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만 1-5권 중에서

사료로 보는 민비에 대한 평가

『매천야록』과 『윤치호 일기』 중에서

2026.09.02 | 조회 1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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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bong

지난 8 31일 발송한 개화파가 본 민비뉴스레터을 읽으신 많은 구독자들께서 상당한 충격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유길준이 스승 모스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묘사한 민비는 그 동안 국내 언론, 사극, 뮤지컬, 유행가 등을 통해 형성된 명성황후의 모습 즉, ‘나는 조선의 국모다를 당당하게 외치며 친일파와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나서 결국 목숨까지 바친 출중한 지략과 지도력, 인품을 갖춘 지도자, 애국자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료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면 현재 우리 사회에 심어진 명성황후의 이미지는 허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료는 이구동성으로 민비가 민씨척족의 우두머리로 백성을 수탈하고 국고를 탕진하면서 나라를 망국으로 이끌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 대표적인 1차 사료들을 추가로 제공해드리고자 합니다.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 12 11 ~ 1910 9 7)은 구한말의 선비로 1910년 경술국치 16일 뒤에 자결한 우국지사입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기도 합니다. 매천이 1864년에서 1910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은 구한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1차 사료 중 하나입니다. 매천야록은 민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원자(元子)가 태어나면서부터 궁중에서는 잘 되기를 비는 제사가 절제가 없이 팔도강산으로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고, 임금 또한 마음대로 연회를 베풀어서 상(賞)으로 주는 것이 헤아릴 수 없었다. 양전(兩殿) 이 하루 허비하는 비용이 천금(千金)이나 되어 내수사(內需司)가 소장한 것으로는 지출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끝내 호조나 선혜청에서 공금을 취해다 썼는데 관리책임자는 그것이 위반이라는 것을 말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1년이 채 못 되어서 대원군이 여축해 놓은 것을 모두 탕진하였다. 그래서 매관(賣官) 매과(賣科) 등 온갖 폐정(弊政)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황현 저, 이장희 옮김, 『매천야록, 上 』 (서울: 명문당, 2008), p. 149. 『한사만 III: 친미기독교파 1』, p. 815에서 재인용.]

"명산 사찰을 찾아다니며 기도하였는데 세자의 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이에) 독경하는 소경과 무당들이 각 고을에 횡행하여 이들을 맞이하고 전별(餞別)하는 일이 이어졌다. 금강산은 세상에서 흔히 일만이천봉이라 하는데 매 봉우리마다 바치는 귀중한 예물의 값이 만 꿰미에 이르렀다. 남자중이든 여자중이든 간에 (따라다니며) 인연(夤緣) 이 되어 그들이 거처하는 절집으로서 조금이라도 이름이 있다고 하면 원당(願堂)을 세우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것을 이름하여 「축리(祝嫠)」라 하였다. 시골 사람 가운데 중 떼거리를 잘못 건드려 형을 받고 집안을 망친 경우도 많았다." [황현 저, 이장희 옮김, 『매천야록, 上 』 (서울: 명문당, 2008), p. 257. 『한사만 III: 친미기독교파 1』, p. 815에서 재인용.]

"중전(中殿) 민비가 충주에 피난하고 있을 때 무당이 찾아와서 대궐로 돌아올 수 있는 시기를 점치게 하였는데 「시일을 어기지 말라」하여 중전은 신기하게 여기고 그를 데리고 환궁했다. 몸이 좋지 않을 때 무당의 손이 아픈 곳을 만지면 아픈 증세가 점점 줄어들어 날로 효험이 커졌다. 매일 중궁전에 머물러 그의 말이라면 듣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무당이 말하기를, 「자기는 관운장의 영(靈)을 받은 딸이니 마땅히 묘(廟)를 지어 받을게 해달라」 하자, 중전이 그대로 좇았고, 그 무당을 진령군(眞靈君)에 봉했다. 무당은 시도 때도 없이 양전(兩殿)을 뵈었으며 웅장한 복장으로 단장을 하기도 하였다. 양전은 그를 가리켜 웃어 말하기를, 「군(君)이 되어 믿음직하군!」 하면서 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금과 보화를 주었다. 화(禍)와 복(福)이 그녀의 말 한마디에 매어 있었으니 수령과 번곤(蕃閫) 이 가끔 그의 손에서 나왔다. 이에 부끄러움도 모르는 경재(卿宰)들이 다투어 아첨했으며, 그 무당을 누이라 부르기도 하고 의자(義子) 맺기를 원하기까지 하였다. 조병식(趙秉式) ∙ 윤영신(尹榮信) ∙ 정태호(鄭泰好)가 더욱 심했다. 그 무당에게는 김창렬(金昌烈)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비옥(緋玉)을 걸치고 다녔다고 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 무당은 본래 제천과 청풍 사이에 살았었다고 한다." [황현 저, 이장희 옮김, 『매천야록, 上 』 (서울: 명문당, 2008), p. 363. 『한사만 III: 친미기독교파 1』, p. 815에서 재인용.

위의 인용문들은 각주에 표시한 대로 이미 『한사만 III: 친미기독교파 1』에 인용했던 구절들입니다. 매천이 날짜를 일일이 기록하지 않았기에 언제 쓴 구절인지 특정할 수는 없지만 1887년 이전에 쓴 것들임은 틀림없습니다. 첫번째 기사에서 원자(元子)’, 즉 순종을 언급하는데 순종이 1874년 생임을 감안할 때 이 기사는 1870년대 중후반에 쓴 것으로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또 세번째 기사가 민비가 충주에 피난하고 있을 때라고 하는데 이는 임오군란을 뜻하는 것이니 1882년 후의 기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매천 황현
매천 황현

한편 다음 인용문은 1895 12 11일자 윤치호 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을미사변(1895 10 8)이 일어난지 불과 2달 후에 쓴 내용입니다.

"왕후폐하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시해되기 일주일 전쯤 어느 날 밤이었다. 왕후는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우아한 미소를 띠면서 민상호가 서기관으로 워싱턴에 보내질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왕후에게 유럽의 어떤 나라로 나를 보낼 수 없느냐고 물었다. 왕후는 살짝 웃으며 "말썽꾸러기"라고 하셨다. 왕후는 내가 왕태자에게 얼마나 '삼국지'를 읽어주곤 했는지, 내가 대기실에서 어떻게 졸곤 했는지, 얼마나 '나인들(궁녀들)'이 나를 좋아했는지, 왕후가 얼마나 나를 조카처럼 아꼈는지 등을 늘 신하들에게 얘기하며 기뻐하셨다." 

"왕후는 나를 다정하게 대해주었지만 나는 왕후 앞에서 늘 위엄에 눌렸다. 30년간 변화무쌍한 집권기간 동안 왕후는 대원군이든 박영효 든 이노우에 든 '굴복시키지' 못할 상대가 없었다. 죽음만이 그녀를 이길 수 있었다. 그녀가 가진 출중한 재능을 자신을 위하는 만큼이나 나라의 발전을 위해 활용했더라면 조선에 얼마나 많은 축복이 되었을까."

"지나친 이기심은 왕후이거나 노동자이거나를 불문하고 그에 대한 응보를 불러온다. 적어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왕후의 집권기간 내내 억압과 잔혹함과 부패의 연속이었음을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몇 사람을 부유하게 하는 대신 수백만 명을 굶주리게 했다. 그녀는 몇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대신 수백만 명을 비참하게 했다. 그녀는 몇 사람이 비단옷을 입고 죄악 속에 살게 하기 위해 수백만 명이 추위와 굶주림에 죽게 했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그다지 슬퍼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가? 그녀에 대한 기억은 그녀의 총애를 받았던 소수의 무리에게나 애틋할 뿐이다. 아버지 같은 사람들은 충성심과 의리에서 왕후의 죽음을 복수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극히 소수다."

윤치호
윤치호

매천이 민비에 대해서 1870년대 중반에 내린 평가나 윤치호가 1890년대 중반에 내린 평가는 놀랍게 흡사하고 일관됩니다. 매천은 조선의 전통적인 선비인 반면 윤치호는 당시 조선의 가장 세계화된 인물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사상이나 가치관, 국가관은 극단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민비에 대한 평가에서만큼은 이 두 사람의 평가가 일치합니다.

일본 삽화가가 그린 민비 초상
일본 삽화가가 그린 민비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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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땅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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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15시간 전

    잘 읽었습니다. 국내외에서 민비를 노리고 있었는데 실행자가 일본인 집단인 탓에 이 시대에 국모 급이 돼 버린 거죠. 민비 초상화는 궁녀 사진을 모사한 가짜라고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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