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1

뉴욕에서

2021.03.11 | 조회 8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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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대생의 심야서재 뉴스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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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라는 단어엔 '잃어 가다'라는 두 가지 작은 동사가 숨겨져 있다.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을 잃고 살았으면 '잃다'와 '가다'가 동시에 떠올랐을까. '가다'는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움직임, 그러니까 바뀜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가다'에는 인간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보다 원거리의 이동이 가능하도록 돕는 비행기와 여행자라는 명사로 사유가 확장된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장소를 바꾸면 과거에 머물렀던 어떤 장소, 그곳에 나를 기다리던 사람에 대한 단기 기억 상실증에 빠지게 되지만 새롭게 도착하는 장소에서 새 기억을 수집하게 될 거라는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이 여행자의 숙명이다. 사람이든 장소든 잃어야만 여행지에 가서 낯선 기억을 담아낼 수 있을 테니까.

뉴욕가는 비행기 안에서
뉴욕가는 비행기 안에서

기억에는 떠나고 유입되는, 바다의 끊임없는 연속적인 흐름 같은 것이 담겨 있고, 그 바다를 건너는 비행기 안에서의 들뜨고 설레는 여행객의 감정이 들끓고 있고, 이별을 막 끝낸 상실과 대비되는 역설적인 반가움이 뒤섞여 있다. 기억은 오래된 화석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만지면 쉽게 부스러지고, 매서운 파도처럼 격정적이다가도 어느 순간 고요해지며, 점점 멀어져도 다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이해 못 하는 귀소본능 같은 것이 도사린다.

1999년 처음으로 뉴욕을 찾았다. "뉴욕은 처음이야. I Love Newyork"이라는 반가운 문장 보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스러웠다. 업무라는 명찰이 붙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여행이었으나 바다를 건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므로.

바다는 상상보다 넓었다. 내가 살아온 시간만큼의 분량으로도 내 생각의 커다란 부피로도 메울 수 없는 바다는 한없이 길고 부드러웠고 가끔 성을 부리긴 했지만, 비행기 안에서 펼쳐지는 바다는 과거의 몹쓸 기억조차 완벽하게 덮어줄 정도로 넓고 포근하기만 했다.

공항에 내려서 검문을 당하듯이 이쪽저쪽으로 서류를 검사를 받아야 한다며 불려 다니고 또 가방 뚜껑을 열고서 그 속에 곱게 접어 놓은 속옷까지 모조리 수색당했지만, 유색인종이라서 그러니 그런 모욕과 수치심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굴종 탓에, 그 시간을 버틴다는 게 곤혹스러워도, 그런 시간도 결국은 한국에 두고 온 쓰린 기억처럼 유통기한이 만료될 거라는 기대감도 동시에 존재했다. 기억은 그렇게 선택적으로 저장되고 미래에 선택적으로 복원된다. 어떤 기억은 의식과 상관없이 사멸을 선택하고 어떤 기억은 평생 함께 가야 하는, 말하자면 오랜 지병처럼 따라다닌다.

엠파이터 스테이트에서 바라본 정경
엠파이터 스테이트에서 바라본 정경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테러범이라도 된 것 같았다. 그것은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낡은 옷차림, 입국장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엄격하고도 반듯한 복장, 날카로운 눈빛, 저역대의 음성 그리고 그들이 내미는 강압적인 서류의 문자들에서 나타났다. 왜 뉴욕에 온 거냐고, 이곳에서 어떤 이익을 취할 거냐고 묻는 그들의 질문에, 우리는 목적이 없는, 단순히 여행객의 신분으로서 이 나라를 택한 것이라며 설렌 감정을 에둘러 감춰야 했다. 어쩌면 그 순간 나는 바다를 건너온 사람, 15시간 이상을 날아서 내가 살던 대륙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오랫동안 살아야 할 것만 같은 희망에 빠지기도 했으니, 어쩌면 그들에게 나는 유죄였을지도.

지금 생각하는 그날의 기억, 미국에 처음 도착한 장면은 이유 없이 선명해진다. 사진처럼 남아있으나 단어 몇 개만 간신히 살아남은 1999년의 그날을 머릿속에서 들춰내는 의도는 무엇일까. 무작위적으로 사라지는 기억의 마지막 반란일까. 기록으로 남기려는 세포들의 단순한 봉기일까. 앞으로 다시는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될 거라는 불안함 탓일까. 그래서 그때의 기억이 나에게 경고장이라도 던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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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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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과삶의 프로필 이미지

    일과삶

    0
    over 4 years 전

    1999년 전 시카고에 출장갔었는데 말이죠 ㅎㅎ 태어나 처음 간 해외출장인데 비즈니스 클래스로다가. 그땐 그게 좋은 건줄도 몰랐던 철없던 시절이네요.

    ㄴ 답글 (1)
  • 망망의 프로필 이미지

    망망

    0
    over 4 years 전

    코로나19 이전에는 출장일이라해도 지금 보면 또 좋은 추억으로 느껴지시겠네요! 지금은 막혀있는 기분이 들어 읽는 내내 부러움을 샀어요! 어떤 기억은 의식과 상관없이 사멸을 선택하고 어떤 기억은 평생 함께 가야 하는, 말하자면 오랜 지병처럼 따라다닌다. 이 문장 공감많이가요~ ^^매력적인 표현인것 같습니다.! 잘 읽었어요!

    ㄴ 답글 (1)
  • 향기의 프로필 이미지

    향기

    0
    over 4 years 전

    제발 이 댓글은 저장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ㅜ ㅠ 1999년이면... 학생때였네요. 공심님의 기억의 파편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다를 건너면서 느꼈던 맘... 저도 언젠가 그곳을 갈 수 있을까 상상하며 읽었어요. 필사하고 싶은 문장이 있습니다!! 자꾸 공심님과 프라두가 겹치는건 왜일까요. 일간공심 싸릉합니다^^~

    ㄴ 답글 (1)
  •  veca의 프로필 이미지

    veca

    0
    over 4 years 전

    99년도의 기억을 이렇게 상세히 글로 쓰시니 대단하세요. 사진도 그대로 보관해두시고 제가 만약 20년 전의 여행을 글로 쓴다면 기억이라기보다 기억을 소설로 바꾸는 일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다음 글 기억과 연관이 있는 글로도 보입니다. 뉴욕여행기도 다음편이 있겠지요? 기대하겠습니다.

    ㄴ 답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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