋아져, 그런데 여긴 그런 예외적인 구석이 전혀 없어. 늘 정해진 대로 적확하게 흘러간다니까. 심할 정도로 뻔한 결과를 맞게 되니까 영 재미가 없어. 그래, 이 대리는 어떤 사람인가? 예측이 되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 편인가?”
저는 갑자기 대표가 저더러 예측이 되는 사람이냐고 묻는 바람에 마시려던 수박 주스를 테이블에 그대로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라고 대답하는 게 좋을지, 그에게 점수를 따는 게 중요하려나, 제 소신을 지키는 게 중요하려나, 저는 그 어떤 것조차 올바른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긴장감에서 단 한순간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생각나는 대로 아무 소리 나 내뱉을 수밖에 없었죠.
“그런 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예측한 대로 삶이 흘러간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죠. 저는 그저 아침에 출근해서 이메일을 습관적으로 체크하고 버전 관리 시스템에 접속해서 오늘 해결해야 될 Task를 내려받는 게 전부입니다. 그걸 내려받으면 오늘 내로 해결이 가능할지, 아니면 며칠 더 시간이 필요할지 판단해야 합니다. 그 결과는 곧바로 제 상관인 전 팀장에게 보고해야 하죠. 그런 일은 보통 30분 내에 판가름 나는 편입니다. 일은 매우 투명하게 흘러갑니다.”
“그렇군. 어쩌면 이 대리는 예측하지 못한 변수들, 그러니까 시스템의 에러 같은 것들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겠어. 예측이 만약 부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불확실한 상황이 연속적으로 닥치게 된다면, 예정에 없던 사건이 당장 벌어진다면 어떻게 대처할지 궁금해지는걸? 나는 말이야 지금부터 그런 면을 테스트하고 싶어. 말하자면 이 대리의 기민한 대처를 시험해보는 거지.”
“뭐 그렇다고 긴장할 필요는 없어. 이 대리의 의견을 묻는 것뿐이니까, 이 대리의 대답이 회사의 균형을 무너뜨리지는 않을 거야. 다만 이 대리의 의견을 듣고 싶은 거야 나는 지금. 회사는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 있어. 해외 사업을 벌이는 중이고 다음 달에 바로 10만 대의 플레이어를 선적해야 하지. 우리는 OEM 업체로서 발돋움 중이지만 언젠가는 자사 브랜드를 갖추게 될 거야. 그런데 요즘 나는 의심을 좀 갖고 있어. 지금 소프트웨어 팀이 시너지를 제대로 내고 있는지 잘 모르겠거든. 전 팀장을 다들 신처럼 떠받치는 분위기던데, 그렇게 팀원들은 속으로도 전 팀장을 신뢰하는지 묻고 싶어. 아니 솔직히 말한다면 전팀장이 회사에 꼭 필요한 인물인지 알고 싶거든. 만약 전 팀장이 회사에서 부재하다면, 그가 맡은 일들은 다른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변수에 대한 대처 방안? 이런 게 듣고 싶어.”
저는 속으로 대표가 왜 전 팀장을 언급하는지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대표가 전 팀장을 내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얘기겠죠. 전 팀장은 사사건건 대표에게 직언을 하는 편입니다. 대표가 싫어할 만한 이유를 골라서 얘기하죠. 대표는 그런 전 팀장이 마뜩잖을 것입니다. 대표가 편한 말만 하는 고분고분한 사람을 선호할지도 모릅니다. 거의 모든 회사의 대표는 그런 편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동일한 사상을 가진 사람과 일하고 싶어 하죠. 비위에 거슬리는 인간은 옆에 두고 싶지 않습니다. 팀장의 위치라면 더욱더. 그래요, 전 팀장은 다소 반항아적인 기질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즐기는 인물은 아니죠. 그의 의견은 대체로 회사를 위한 것이며 절차적으로도 꽤 정당한 편입니다. 게다가 공정하기까지 하며 바른 생활을 추구하는 멋진 사나이죠. 자신의 이권을 챙기는 것보다 팀원들을 무리 없이 이끌며, 될 수 있으면 그들의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회사에 맞서는 역할을 자처합니다. 그는 우리의 방패인 셈입니다. 대다수 팀원 들의 입장을 배려하고 대변하는, 약자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전 팀장입니다. 그런데 대표는 저에게 물었습니다. 전 팀장의 필요성에 대해서 그가 부재해도 팀이 굴러갈 수 있는지 그 여부와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입니다. 저는 대표의 발언에 숨은 의미를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걸 이해하면 어쩌면 저는 회사에서 곧 요직으로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단기간에 임원이 될지도 모릅니다. 기회일까요? 위기일까요? 명석하면서도 신속한 판단이 필요했습니다.
“저에게 왜 전팀장의 부재를 물어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맡은 일은 회사에서 꽤 핵심적입니다. 그가 없이는 아마도 대부분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길 겁니다. 게다가 그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 하드웨어적인 지식에 대해선 그를 따라갈 사람이 회사에 없을 겁니다. 심지어 저도요”
“그래, 그건 나도 잘 알지. 전팀장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선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런데 회사라는 건 말이지. 때로 본래의 기능적인 것보다 때로 정치적인 목적으로 굴러가기도 한 단 말이야. 이를테면 회사에 상습적으로 반기를 드는 인간과 순종적인 역할을 가진 사람 중에서 어떤 부류를 선택할 것인가, 이런 문제에 봉착할 때는 아무래도 회사의 장래를 위해서 보다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할 필요성이 있거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전 팀장은 내 이론에 반한다고 할 수 있겠지. 나는 그래서 지금 고려 중이야. 그러니까 복종 의식이 전 팀장에게 없다면, 솔직하게 말해서 전 팀장을 내치게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지. 그런 결론을 얻는다면 이 대리가 그의 업무를 대체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난 듣고 싶은 거야.”
전, 그 자리에서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제 대답 하나가 누군가의 운명에 도장을 찍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전 누군가의 인생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자친구는 사귀어도 절대로 결혼까지는 진전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저대로 제 일만 수행하면 그만인데, 회사는 다른 차원의 임무를 저에게 원합니다. 하지만 제가 살아남아야 한다면, 어쩌면 제가 출세할지도 모르는 길이 열리는 기회라고 생각하니, 그 유혹을 견딜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전 팀장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그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까? 뭐, 딱히 못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와 달리 경험이 조금 모자랄 뿐, 닥치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지 않겠나.'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결론을 짓는 것보다 대표에게 그 역할을 맡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의사와 상관없이 이미 대표는 결단을 내렸을 테니까요. 저는 어차피 그의 의견에 따르면 그만일 테니까요.
“그 부분에 대해선 제가 따로 드릴 의견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대표님의 결정에 따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저는 저에게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모자란 제 생각으론 이것저것 따질 형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나는 이 대리가 내 생각이 옳다고 믿어줄 줄 알았다니까. 내가 이래서 이 대리를 좋아하잖아. 다음 일, 그러니까 손에 피 묻히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회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 대리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알았지? 이렇다 할 논평조차 할 필요가 없다고.”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대표의 말에 긍정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방관자에서 적극적인 동조자가 되고 말았죠. 대표와의 면담이 끝난 후, 한동안은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회사는 똑같이 매일 굴러갔고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해냈습니다. 회사는 승승장구를 거듭했습니다. 모 증권에서 투자 심사를 받았는데, 주당 5백만 원이 넘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저는 말단 대리였지만 몇 천 주의 주식을 받게 됐습니다. 순식간에 부자가 된 것이죠. 솔직히 그런 급작스러운 금전 앞에서 떨리고 설레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에 휩싸였습니다. 더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 이바지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전 팀장의 퇴사 소식이 전해진 것은 정확히 두 달 만의 일이었습니다. 미국 오디오 업체와의 계약이 결렬된 시점이었죠. 그쪽에서는 파일럿으로 제공한 소프트웨어의 결함을 문제 삼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원인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그 업체가 변심한 것이었죠. 다른 한국 쪽 업체에서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회사에선 그런 경우에 희생양을 필요로 합니다. 불운하게도 그 타깃이 전 팀장이 되고 말았죠. 전 팀장은 워낙에 올곧고 정의로운 사람이며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 자신이 맡은 부분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습니다. 전 팀장은 사직서를 제출했고 그 서류는 오전에 내린 커피가 식기도 전에 수리됐죠. 참 빠른 속도였습니다. 사람의 운명이 서류 한 장에 처리되고 동시에 그의 짐이 박스에 옮겨졌습니다. 인수인계며 사후 처리 등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후에 회사를 바로 떠났습니다.
저는 그 광경이 남의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제 고통이 아니었죠. 순수하게 저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부의 고통이었습니다. 뭐, 그걸 느껴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일에 개입하는 건 딱 질색입니다. 저는 겉으로는 굉장히 아쉽게 그를 송별했지만, 재빠르게 제 일로 복귀했습니다. 기계적인 습관에 따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전 팀장이 회사를 떠난 그날 밤부터 기묘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침대에 눕자마자 1분 만에 잠들던 제가 불면증에 걸려버리고 만 겁니다. 나쁜 습관이 갑자기 생겨버린 겁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불면증이라는 녀석은 제 삶을 급습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제 영역을 공격한 것이죠. 그날부터 저는 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불능 상태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단 1분도 잠들지 못했으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매일 7시간 이상 자던 사람이 눈을 아무리 감고 있어도 잠에 빠지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전 너무나 심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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